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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인 Apr 23. 2022

시트콤 같은 하루

2022년 4월 첫째주

인생은 멀리서 보면 희극, 

가까이서 보면 비극이라고 했던가.

내 인생에도 시트콤의 한 에피소드같은 일이 벌어졌다.





띠링. 지 메일 푸시 알람이 울렸다.


[2022년 연봉 조정의 건]


안녕하세요 000차장입니다. 아래와 같이 2022년 연봉 인상 내용 안내드립니다.

확인 후 문의 사항이나 이의가 있으실 경우 회신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얼른 문서를 열어봤다. 구두로 약속한 금액이 맞았다. 안도감과 동시에 이 정도 상승폭에 만족하고 있자니 서글펐다. 일이 힘들면 돈이라도 많이 주던가. 언젠가 내 이 회사 때려치고 만다. 오늘도 속으로만 생각하고 잡코리아 앱을 켰다. 나만의 소극적인 자기 표현이랄까. 아무튼 1위부터 100위까지 쇼핑몰 옷 구경하듯 스크롤을 내리던 내게 한 공고가 눈에 띄었다. [J 음악 예능 스튜디오 피디 공채] 팬텀싱어 연출진이 음악 스튜디오 자회사를 새로 차린 모양이었다. 팬텀싱어라니… 거기다 공채라니… 최근에 라포엠도 영입했다고? 이건 나를 위한 자리가 아닌가. 그곳에서 일하게 된다면 진정한 덕업일치를 이룰 수 있지 않을까? 솔직히 비긴어게인 같은 데로 안보내줘도 라포엠 브이로그 찍으라고 해도 좋을 거 같았다. 나 주 7일 근무할 수 있다. 그런 각오로 자소서를 썼다.



반년만에 써보는 자소서였다. 취준 때는 괴롭기만 했는데 진짜 가고 싶어서 쓰는 자소서라 그런지 나름 재밌게 썼다. 시간이 없어서 급하게 쓴 감이 없잖아 있지만 만족스러웠다. 서류 발표 할 때도 솔직히 될 거라는 확신이 있어서 떨리지도 않았다. 서류 발표가 나고 메일로 면접 날짜를 받을 때가 더 떨렸다. 촬영 날이랑 겹치면 어떡하지, 시사 날짜랑 겹치면 빠진다고 할 수 있을까. 오만가지 생각이 다 들었다. 불행 중 다행으로 면접은 단 하루 일정이었다. 다만 그 하루가 촬영 다음 날이었다. 아 신이 나를 시험하시는구나. 아예 못가게 하지는 않으시면서 내 체력과 정신력을 시험해보시려고 이런 식으로 날짜를 주시는구나.



면접 전 날 새벽 5시. 대부도의 한 골프장 주차장. 봉고 문을 열자 찬 바람이 휭 불었다. 험난한 하루가 시작되겠구나. 나인홀 돌기 전에 얼어 죽겠다. 속이라도 채우자 싶어 김밥을 집었는데 하필 치즈 김밥이었다. 엑 내가 싸도 이 것보다는 맛있겠다(아니다). 배는 너무 고픈데 너무 맛없어서 반쯤 남겼다. 다행히 대리님이 자기 참치김밥 3알 나눠줬다(천사). 그렇게 주린 배 채우고 무사히 18홀 다 돌았다. 하늘이 도우신 것인지 이번 카트에는 엉따(시트에 열선이 있음)가 있었다. 다행히 감기에 걸리지 않고 집에 돌아올 수 있었다. 집에 오니 밤 11시가 다 되었다. 면접 준비 조금 하고 자려고 했는데… 흠 1분 자기 소개 중에 ‘안녕하십니까 000에 지원한 아무개입니다’를 쓰고 잠들어 버렸다.



다음 날 아침 7시. 생전 일어나지 않던 시간에 일어나려니 너무 힘들었다. 백만 년만에 화장도 하고, 타이트한 슬렉스와 블라우스를 입었다. 솔직히 전신 거울 보고 너무 낯설었다. 사람이 보여주는 것도 중요하긴 하구나. 이런 걸 면접 날에나 깨닫다니… 웃겼다. 그렇게 낯선 나와 함께 집을 나서서 버스를 탔다. 매일 가는 출근 길인데 또 낯선 느낌이 들었다. 면접 보는 회사와 지금 회사는 고작 10미터 정도 떨어져 있는데도 말이다. 매일 보는 건물과 다른 건물로 들어가니 이상했다.


로비에 들어가니 로비 직원이 면접 보러 왔냐고 하면서 대기 장소를 안내해주셨다. 그곳에는 열 댓명 남짓한 사람들이 있었다. 코로나 검사를 하고 총 4개 조로 나뉘어 실무 과제 및 테스트가 이어졌다. 제일 하고 싶지 않았던 팀 과제가 오전 과제에 있었다. 점심시간이 되자 면접비를 나눠주며 점심을 각자 먹고 돌아오라는 안내가 이어졌다. 우리 회사와 불과 몇 미터밖에 떨어지지 않은 곳. 불안했지만 아직 면접은 7시간이 남아있었다. 일단 오전에 만났던 팀원들과 함께 가까이 있는 식당에서 밥을 먹고 오기로 했다.


한창 직장인들이 몰릴 시간 12시 반. 우리 회사 사람들의 일과는 보통 2시 이후에 시작되므로 조금은 안심했다. 건물 밖에 나와 신호등을 건너는 순간 전화가 걸려왔다. 방심은 금물이라고 했던가 후배 Y였다. "그렇게 쫙 빼입고 어디 가세요?" 나는 촬영 다음 날이라 친구랑 놀러 나왔다고 둘러댔다. 면접 본 것을 들켰다는 생각에 정신이 아찔해졌다. 그렇게 오후 시험과 면접 일정이 어떻게 지나갔는지 모르겠다. 수면 부족인지 코로나 후유증 때문인지 머릿 속 말이 혀 끝에 맴돌았다. 하고 싶은 말은 많았는데 예전의 나처럼 좋게 내뱉는 법을 잊어버린 것만 같았다. 아쉬움 속에서 일정을 끝내고 집에 돌아가려는 길...


친구 J가 생각났다. J를 불러내 곱창을 먹으며 오늘 있었던 일들을 쏟아냈다. 요약하면 면접은 망했고 회사 생활은 더 망했다는 내용이었다. 모든게 엉망진창. 사실은 꿈이었으면 좋겠다, 아니 시간을 되돌려 다시 한번만 기회가 주어졌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나마 J 덕분에 집에 가서 처량하게 혼자 우는 일만은 피할 수 있었다.


아 그래서 이게 왜 시트콤이냐고? 웃기지도 않고 우울하기만 하다고? 굳이 따지자면 여기까지는 블랙 코미디인데... 남은 이야기를 하자면 이렇다. 회사 앞에서 나를 봤던 Y는 다음 날 내게 이렇게 말했다. "옆에 있던 남자는 누구예요?" 싱글벙글 웃으면서 묻는 모양이 이상했다. 아... 얘는 내가 면접을 보러 갔다 온 게 아니라 소개팅을 갔다 온 거라고 생각하는구나. 눈물 머금은 신이 나를 바라보시던 게 분명하다. 나를 안쓰럽게 여기신 것이지. 다행히 Y는 센스쟁이 표정을 지으며(긍정적 표현이지만 전혀 긍정적인 표현이 아니다) "에이 일단 비밀로 해드릴게요. 나중에 소개해주세요"하고 가버렸다.


소개팅 성공 안 해도 되니까 새 직장하고의 로맨스나 성공했으면 좋겠다. 오늘의 재미없는 시트콤 이야기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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