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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날마다 좋은 ㅎㅏ루 Nov 29. 2023

맥주가 맥주다운 이유, 홉의 레종 데트르



‘맥주가 맥주다워야지’라고 말한다면, 과연 맥주가 맥주답다는 것은 무엇일까요? 맥주를 ‘보리를 발효한 술’이라고 한다면 조선 시대의 보리술도 포함될 수 있고, ‘보리를 포함한 곡물을 발효한 술’이라고 하면 아프리카의 수수 맥주 움코보티나 네팔의 조 맥주 통바까지 맥주라 볼 수 있습니다. 물론 이러한 세계의 곡물 발효주도 넓은 의미에서는 맥주로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전통적인 기준과 현대적인 감각에서 본다면 무언가 다른 게 사실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맥주라고 하면 전통적으로 맥주의 정체성을 가진 재료가 반드시 사용되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맥주의 꽃이라 할 수 있는 홉(hop)입니다. 홉은 대단히 신기한 식물입니다. 홉은 맥주의 재료로는 중요한 존재이지만, 그 밖의 식용으로 쓰이는 경우는 거의 없습니다. 오직 맥주가 홉의 레종 데트르(존재 이유)인 셈입니다. (홉은 오래전 식용보다는 옷을 염색하기 위한 재료로 쓰였다고 합니다. 홉은 오랫동안 끓여야 쓴맛이 나므로 자원이 부족한 중세에서는 홉을 오래 끓여 쓴맛을 내는 용도로 생각하지 못했고, 염색을 위해 끓인 홉을 우연히 맛을 보니 기분 좋은 쓴맛이 난다는 것을 발견하고, 이것을 양조업자에게 전달하여 홉을 맥주에 사용하게 되었다는 설이 있습니다.) 홉은 삼과의 덩굴 식물로 대마초와는 사촌 격이지만 환각 성분은 없습니다. 이 식물의 암꽃은 마치 초록색의 작은 솔방울처럼 둥글게 생겼습니다. 이 암꽃에 함유된 알파산이 맥주의 쓴맛을 만들어 내고, 여러 가지 오일 성분이 맥주에 풍미와 아로마를 입힙니다. 바로 홉은 맥주가 맥주다운 이유를 설명합니다.

맥주는 홉의 레종 데트르


로마의 철학자 플리니우스가 말한 홉의 정체는...

홉은 학명으로 후물루스 루풀루스(Humulus Lupulus)라고 합니다. 이 말의 어원은 ‘작은 늑대’라는 뜻으로 고대 라틴어에서 나왔습니다. 이 이름은 늑대가 조용히 다가가 양을 잡듯이 홉 식물이 다른 식물을 덮치듯이 자라나 붙여졌습니다. 특히 버드나무 위에서 잘 자라서 ‘버드나무 늑대’라고도 합니다. 홉에 이러한 별명을 붙인 인물은 로마의 철학자 대(大) 플리니우스입니다. 러시안 리버 브루잉의 플리니 디 엘더(Pliny the Elder)는 보통의 IPA보다 홉을 조금 더 넉넉히 사용해 더블 IPA라고 불리는데, 바로 이 맥주의 이름이 플리니우스에서 나왔습니다. 플리니우스는 당대의 지식인이 그러했듯 군인이자, 철학자, 작가, 사학자라는 다양한 직함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는 다양한 분야에서 수많은 저작물을 남겼는데, 그중 그의 지식을 끌어모아 만든 자연사(Natural History)라는 책이 지금까지 남아 있습니다. 자연사(Natural History)는 일종의 백과사전으로 방대한 지식이 나열되어 있는데, 그중에서 홉을 식용이 가능한 식물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홉이 기록물로 역사의 전면에 나타난 순간입니다. 하지만 플리니우스는 홉을 여러 가지 야생 식물 중의 하나로만 언급했을 뿐 맥주와의 연관성을 언급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로마는 맥주의 시대는 아니었으니까요.

