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솔한 검사의 이야기 <친애하는 나의 민원인>, 정치적 해석은 말았으면
스스로 높은 별점을 매겨놓고 나만 알고 있는 줄 알았던 작가의 책이 갑자기 유명세를 타면 양가적인 감정이 들곤 한다. 내 안목이 비로소 인정(?) 받았다는 뿌듯함과, 나만의 연인(?)을 이제는 만인의 연인으로 돌려보내야 한다는 서운함이 동시에 드는 것이다.
홍영준 원자력병원장님의 '공릉역 2번출구' 칼럼에서 언급한 <친애하는 나의 민원인>을 처음 도서관에서 빌려본 게 두 달쯤 전이었던 것 같다. 지금은 국회의원이 된 김웅 의원이 검사 시절에 썼던 <검사내전>을 재미있게 읽었던 터라 여성 검사가 쓴 이번 책에도 쉽게 관심이 갔다. 내용은 기대 이상이었다. 특히 소설을 쓰듯 공들여 쓴 문장은 이 책을 아껴서 읽고 싶게 만들었다.
"어디든 조금 외곽에 머무는 것을 좋아한다"는 저자는 지난 2006년부터 검사생활을 시작한 이래 줄곧 대구 주변에서 근무해 '신라검사'라는 별칭이 붙었다고 한다. 거기다 저자 본인도 책에 썼듯이 검찰에서 자타공인 출세 코스로 알려진 특수부(현 반부패수사부)와 공안부(현 공공수사부)와는 아예 인연이 없고 검찰 업무 대부분을 줄곧 형사부와 공판부에서 보냈다. 커리어만 놓고 보자면 서울과 대구의 거리만큼이나 출세와는 멀리 떨어져 지내온 셈이다.
공교롭게도 정치적 성향이 정반대인 유명 일간지와 유명 인플루언서가 동시에 이 책을 소개했다.
13일 자 조선일보의 신간 소개에서는 현직 판사이자 <어떤 양형이유>란 책을 쓴 박주영 판사가 '문장이 아름다운 직업 에세이 5권'을 소개하면서 1순위로 <친애하는 나의 민원인>을 꼽았다. 박 판사는 이 책에 대해 "스스로 중심에서 벗어나 있다고 말하는 검사가 쓴 책이다. 그러나 그가 쓴 문장의 중심은 강력하고 아름답다"고 소개했다.
같은 날 유시민 전 노무현재단 이사장은 MBC 라디오에 출연해 여야 대선후보에게 어떤 책을 추천하겠냐는 질문에 윤석열 후보에게 추천할 책으로 역시 <친애하는 나의 민원인>을 꼽았다.
유 전 이사장은 이 책에 대해 "정말 인간다운 마음, 시민의 상식을 가진 사람이 검사로 근무하면서 어떻게 자기 일을 대하는지, 어떻게 사람을 대하는지, 어떻게 사건을 파고드는지 등 자신의 일상을 다룬 에세이"라고 소개했다. 그러면서도 이 책을 윤 후보에게 추천한 이유에 대해선 "알아서 해석하라"고만 말했다.
여러 가지 해석이 가능한 것처럼 말했지만 전달하고자 한 메시지는 자명해 보인다. 윤석열 후보는 검찰 내 '특수통'의 계보를 잇는 인물로 중간에 우여곡절이 있었다고는 하지만 특수부 검사로서의 짱짱한 커리어를 바탕으로 결국 검찰 조직의 수장 자리에까지 올라갔다. 결국 유 전 이사장이 전달하고자 한 메시지는 인간다운 마음이나 시민의 상식과 동떨어진 '특수부' 출신 검사는 대통령으로 부적절하다는 것으로 '해석'된다.
검찰의 형사부는 수적으로 가장 많은 검사들이 몸담고 있는 곳이다. 처리해야 할 일도 많고 검찰을 가장 잘 대표한다고 할 수 있는 곳이지만 일을 해도 티가 안 나는 곳이기도 하다. 소위 출세와는 거리가 먼 곳이다. 정치인이나 재벌 등 언론의 주목을 받는 사건은 대부분 특수부에서 다루기 때문에 그 많은 전국의 형사부 검사들은 언론과 직접 접촉하거나 언론에서 다뤄질 일이 별로 없다. 검사 생활 대부분을 형사부에서 보내며 스스로를 생계형 검사로 칭한 김웅 의원이 쓴 <검사내전>이 화제가 된 건 그동안 좀처럼 들어보기 힘든 형사부 검사의 일상을 다뤘기 때문이다.
