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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인 Mar 19. 2019

눈이 부시게 오늘을 살아라. 당신은 그럴 자격이 있다.

스물넷, 두 번째 휴학 이야기

언제부터인가 겨울은 항상 절망을 던져주고 떠나간다. 다시 오겠다면서. 외환 위기가 닥친 서른을 넘어서부터 겨울은 항상 나에게 굶주림의 고통을 주었다. 건기를 맞은 아프리카의 동물들이 굶주리듯 이것은 하루하루의 생계만 유지하면서 삶에 지쳐가는 잡부의 인생이 치러야 할 대가다.... 홈리스 아닌 홈리스로 지내려고 했지만 지금 나에겐 자존심, 창피함 등은 거창하게 들리는 꿈같은 말일뿐이다. 생존이 우선이다. 절망의 겨울도 보내야 한다. 시간을 버려야 내가 산다. 새로운 시간이다.
행복한 시간과 불행한 시간의 길이를 서로 다르게 만들어버리는 것은 뇌가 갖고 있는 특이하고 신비한 능력이다. 떨어지는 삼 초 정도의 시간이 하루처럼 느껴지며 살아온 생이 다큐멘터리 필름처럼 지나갔고 그 끝에서 나는 갈구하며 절로 기도하였다. 이대로는 죽고 싶지 않습니다. 정말로 살고 싶습니다,라고. (오늘, 내일, 모레 정도의 삶에서 발췌, 임상철 저)



문제집을 사러 들른 교보문고에서 익숙한 모자가 그려진 표지를 봤다. 빅이슈 판매원(빅판)이 쓴 글을 엮어 만든 책이었다. 제목은 <오늘, 내일, 모레 정도의 삶>이다. 어릴 적 이상하게 좋은 일이 연속되면 나는 어린아이 답지 않게 '이제 불행할 일이 일어날 일만 남았군'하며 불안해했는데, 이분의 글에서 그때의 내가 보였다. 나는 행복과 불행은 동등한 시간을 가졌다고 생각했는데, 기구한 사연이 적힌 이야기를 읽어갈수록 우리네 인생은 자꾸 불행한 시간의 길이를 늘리려고만 하는 것 같고, 신은 어쩐지 또 다른 시험을 주시려는 것 같다고 느꼈다. 


이분은 자신의 인생을 너무 낙관적으로도, 비관적으로도 보지 않으셨는데, 녹록지 않은 삶 속에서도 예술인으로서의 자신, 아름다웠던 시절의 자신을 잊지 않고 있는 모습이 멋있었다. 빅이슈 뒤쪽에 꽂아 나눠줬다는 두쪽 남짓한 글들의 묶음을 보면서 따뜻한 곳에서 '힘들다'라고 징징대는 내가 부끄러웠다.


그리고는 집에 돌아와 드라마 <눈이 부시게> 마지막 화를 봤다. 이런 내 생각을 읽기라도 한 듯, 혜자 할머니는 이런 대사로 이야기의 문을 닫았다.


내 삶은 때론 불행했고 때론 행복했다. 삶이 한낱 꿈에 불과하다지만 그럼에도 살아서 좋았다. 새벽에 쨍한 차가운 공기 꽃이 피기 전 부는 달콤한 바람 해 질 무렵 우러나는 노을의 냄새. 어느 하루 눈부시지 않은 날이 없었다. 지금 삶이 힘든 당신 이 세상에 태어난 이상 당신이 모든 걸 매일 누릴 자격이 있다. 대단하지 않은 하루가 지나고 또 별거 아닌 하루가 온다 해도 인생은 살 가치가 있다. 후회만 가득한 과거와 불안하기만 한 미래 때문에 지금을 망치지 말라. 오늘을 살아가라. 눈이 부시게. 당신은 그럴 자격이 있다. (눈이 부시게 12화 중에서)


때론 불행했고 때론 행복한 것이 삶이고. 그럼에도 어느 하루도 눈부시지 않은 날이 없다고 고백하는 알츠하이머 할머니의 모습, 아니 혜자의 말에서 나는 위안을 얻는다. 휴학을 하고 나서 거리를 거닐며 바쁘게 지나가는 사람을 볼 때 대단하지 않은 내 일상을 마주할 때 너무 힘들었다. '아, 나는 왜 여기서, 이렇게 혼자'라는 생각이 들 때 이 구절을 기억하려 한다. 후회만 가득한 과거와 불안하기만 한 미래 때문에 지금을 망치지 말라. 눈이 부시게 오늘을 살아라. 당신은 그럴 자격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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