러시안 리버 브루잉의 플리니 디 엘더


중세 수도원장 힐데가르트, 맥주의 재료로서 홉을 언급하다.

홉을 맥주 양조에 사용했다는 최초의 기록은 9세기입니다. 822년 프랑스 북부의 코르비(Corbie) 베네딕트회 수도원의 아달하르트(Adalhard)는 수도원을 어떻게 운영해야 하는지를 명시한 규약집을 만들었습니다. 규칙 중 하나는 수도원 생활에 필요한 장작과 홉을 자연에서 구하라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을 수도원 거주자의 의무라고 했습니다. 홉에서 추출한 성분으로 염료를 만들거나 종이를 만들기도 했는데 맥주 양조에도 사용했다고 합니다. 홉을 계획적으로 재배하여 맥주 양조에 사용한 것은 훨씬 나중의 일이지만, 이 기록에서는 야생의 홉을 맥주에 이용한다고 명시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당시의 기록만 보아서는 홉을 맥주 양조에 사용한 이유까지는 알 수 없습니다. 홉의 역할이 맥주의 쓴맛과 고유의 풍미를 내기 위해서였는지, 맥주의 보존력을 강화하기 위해서였는지는 알 수가 없습니다.


맥주에서 홉의 역할을 처음으로 언급한 인물은 독일 수도원의 수녀 힐데가르트 폰 빙엔(Hildergard von Bingen)입니다. 그는 여성 수도원장으로 수많은 저서를 남긴 작가로 알려져 있는데, 대단한 맥주 애호가이기도 했습니다. 그는 특히 홉이 들어간 맥주를 좋아했다고 합니다. 중요한 사실은 그가 여성이며, 에일이 아닌 맥주를 마셨다는 것입니다. 중세에는 대부분이 맥주(beer)가 아닌 에일(ale)을 마셨습니다. 에일은 홉이 발견되기 이전에 보리, 밀, 귀리 등의 곡물과 그루트라고 부르는 허브를 첨가하여 만든 맥주입니다. 그루트란 맥주의 맛과 고유한 특성을 내기 위해 지역에서 직접 구해 사용한 다양한 허브나 식물을 말합니다. 에일은 주로 집안의 여성들이 만들었는데, 그래서 에일와이프(alewife)라는 말이 생겼습니다. 에일와이프가 집에서 맥주를 양조하고 남은 에일을 판매했는데 이러한 선술집을 에일하우스(alehouse)라고 했습니다. 에일은 빵만큼이나 중요해 거의 모든 마을에 에일와이프가 존재했습니다. 이렇게 여성이 맥주를 양조하는 전통은 수도원에서도 발견되었는데, 여성 수도사가 맥주를 양조하는 것도 당연하게 여겨졌습니다.


당시의 맥주는 현대의 맥주에 비해 품질도 낮고 맛도 보잘것없었지만 그래도 세균이 득실거리는 물보다는 나았습니다. 단체 생활을 하는 수도원에서 수도사가 물 대신 맥주를 마시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물을 마셨다가는 하루 종일 설사를 하거나 설사병에 걸려 위험에 처할 수도 있었으니까요. 게다가 수도원은 맥주 레시피의 보존이 잘 되었고, 매일 같이 맥주를 마시는 게 일상이었습니다. 이런 환경에서 힐데가르트는 맥주를 즐겨 마셨을 거라고 자연스럽게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힐데가르트는 1098년 독일 남서부 지역의 도시 뵈켈하임에서 태어나, 어린 나이에 베네딕트 수도원에 보내졌습니다. 힐데가르트는 수도원 초기부터 일종의 환시에 시달렸다고 합니다. 현대 의학의 관점에서 보면 그것은 편두통의 전조 증상이라는 견해도 있습니다. 힐데가르트는 환시를 신이 보낸 계시라고 생각했습니다. 힐데가르트는 그녀가 받은 신의 계시, 즉 환시를 기록하여 남겼는데, 이것이 당시 교황 에우제니오 3세에게 보고되었습니다. 교황은 이것을 신의 계시라고 인정했고 그녀를 예언자로 선포했습니다. 그녀는 교황이 주는 높은 영향력으로 수도원의 원장까지 오릅니다. 힐데가르트는 다른 수녀들처럼 하루 일과를 보냈습니다. 하루 일과 중에서 여덟 시간은 육체노동을 했으며 그중에 대부분은 맥주를 양조하며 매일 같이 맥주를 마셨습니다.

