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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lowletterpot Nov 16. 2021

두려움과 진실 선택하기

Listen to your mind

당신은 망망대해를 표류 중이다. 파도는 거칠고, 당신이 탄 작은 구명보트에는 한낮의 따가운 해를 가려줄 천막조차 없다. 하지만 사실 천막 따위는 큰 문제가 아니다. 이곳이 어디인지, 어디로 가고 있는지 알 수 없단 것도 지금은 문제가 아니다. 시시각각 당신의 생존을 위협하는 것은 당신과 함께 구명보트에 탄 뱅갈 호랑이다. 


뱅갈 호랑이에겐 이름이 있다. 리처드 파커. 처음 보트에 타 있던 얼룩말과 하이에나, 오랑우탄은 모두 리처드 파커의 먹이가 되었다. 다음은 당신 차례이다. 당신이 리처드 파커에게 잡아 먹히지 않고 자비 없는 바다에서 살아남아 사람이 사는 육지에 도착할 확률은 얼마나 될 것인가.


위 내용은 동명의 소설을 원작으로 한 영화 라이프 오브 파이Life of Pi의 줄거리이다. 영화가 끝날 무렵 다시 영화가 시작되는 영화라는 평이 있을 만큼 많은 생각할 거리를 주는 이 영화의 주인공 파이는, 결말부터 말하자면 살아남는다. 그리고 이렇게 말한다. 리처드 파커가 없었다면 그 바다에서 버틸 수 없었을 거라고. 내내 자신의 목숨을 위협하는 호랑이가 있어 그는 긴장감을 유지할 수 있었고, 안도감을 느낄 수 있었고, 한 척 뗏목에서도 성장할 수 있었다. 





파이와 함께 삶으로 밀어 넣어진 호랑이는 아마도 우리의 두려움을 상징하는 것이리란 생각을 했다. 태어나며 우리는 삶에 대한 두려움으로 울음을 터뜨리고, 죽음에 대한 두려움으로 눈을 감는다. 살아가는 동안 크고 작은 두려움과 함께 하며, 두려움 없는 삶이란 없다. 


나는 내 삶이 아무것도 아닌 채 끝날까 두려웠다. 지금이 지나고 나중이 오면 나아질 거라는 믿음으로 버티다가, 그마저 흔들리는 것이 두려웠다. 두려움이 두려워 삶에서 도망치고 싶었다. 그럴 수 없었기에 도망치는 걸음을 바깥으로 내디뎠다. 추운 겨울, 나는 달리기를 시작했다. 




어떤 날은 아침에, 또 어떤 날은 밤에, 눈이 오는 날에도, 가끔은 주말에도 달렸다. 한강을 달리는 멋진 러너들을 상상했건만 나의 달리기는 언제나 천근만근이었다. 추위도 큰 방해물이었다. 주섬주섬 두터운 양말을 신으며, 나는 겨울만 아니었다면 훨씬 좋았을 텐데 하고 생각했다. 


달리면서도 나는 끊임없이 생각했다. 


'왜 나는 하필 지금 달리기를 시작한 거지?', '운동화를 좀 더 좋은 걸로 사야 하나?', '이 골목길은 왜 이렇게 차가 많이 다니는 거야', '이따가 뭐 먹지?', '무릎이 좀 아픈 것 같은데'.


그러다 아주 가끔 '달리는 맛'이 느껴졌다. 차오르는 숨과 다음 내딛을 걸음만이 전부가 되는 순간이 종종 찾아왔다. 그때의 나는 여기가 아니라 다른 곳을 꿈꾸지 않았고, 오늘이 아닌 내일을 살길 바라지 않았다. 나의 달리기를 누군가와 비교하지 않았고, 나의 헐떡임이 부끄럽지 않았다. 


겨울이 아니면 더 잘 달릴 수 있을 것 같았지만, 겨울이 지나고 나의 달리기는 자연스레 멈추었다. 포기한 것은 아니었다. 언제라도 달릴 수 있는 사람이 되었기에 그걸로 충분했다. 





그 바다에서 파이가 그랬듯, 두려움과 함께 우리는 성장한다. 


삶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이 삶으로의 한 발을 내딛게 하기도 하고, 삶을 위협하는 두려움도 넘어서면 발판일 뿐이다. 세상에 두려움이 없는 사람은 없다. 호기롭게 "난 무서운 게 없는데?"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분명 스스로를 무서워하고 있을 것이다. 나 역시 여전히 내가, 나의 삶이 무섭다. 하지만 실패하는 내가 두렵고, 실패하는 내가 무너트릴 사람들의 기대가 두려워 이도 저도 아닌 인간이 되지는 않을 것이다. 




라이프 오브 파이Life of Pi의 결말은 두 가지이다. 호랑이와의 표류기를 납득하기 어려워하는 사람들에게 파이는 또 다른 이야기를 들려준다. 이 이야기에서는 호랑이와 하이에나, 오랑우탄, 얼룩말이 아닌 선박의 주방장과 선원, 그리고 파이의 엄마가 구명보트에 탄다. 


“구명보트를 탄 주방장과 선원이 제게 튜브를 던져줬어요. 엄마는 바나나 덩어리를 타고 왔고요. 이렇게 넷이 살아남았어요. 선원은 탈출 과정에 다리가 부러져 고통스러워했어요. 치료하려 했지만 감염이 심했어요. 주방장은 그냥 놔두면 죽을 거라고 했어요. 자신이 붙잡을 테니 저랑 엄마에게 그를 꽉 붙잡으라 했죠. 저는 그의 고통을 영원히 이해 못 할 거예요. 하지만 결국에 그는 죽었어요. 다음날 주방장이 황새치를 잡아왔는데, 엄마가 화를 냈어요. 왜냐하면 주방장이 죽은 선원의 살점으로 낚시를 했기 때문이에요. 엄마는 주방장의 뺨을 때렸어요. 엄마는 저에게 구명조끼로 만든 뗏목으로 가라고 했어요. 하지만 시간이 자나도 엄마는 뗏목으로 오지 않았어요. 주방장의 손에 죽은 거예요. 주방장은 피 흘리는 엄마를 바다에 던졌어요. 저는 어쩔 도리가 없었어요. 다음날 그를 죽였어요. 그리고 그가 선원에게 한 대로 똑같이 해줬어요.”  



우리는 두 이야기 중 어떤 것이 진실인지 알 수 없다. 그리고 파이는 묻는다. 


"당신은 어떤 이야기를 더 선호하나요?" 


그렇다면 이제 우리는 진실을 알 수 있다. 진실은 정확히 우리가 믿는 것이다. 나는 리처드 파커와 생존한 파이의 이야기를 믿는다. 그 이야기가 더 마음에 들기 때문이다. 당신의 진실은 무엇인가. 그리하여 당신의 두려움은 또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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