언론사에서 검찰의 형사부와 유사한 부서가 사회부다. 가장 많은 인원이 근무하는 곳이고 누구나 거쳐가야만 한다. 특히 종합일간지나 방송사의 경우 거의 대부분 6개월간의 수습기자 기간을 사회부에서 보낸다. 이제는 주 52시간 근무 때문에 사라졌다고 하지만, 예전에는 사회부에서 보내는 처음 6개월간의 수습기간을 '하리꼬미'라고 칭하며 경찰서에서 숙식을 해결하는 것이 불문율이었다.
특히 사회부에 내에서 경찰 출입기자를 가리키는 '사쓰마와리'는 신문사의 꽃이란 찬사를 듣고, 검찰과 법원을 담당하는 법조 기자는 가장 취재하기 어려운 출입처를 담당해 그 누구보다 고생한다는 점을 대내외에서 인정받는 보직이다. 하지만 대다수 기자가 이런 사회부 근무에 자부심은 가질지언정, 자청하지는 않는다. 사회부는 의무복무 기간을 채우고 제대하고 싶어 하는 곳이지, 군대를 두 번 가고 싶지는 않은 것과 마찬가지다. 한마디로 일은 고되고 출세하고는 거리가 멀다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실제로 취재를 총괄하는 편집국장이나 보도국장은 대부분 정치부나 경제부 출신이다. 사회부만 줄곧 담당한 기자가 편집국장까지 올라가는 일은 거의 보기 어렵다. 이처럼 겉으로 드러나는 커리어 패스를 지켜본 젊은 기자들도 사회부를 기피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대한민국 사회의 대표적인 엘리트로 꼽히는 검사지만, 실상 대다수 검사들은 형사부에 소속돼 우리 사회의 밑바닥에서 벌어지는 자잘한 사건들을 처리하고 때론 <친애하는 나의 민원인>의 저자처럼 법적으로는 풀기 힘든 민원인들의 하소연을 하염없이 청취한다. 검찰에 대한 대중의 판타지를 절묘하게 버무려 만든 영화 <더킹>에서 검사 임관 후 한동안 형사부 검사로만 일했던 조인성이 그랬듯이, 이들에게도 유력 정치인을 쥐락펴락하고 국면전환용 연예인 마약사건 파일을 묵혀두고 있는 특수부(영화 상에서는 전략부) 검사들의 삶은 영화 속에나 나오는 얘기일 뿐 자신과는 상관없는 딴 세상 얘기다.
사회부 기자가 만나는 취재원들도 대부분 힘깨나 쓰는 정치인이나 돈깨나 쓰는 기업인과는 거리가 멀다. 이들에게는 얘기되는 기삿거리를 던져주는 고급 취재원은 없지만 정보가 부족한 만큼 발로 뛰며 직접 팩트를 건져 올린다는 자부심이 있다. 최근 장기간 법조 출입을 하며 쌓은 인맥을 바탕으로 대규모 부동산개발에 참여해 단숨에 수 백억 원 이상을 벌어들인 법조 기자도 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국민적인 공분이 일었지만, 다수의 사회부 기자들은 투잡은커녕 주식에 투자할 물리적, 심리적 여유조차 없는 경우가 많다.
형사부와 사회부. 검사와 기자라면 누구나 거쳐야만 하고 조직의 근간이 되는 곳이지만 웬만해선 빛이 나지 않는 곳이다. 하지만 이들 부서에는 상대적으로 외부에는 잘 알려지지 않은 각 조직의 정수가 담겨 있다.
일찌감치 자신의 칼럼에서 <친애하는 나의 민원인>을 소개한 홍영준 원장님은 이렇게 평가했다.
과장이 없고, 자랑이 없고, 핑계나 남 탓이 없는 진솔한 검사의 이야기다. 유머와 위트가 있으며 유려한 문장이 있고 감동이 있는 평범한 검사의 이야기다. SNS를 달구는 검사들 혹은 검사 출신들의 글이 큰소리로 혼자 길에서 외치는 것이라면 정 검사의 이야기는 마치 함께 차를 마시면서 따뜻한 대화를 나누는 것만 같다.
언론에서 주목할 만한 저자가 쓴 책이 아니기에 상업적인 성공은 어렵겠다 생각했는데, 예상치 못한 거물 인플루언서의 홍보 덕분에 앞으로 이 책을 찾는 이들이 많아질 것 같다. 정치적인 목적에서 이뤄진 홍보지만 책의 내용만큼은 정치적으로 해석되지 않았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