힐데가르트가 신의 계시를 전달하고 있는 모습


힐데가르트는 다른 수녀보다 상당한 자유를 가지고 있었고, 자유롭게 생각한 것을 수많은 저작물로 남겼습니다. 그중에서 가장 중요한 저작물이 <자연학(Physica)>입니다. 이 책은 백과사전처럼 동물과 식물, 그리고 금속이나 석재까지 광범위한 내용을 다루고 있습니다. 그중에서 가장 관심을 끄는 부분이 홉에 관해 언급한 부분입니다. 홉에 관한 설명은 현대의 관점에서 보아도 매우 정확하게 서술되어 있습니다. <자연학>의 제1권 61장 <홉에 관하여(De Hoppho)>에서는 홉을 방부제로 사용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홉은 따뜻하고 건조하며, 적당히 습기가 있은 식물로, 사람을 우울하게 하기도 하고 영혼을 슬프게 하기도 하지만 홉이 가진 쓴맛은 음료에 방부제 역할을 한다’라고. 그리고 결정적으로 다음과 같이 홉이 맥주에 쓰인다고 설명합니다. ‘홉 없이 귀리로만 맥주를 만들면 아주 많은 양의 그루트가 필요할 것이다’. 힐데가르트는 홉의 부작용이 있기도 하지만 맥주를 상하지 않게 하기 위해서는 그루트 대신 홉을 사용해야 하며, 맥주를 오랫동안 보관하는 것이 홉의 부작용보다 중요하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힐데가르트의 <자연학>은 그녀의 영향력 덕분에 유럽 전역에 전파되었습니다. 또한 덩달아 홉에 관한 지식도 전파되었습니다. 힐데가르트는 처음으로 홉의 역할을 기록했지만, 처음으로 홉을 맥주에 사용한 인물은 아닙니다. 야생의 홉이 아닌 재배된 홉을 맥주에 사용한 시기는 이보다 앞선 9세기 후반쯤입니다. 전문가들은 이 시기 독일 남부의 바이에른 할러타우 지역에서 홉을 재배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이때도 홉을 상업적으로 이용하기 위해 재배되는 시기는 아니었습니다. 상업적인 홉의 재배는 힐데가르트 이후의 일입니다. 그것은 남부 독일이 아니라 북부 독일에서 시작합니다. 바로 한자동맹의 도시입니다.


한자 동맹의 독일은 홉을 상업적으로 재배하다.

중세 북독일에는 공식적으로 창설된 적도 없고 공식적으로 해체된 적도 없지만 막강한 공동체가 있었습니다. 이 공동체는 대략 12세기부터 시작해 그 유산은 여전히 곳곳에 남아 있습니다. 가령, 북독일에서 맥주 벡스로 유명한 도시 브레멘의 공식적인 이름은 ‘자유 한자동맹 도시 브레멘(Free Hanseatic City of Bremen)’입니다. 여기서 한자 동맹(Hansa League)이란 저지 독일어를 사용하는 북독일의 90여 개 도시가 신용으로 결합한 느슨한 연합체를 말합니다. 한자(Hansa)라는 단어는 ‘한 무리의 남자’라는 뜻으로 길드 조합을 표현하는 단어에서 나왔습니다. 이들은 황제의 통제에서 벗어나 상업적인 네트워크를 형성하고 이익을 공유했습니다. 한자 동맹은 연합체의 무역로를 보호하는 것뿐만 아니라 때로는 무장 함대를 갖추고 공동체에 도전하는 세력과 전쟁을 벌일 만큼 막강한 존재였습니다. 한자 동맹의 세력권은 독일 북부의 저지대뿐만 아니라 러시아 북서부, 벨기에, 잉글랜드 동부 등 발트해와 북해를 가까이 두고 있는 나라들까지 포함하고 있었습니다.


