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혼하면 행복하잖아요
유명한 스포츠 아나운서가 비혼에 관한 이야기를 유튜브에 올렸다. 역시나(ㅎㅎ) 많은 댓글이 달렸는데 그중에서 압도적인 찬사를 받은 댓글의 주 내용은
결혼이 얼마나 행복한건데 늙어서 후회할 짓 하지 말고 정신 차려라
였다.
결혼하면 행복하잖아. 결혼이 얼마나 행복한건데. 서로 양보해가면서 복닥거리는 게 행복이지. 아이도 둘셋 낳고 시끌벅적 애 커가는 재미도 보고. 인생이 별거야?
참 순수하고 낭만적이다. 지극히 현실주의자인 나와 맞지 않는다.
그래서 결혼 안 한다. 너무 낭만적이어서.
어렸을 때부터 '절대 결혼 안 해'를 외치던 나도 20대 초반엔 결혼이 하고 싶었다. 아담한 집에 내가 사랑하는 사람과 아이를 낳고 살고 싶었다. 옆에 있는 남자친구라면 내 평생의 동반자로 손색이 없었다. 키도 크고 얼굴도 잘생기고 학벌도 좋고 성격도 끝내주고 날 보면 눈이 반짝반짝 빛났으니까. 그게 너무 사랑스러웠다. 20대 초반 어린애 둘이 손 붙잡고 떠들었다. 대학만 졸업하고 결혼하자 사랑해. 참 순수하고 낭만적이었다.
순수하고 낭만적이지만 진심으로 가득했던 그 남자와 헤어진 이유는 마음이 식어서였다. 장거리가 되면서 물리적으로 멀어지고 눈에 안 보이니 마음이 식었다. 보고 싶다고 언제 볼 수 있냐고 묻는 남자친구의 지극히 정상적이고 다정한 문자 하나에 나는 이별을 고했다. 당시 중요한 시험을 준비하고 있던 터라 예민하기도 했지만 결국 우리는 사소한 고비 몇 개를 못 넘기고 헤어진 것이다.
그때 깨달았다. 사랑한다고 결혼하면 큰일 나겠구나.
결혼은 순수하고 낭만적이지만 난 그렇게 순수하고 낭만적으로 살 자신이 없었다.
결혼하면 행복하잖아. 결혼이 얼마나 행복한건데. 서로 양보해가면서 복닥거리는 게 행복이지. 아이도 둘셋 낳고 시끌벅적 애 커가는 재미도 보고. 인생이 별거야?
결혼한 사람들이 말하는 행복은 나의 행복과 거리가 멀다. 나의 행복은 깔끔한 집 안에서 내가 원하는 소음만 가득하고 내가 원하는 것만 하는 것이다. 아이를 둘셋 낳기도 싫다. 내 몸이 제일 중요하니까. 또 둘셋 낳은 아이를 잘 키울 자신도 없다. 나 하나 키우기도 벅차다. 모성애는 타고나는 거라는 말을 믿지도 않지만 타고나는 거래도 싫다. 모성애라니. 사랑이라는 감정으로 날 희생할 순 없다. 시끌벅적 애 키우는 재미 말고 날 키우는 재미로 살고 싶다. 오늘은 무슨 일을 했네. 오늘은 뭘 먹고 뭘 마셨구나. 오늘은 이런 것도 했어? 참 장하다 나 자신. 인생이 별건가. 날 잘 키우는 게 진짜 인생이지.
모자란 사람은 이렇게 말한다. 이기적이라고. 처음엔 반박했었다. 뭐가 이기적인가요? 다른 사람에게 피해 주지도 않고 피해받지도 않고 서로의 범위를 침범하지 않으며 나 혼자 잘 먹고 잘 살겠다는 게 이기적인가요? 그랬더니 진짜 모자란 사람이 그러더라. 너가 결혼 안 해서 결혼 못하는 남자가 한 명 있지 않겠냐고.
멍청한 사람과는 싸우는 게 아니라고 배워서 이제부터는 그냥 "네 제가 좀 이기적입니다."라고 답한다. 그럼 상대방은 혀를 차고 돌아선다.
그것도 한 때야. 나이 먹고 주름 생기면 받아줄 남자도 없다니까.
분명 나를 겁주려고 하는 말인 것 같은데 겁나지 않는다. 남자가 뭐라고. 여자의 존재 가치가 남자에게 선택받는 것이라 굳게 믿고 있는 듯한 상대에게 더 이상 해줄 말이 없다. 좁은 시야로 세상을 보고 있는 게 불쌍할 뿐이다.
난 나이 먹고 주름 생긴 나의 모습도 기대된다. 그때는 어떤 성취를 이뤘을지 어떤 생각을 가지고 어떤 취미를 즐기고 있을지 생각만 해도 신난다. 내 상상 속에 '나이 먹고 주름 생기면 받아줄 남자'는 없다. 나는 내 두 발로 혼자 당당하게 서 있을테니까.
결혼 왜 안 하세요? 결혼하면 행복하잖아요
네. 안 행복할 것 같아서요.
답이 됐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