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내일도 뭉칠까요?"
A의 엄마에게 문자했다.
우린 A의 집에서 막 돌아온 상태였다.
코로나 확진자가 걷잡을 수 없이 늘어가던 2020년 2월말, 어린이집과 유치원은 긴급보육 체제를 시행했다. 아예 운영을 중단 할 수도 있었겠지만, 이 시대의 많은 맞벌이 가정을 위한 정부의 방침이었다. 반면, 전업주부인 내겐 '가정보육'이라는 엄청나고도 묵직한 중압감이 머리 위로 쿵! 떨어졌다.
'집에서 두 아이와 ....어떻게 버티지?'
가혹한 현실을 외면하고 싶었다. 솔직히 처음엔 어떻게든 버티겠지 싶었지만, 막상 가정보육을 이틀해보니 속절없이 무너졌다. 그럼에도 내가 버틸 수 있었던 이유는 어려움을 함께 나눌 사람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건 바로 A의 엄마였다.
A는 우리딸과 어린이집 친구였다. 성별은 달랐지만 각별히 친하게 지냈고, 서로의 집도 몇 차례 오간 사이다. 첫 가정보육을 시작하는 시기부터 우린 서로의 집을 은신처 삼아 주 3~4일을 왕래했다. 오늘은 우리집, 내일은 A집. 그러다 며칠 쉬기도 했고, 연달아 서로의 집에 가기도 했다. 그렇게 지내다 보니 가정 보육 절반을 A와 함께 보냈다.
함께 하는 시간이 쌓일수록 서로의 집에 익숙해졌다. 끼니를 해결한 후엔 내 집인양 설거지를 했고, 피곤하면 누웠다. 여분의 접시, 간식, 장난감 등등 집안 물건의 위치도 빠싹하게 꿰뚫었으니 필요하면 각자 알아서 썼다. 많은 날의 왕래로 우리에겐 신뢰를 넘어 굳은 믿음이 생겼다.
"오늘은 제가 애 볼께요. 우리 집에 A 보내세요! 그 시간에 푸~욱 쉬시고요!"
서로의 아이를 맡기기 시작했다. 초반엔 상대의 엄마가 걱정할까봐 아이들의 모습을 사진 찍어 보냈다. 그러나 나중엔 이마저도 하지 않았다. 7살 아이들은 엄마 없이도 별일없이 잘 놀았으니까. 새로운 환경, 색다른 장난감, 함께 놀 친구. 이 삼박자가 있는데 어찌 즐겁지 아니할까. 나는 그저 잠깐씩 놀이를 거들고 간식을 챙겨주면 됐다.
재밌는 것은 A가 우리집에 자주 오면서 루틴이 생겼다는 거다. A가 오면 베이블레이드(팽이) 로 놀이는 시작된다. 베이블레이드는 A가 가장 좋아하는 놀이다. 그 후론 베개 싸움, 소꼽놀이, 간식 먹으며 Wii하기,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 풍선 놀이를 순차적으로 하고 저녁을 먹고 티비를 봤다. 그러다 보면 어느 새 어둑어둑한 밤이었다. 저녁 8시면 A의 엄마가 데리러 왔다.
"잘 쉬었어요?"
"덕분에요! 너무너무 고마워요! 내일은 우리집에 보내요!"
아이들 역시 이별 인사는 '내일 또 만나'였다. 그럼 내일은 세연이가 갔다. 세연이 역시 저녁 8시까지 신나게 놀다 집에 왔다. 그렇게 우리는 어디 나갈 수도 없는 갑갑한 가정보육을 의지하며 버텼다.
만약 서로 돕지 않았다면 이 시간을 어떻게 보냈을까?
얼마나 힘들었을지 상상이 가고도 남는다.
그걸 알기에 우린 더욱 망설임 없이 도왔고, 손 내밀었다.
이 시기에 엄마들은 겨울보다 더 강하고 가혹한 마음의 추위를 앓았다. 나도 그랬고, 주위의 엄마, 아빠, 더 나아가 모든 사람이 그랬다. 혹독한 추위를 이겨낼 방법은 우리 앞에 놓인 현실을 직면하고 견디는 일 뿐이었다.
그 외에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앞에 놓인 현실로 엄마들은 하루하루 지쳐갔다. 그때 이런 생각을 많이 했다. 과거의 육아가 더 나았던게 아닐까. 내 어린 시절만 하더라도 할아버지, 할머니, 큰 삼촌, 작은 삼촌, 고모, 우리 가족은 한 집에서 박작박작 살았다. 가게를 운영하는 부모님은 아침 일찍 나가 밤 늦게 돌아왔다. 그 사이 나를 돌본 건 삼촌과 고모였다. 20살 언저리의 삼촌과 고모는 2살도 안된 조카의 똥기저귀를 스스럼 없이 갈았고, 돌봤다. 그 시대에 비해 지금은 가족구성원이 단출하다. 정말 많아야 다섯 식구다. 이런 환경에서 엄마들은 육아를 헤쳐간다. 도움이 필요할 때면 보통 친청 부모님이나 시부모님에게 청한다. 그것도 여의치 않은 엄마들은 홀로 양육한다.
이 시대의 육아는 녹록치 않다. 그래서 많은 엄마들이 육아 커뮤니티에 접속해 감정을 쏟아내고, 고민을 나누고, 궁금증을 해소한다. 그 중에 적극적인 엄마들은 더 나아가 오프라인으로도 인연을 발전시킨다. 적극적이지 않은 나는 오프라인으로 인연을 발전시키는 엄마들을 볼때면 새롭고 신기하다. 그런걸 생각하면, 어린이집에서 잘 맞는 인연을 만난건 내게 행운이었다. A와의 인연은 첫째가 5살때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8살) 이어져 오고 있다. 당연히 지금도 도움을 주거니 받거니 하는 각별한 사이다.
불현듯 감사했다.
서로의 고됨을 아는 이가 있다는 것이
아이를 믿고 맡길 수 있는 엄마가 있다는 것이
서로서로 도움을 주고 받는 엄마가 있다는 것이
혹독한 가정보육을 견딜 수 있었던 것은 함께하는 이가 있었기 때문이다. 이 인연은 코로나 시국에 진정한 빛을 발했다. 내 주위로 넓게 퍼진 빛의 따스함으로 코로나의 추위를 이겨낼수 있었다. 서로의 관심과 도움의 손길이 분주히 오갔던 코로나 시국의 공동육아를 나는 잊을 수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