한자 동맹의 최고 전성기는 15세기로, 동맹을 이끈 도시는 뤼베크, 함부르크, 브레멘, 쾰른입니다. 이 중 1230년 뤼베크와 함부르크 간의 동맹을 한자동맹의 시작으로 보는 견해도 있습니다. 동맹은 매우 다양한 상품들을 교역했습니다. 상품뿐만 아니라 잉글랜드의 왕 헨리 8세를 그린 화가로 유명한 한스 홀바인의 그림이나 화가 자신도, 성경처럼 하나의 사상도 교역의 대상이었습니다. 수많은 교역품에서 우리가 주목하는 것은 맥주입니다. 북유럽은 기온이 낮아 포도의 재배가 어려웠기 때문에 곡물을 이용한 맥주가 발전했습니다. 맥주는 빵보다 무역하기가 좋은 물품이었습니다. 게다가 무역 거래를 체결할 때 당사자들 간에 공식적으로 맥주를 건배하는 전통도 있었습니다.

독일의 한자동맹이 연상되는 맥주


독일 북부는 지역에서 마실 맥주를 소규모로 생산하는 남부와 달리 수출을 기반으로 하는 대형 양조장이 발달했는데, 이러한 유산이 현재까지 남아 있습니다. 가령, 1873년 브레멘에 설립된 벡스는 5,500개가 넘는 독일 맥주 양조장 중에서 맥주 생산량 순위가 항상 상위권에 있을 만큼 대형 양조장입니다(현재는 AB InBev에 인수됨). 벡스는 크롬바커(16.8%)에 이어 독일인들이 가장 많이 찾는 맥주(12.9%)로 꼽히고 있습니다(여론조사 기관 YouGov가 실시한 설문조사에 의함). 벡스의 라벨에는 브레멘의 상징인 열쇠가 그려져 있습니다. 함부르크는 거의 유일한 산업이 맥주 양조였던 도시였습니다. 기록에 의하면, 1375년 함부르크 인구의 40% 이상이 양조 산업에 고용된 것으로 추정되며, 15세기에는 함부르크에 500개가 넘는 양조장이 있었다고 합니다. 마틴 루터가 즐겨 마셨다는 아인베크의 맥주도 한자동맹의 맥주입니다. 독일 남부의 바이에른은 북부의 아인베크의 맥주를 수입하여 마셨고, 아인베크의 레시피를 모방해 복비어를 개발하기도 했습니다. 아인베크의 맥주는 인기가 좋아 독일 남부뿐만 아니라 유럽 전역, 심지어 예루살렘까지 수출되었다고 합니다.


한자 동맹의 맥주가 유럽 전역에 수출될 수 있었던 이유는 홉을 사용한 맥주였기 때문입니다. 홉 이전에는 그루트라는 허브 혼합물을 사용했습니다. 그루트의 종류가 40종이 넘어 지역이나 양조자에 따라 맥주의 맛도 가지각색이었습니다. 신성로마제국에서는 이런 그루트에 세금을 매기는 방식으로 맥주를 통제하기도 했는데, 일명 그루트레히트(Grutrecht)라는 권한을 부여받은 자만 그루트의 생산과 판매를 독점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북부의 한자동맹은 그들의 이름이 자유 도시인 것처럼 맥주도 그루트레히트에 얽매이지 않고 자유롭게 양조하였습니다. 그러다 그루트로 사용했던 허브 중의 하나인 홉을 사용한 맥주를 발전시켰습니다. 홉이 들어간 맥주는 보존성이 뛰어나 멀리 영국이나 네덜란드, 노르웨이 연안까지 수출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영국의 경우, 가장 인기 있는 맥주는 홉이 들어가지 않은 에일이었지만, 장기 보존이 가능한 한자동맹의 맥주가 수입되면서 영국의 에일은 서서히 홉 맥주에 자리를 내주었습니다.


