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응답하라' 시리즈를 보면서 주인공들이 참 부러웠다. 친구들이 서로의 집을 제집 드나들듯 오가는 모습이 낯설면서도, 부러웠다. 허물없이 서로의 집을 오가며, 또 서로의 가족들과 가깝게 지내는 모습이 참 부러웠다.
아늑하고, 폐쇄적인 우리 집
우리 집에 가족이 아닌 타인이 놀러 오는 일은 극히 드물었다. 학창 시절에도 내가 친구 집으로 놀러 간 적은 많았지만, 집으로는 친구를 잘 데려오지 않았다. 우리 집은 외부인을 편하게 환영하는 분위기가 아니었다. 체면을 중요시하는탓이었을까? 날것의 모습을 남한테 보여주는 게 불편해했던 것 같기도 하다.한마디로 우리 집 분위기는 가정적이면서도, 폐쇄적이었다. 어쩌면 대가족에서 핵가족으로 변하는 시대의 분위기의 영향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어쩌다 보니 펜션사장
그런 폐쇄적인 성향을 가진 사람들이, 낯선 사람들을 집에 들여 편히 머물게 하는 일을 하고 있으니 참 아이러니하다. 신이 우리를 사랑해서, 우리에게 부족한 것들을 채워주기 위해 우리 앞에 이 길을 만들어주신 걸까? 사실 아직도 마음이 왔다 갔다 한다. 손님들이 반갑고, 사람들에게서 얻는 그 에너지에 힘이 불끈 나다가도, 사람들이 너무 많아서 지칠 때면 사무치게 혼자 있고 싶고, (격하게 표현하자면) 다들 우리 집에서 나갔으면 좋겠다. 그간 뾰족한 부분들이 많이 닳고 닳아, 이제는 손님들과 부대끼며 나름 잘 지내고 있지만, 이 일이 기질적으로 잘 맞는지는 모르겠다.
성수기 초능력자
집에 손님을 초대하는 일은 많은 신경을 곤두세우게 한다. 눈에 보이는 더러운 것들을 치워 깔끔해 보이게 만들고, 하수구에서 구리구리 올라오는 악취를 없애고, 술 취한 손님들 때문에 조용한 손님들이 피해를 볼까 노심초사하며 밤새 쫑긋 귀를 세운다. 온몸의 감각이 곤두선 '초예민' 상태이기 때문에 승모근도 잔뜩 치솟아있는데, 이때 키를 재보면 비수기보다 1~2센티정도 키가 클지도 모르겠다.눈앞의 손님을 응대하면서, 전화 예약을 받고, 인터넷 예약을 막고, CCTV를 보고, 빨래를 개고, 1인 N역을 해내는 면모도꽤나 초능력자 같지 않은가? 비수기가 되고 보니, 성수기의 내가 철인 같고, 초능력자 같이 느껴진다.
비수기 무능력자
성수기에 내가 가진 감각과 능력을 모두 소진한 나머지, 비수기에는 무능력자가 돼버린다. 부동산 영끌 투기와 다를 바가 없다. 미래의 체력과 집중력, 인내심과 사회성을 죄다 끌어다 사용하고, 남은 반년은 빈털터리가 되어 허덕이는 것이다. 성취감과 만족감, 자기 효능감도 미리 당겨 반년동안 차고 넘치게 누리고, 남은 반년동안 무능력함, 쓸모없음, 무가치함과 싸운다. 하지만 이 싸움 또한 격렬하지는 못하다. 그저 가늘고 길게 지지부진한 싸움을 몇 개월간 이어갈 뿐이다.
일 년 중 절반은 체면차리느라 버둥거리고, 남은 절반은 몽롱해진 정신 차리느라 파닥거리는 셈이니.. 끌끌.. 어쩐지 내 인생은 모 아니면 도, 중간이 없는 느낌이다.
흐리멍텅 흘러가는 12월
나는 비수기에 접어드는 12월부터 본격적으로 늘어지기 시작한다. 열과 성을 다해 침대를 벗어나지 않으려노력하고, 잠에 잡아먹힌 듯 자고 자고 또 잔다.그렇게 한 3일가량 물밖에 끌려 나온 해파리처럼 축 늘어져있다 보면 자연히 몸이 아파오기 시작한다. 제때 먹고, 자고, 씻으며 생활하지 않으니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빨간 불이 켜질 수밖에.. 사람이 이렇게까지 정신을 놓고 흐리멍텅하게 흐물거릴 수 있구나 놀랍지만, 성수기 노고에 대한 보상심리라고생각하면 마음이 짠해진다. 다른 펜션사장님들은 비수기를 어떻게 보내고 계시려나.. 다들 12월을 어떻게 보내고 계신가요..?
긴장의 총량
인간이 쓸 수 있는 긴장의 총량이 정해져 있는 건가 진지하게 생각하게 된다. 비수기에도 적당히 긴장감을 유지하면서 루틴을 이어나가면 얼마나 좋을까? 성수기에 바빠서 못했던 것들을 버킷리스트 지우듯 하나씩 하면 좋을 텐데, 성수기가 끝남과 동시에 바짝 조인 기타 줄이 팅~ 끊어지듯 정신줄을 놓아버린다. 성수기에 에너지를 끌어다 썼으니 그럴 수 있다고 합리화하며, 지루하고 무기력한 동시에 굉장히 자기파괴적인 일상을 흘려보낸다.
쿨타임 완충
12월 한 달가량 해변에 밀려 나온 해파리처럼 축 늘어져있다 보면 1월이 되어서야 비로소 좀이 쑤신다. 해파리가 햇살이나 바닷물에 적셔져 말랑해진 느낌은 아니고, 차가운 겨울바람에 껍질이 말라 생명에 위협을 느낄 정도로 버섯버석해진 느낌이랄까? 긴장의 총량이 있듯, 늘어짐의 총량도 있는지 '와 이러다 인생 망하겠다'는 직감이 빡 오면서 경각심이 생긴다.성수기에 다 써버린 열정의 쿨타임이 다 찬 것이다. 이제 슬슬 게이지가 차오르는 듯하다. 다시 글을 쓰면서 해파리가 물로 돌아갈 수 있게 생명력을 불어넣어 봐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