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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쌈과 쌈무사이

“야! 오늘 무쌈 나왔다.”

“아니야! 오늘 쌈무가 나온 거야!”

급식시간에 쌈무에 고명을 넣어서 돌돌 말아 입에 넣고 있는데 아이들의 대화가 들렸다.

‘무쌈? 쌈무?’ 

가만있어 보자. 갑자기 똑똑해진 아이들의 모습에 당황했다. 익숙한 단어인데도 다시 의미를 짚어봐야 했다. 

혼자 의미를 정리하고 나서 아이들에게 알려주었다.

“얘들아, 얇은 무의 이름은 쌈무고, 거기에다가 뭘 싸서 먹으면 그게 무쌈 인거야.”

“그럼 누구 말이 맞는 거예요?"

“누구 말이 맞을까?”

“쌈무가 맞아요.”

“무쌈이 맞아요.”


“자 얇은 무를 들어보세요. 따라 해보세요. 쌈무!”

“쌈무!”


“이제 그 속에 고명을 넣어서 돌돌 말아보세요. 따라 해보세요. 무쌈!”

“무쌈!”

“그럼 누구 말이 맞는 걸까?”

“아, 이제 알았다!”

“정답은?”

“무!”

제3의 답이 나왔다. ‘둘 다 맞아요’라는 대답을 기대했는데 ‘무’라니 정말 기발하다. 

쌈무와 무쌈 사이에서 쌈박질(?)을 하는 아이들을 무시했다. 그들이 가지고 있는 흑백논리를 비웃기라도 하듯 나는 모두 답이 될 수 있음을 알려주었다. 그것도 아주 친절하게. (혼자 흡족)

그러나 친절하게 도취되어 있었던 나를 비웃듯 아이들은 다른 답을 알려주었다. 

무.

놀랍게도 이 단어 앞에서 나는 두 가지 깨달음을 얻었다. (괴롭다 보니 별것이 다 깨달음으로 오네요)

첫 번째는 정반합의 경지를 깨달았다. 무쌈과 쌈무에서 무를 찾아낸다는 것은 신선한 충격이었다. 누군가는 무슨 정반합의 경지를 갖다 붙이냐고 비난할지도 모르겠지만 이 장면은 나에게는 좀 진지한 순간이다. 쌈무가 ‘정’이라면, 무쌈은 ‘반’이고, 무는 ‘합’이 맞다. 막혀있던 내 사유의 천장이 뚫린 기분이 들었다. 

두 번째는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매일 머릿속이 새롭게 리셋(?) 되는 아이들 앞에서 여전히 괴로웠다. 7월인데 아이들 상태는 더 나빠져 갔다. 교사로서 자존감은 다시 바닥을 쳤다. 반복되는 희망과 좌절이 도대체 몇 번째인지 모르겠다는 생각에 포기하고 싶은 순간도 있었다. 나의 멘탈은 누더기가 된 지 오래였다. 그런데 한 아이의 입에서 나온 ‘무’라는 단어가 내 마음에서 공명했다.

그 울림은 습관적으로 ‘유’를 만들어 내려는 나의 마음을 해체 시켰다. 올해 내가 쓴 글 중에서 무질서와 관련된 글이 있었다. 그들의 룰을 발견하고 존중하기로 마음먹었음에도 어느샌가 또다시 나만의 룰로 그들을 끌어당겼다. 당연히 안 끌려왔다. 화가 났다. 

그런데 한 아이가 ‘없다’라고 했다. 

‘당신이 생각한 것은 애초에 없었어.’

이렇게 들렸다. 기본값, 평균값이라는 것을 기대하지 말라는 소리로 들렸다. 갑자기 내가 좋아하는 문구가 떠올랐다.

 

몸에 병이 없기를 바라지 마라.

세상살이에 곤란함이 없기를 바라지 마라.

공부하는데 마음에 장애가 없기를 바라지 마라.

수행하는 데 마 없기를 바라지 마라.

일을 꾀하되 쉽게 되기를 바라지 마라.

친구를 사귀되 내가 이롭기를 바라지 마라.

남이 내 뜻대로 순종해 주기를 바라지 마라.

공덕을 베풀려면 과보를 바라지 마라.

이익을 분에 넘치게 바라지 마라.

억울함을 당해서 밝히려고 하지 마라. 

- 『여덟 단어』, 박웅현, <보왕삼매론> 中 -

 

예전에 이 글에 큰 감명을 받고 한 줄 추가한 적이 있다.

"글 쓰는데 저절로 키보드 두드려지기를 바라지 마라."

다시 생각해봐도 명언이다. (또 자아도취 중)

그런데 오늘은 여기에 한 줄 추가하기로 했다. 

“1학년 담임하는데 교실이 내 맘대로 완벽하게 되기를 바라지 마라.”

(지금은 자아도취보다는 현실자각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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