영국은 에일을 좋아해.

영국에서 홉 맥주의 출현은 다른 유럽에 비해서 다소 늦습니다. 영국은 맥주에 있어서 대단히 보수적이어서 홉을 사용하지 않은 에일을 오랫동안 선호했습니다. 영국의 전통적인 에일은 현대의 에일과는 의미가 다릅니다. 현대의 에일은 라거와 대립하는 의미로 영국의 맥주이든 벨기에의 맥주이든 관계없이 상면 발효 효모를 사용한 맥주를 의미합니다. 하지만 영국에서 전통적인 에일은 홉을 넣지 않고 발효한 맥주를 말합니다. 에일은 맥주에 홉을 쓰지 않았기 때문에 쓴맛은 적고 대신 맥아의 단맛이 강했습니다. 영국에서는 홉을 넣지 않은 에일(Ale)과 홉을 사용한 맥주(Beer)가 한동안 별도의 술로 나란히 존재했습니다. 결국 에일도 홉으로 양조하면서 두 맥주의 차이는 사라졌고, 결국은 에일과 맥주는 같은 말이 되었습니다.


영국에 홉 맥주를 본격적으로 소개한 사람들은 네덜란드 저지대 지역에서 온 일부의 이민자들입니다. 네덜란드에서 종교적 박해를 피해 온 이민자들이나 네덜란드의 경제적 성장으로 영국에 무역하기 위해 온 이민자들이 영국 동부에 정착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들은 홉 맥주를 본국에서 수입해서 마셨습니다. 홉 맥주가 런던에 등장한 이후 서서히 홉은 잉글랜드 전역으로 확대되었습니다. 하지만 그 속도는 매우 느렸습니다. 홉 맥주를 수입에만 의존하지 말고 홉을 직접 재배해야 했지만, 영국인들은 홉을 치명적이고 해로운 식물로 여겨 다른 유럽 지역보다 홉 재배를 멀리했기 때문입니다. 영국에서 홉을 재배했다는 기록은 대략 16세기에 나옵니다. 켄트 홉이 지금의 켄터베리 근처의 웨스트비어에서 광범위하게 재배되었다는 기록입니다. 한 개의 지역에서 재배된 홉은 점차 확대되어 17세기에 이르러서는 영국의 14개의 지역에서 재배되었습니다. 재미있는 사실은 홉의 사용이 확대됨에 따라 영국 정부는 홉에 세금을 부여하기 시작했는데, 맥주 양조장들은 홉의 세금을 피하고자 오히려 브룸이나 웜우드와 같은 홉 대체물을 사용했다는 것입니다.

영국의 다양한 맥주


영국에서 에일과 맥주의 구분이 사라진 것은 대략 1800년대 중반부터라고 할 수 있습니다(물론 지금도 일부에서는 여전히 에일과 맥주를 구분해서 말하기도 합니다). 이미 에일에 비해 포터를 만드는 데 더 많은 양의 홉이 사용되었지만, 포터가 유행하는 시기에는 에일과 포터(맥주)를 구분하여 불렀습니다. 에일은 페일 에일의 개발로 많은 홉을 사용하게 되었고, 인도로 수출되는 페일 에일에는 더 많은 양의 홉이 사용되었습니다. 그러면서 에일은 더 이상 쓴맛이 적고 달콤한 술이 아닌 페일 에일(Pale Ale)로 비터 비어(Bitter Beer)와 동의어가 되었습니다. 물론 마일드 에일은 여전히 전통적인 에일의 지위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이 글은 마시자 매거진과 함께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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