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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늦깎이 Jan 09. 2023

다스베이더는 어떻게 시스의 노예가 되었나

사람의 마음을 지배하는 법, 오카다 다카시 <심리 조작의 비밀>

추리소설의 여왕 애거서 크리스티의 작품에 등장하는 대표 캐릭터를 꼽는다면 벨기에 출신 명탐정 에르큘 포와로를 빼놓을 수 없다. 1975년 포와로가 소설 속에서 죽음을 맞게 되자 그의 부고가 뉴욕타임스에 실릴 정도였다.


포와로가 죽음을 맞이하는 작품의 제목은 <커튼>. 포와로의 죽음 때문에 더욱 유명해졌지만 개인적으로도 오래도록 기억에 남는 작품이다. 여타 추리소설에서 볼 수 없었던 독특한 유형의 살인범이 등장하기 때문이다.


어찌 보면 살인범이라고 하기에도 애매하다. 흉기나 약물을 이용해 직접 살인을 저지르진 않기 때문이다. 범인은 대신 누군가에게 분노를 품고 있는 대상을 뒤에서 교묘히 조종한다. 하마터면 포와로의 단짝인 헤이스팅스도 그의 꼬드김에 빠져 살인을 저지를 뻔하게 된다. 하지만 그게 범인의 충동질 때문이었다고는 생각조차 하지 못한다.


오로지 포와로만이 범인이 그 어떤 살인범보다 더 위험하다는 것을 간파한다. 하지만 천하의 포와로조차 이를 증명할 물증을 확보할 재간은 없다. 심증만으로 법의 심판을 받게 할 수는 없는 법. 결국 그동안 사건에서 한발 떨어져 심판자로서 사건을 해결했던 포와로 자신이 직접 범인 처단을 위해 나선다.


소설에서 범인의 충동질에 넘어가 살인을 저지르거나 저지를 뻔한 이들은 자신의 행동에 누군가가 개입했다는 것을 인식조차 하지 못한다. 정신과 의사이자 작가인 오카다 다카시가 쓴 <심리 조작의 비밀>을 읽으면서 다시금 <커튼> 속 살인범을 떠올리게 된 건 이 때문이다. 저자에 따르면 심리 조작이란 "상대가 속았다는 사실조차 모르게 속이는 것"이기 때문이다.


일본의 정신과 의사가 쓴 <심리 조작의 비밀>


누구든 심리조작의 대상이 될 수 있을까


심리 조작을 정의하자면 '타인의 심리 상태를 조작해서 지배하거나 착취하는 기술'을 말한다. 책 <심리 조작의 비밀>은 현실에서 심리 조작이 어떤 방식으로 이뤄지는지, 누가 쉽게 심리 조작의 대상이 되는지, 심리 조작을 통해 타인을 지배하려는 사람은 누구인지 등에 대해 설명한다.


짤막한 책 소개 기사를 통해 알게 된 이 책을 집어들면서 먼저 궁금했던 건 누구나 심리 조작의 대상이 될 수 있느냐였다. 심리 조작의 전문가에게 걸리면 평범한 사람도 이들의 계략에 넘어가면 쉽게 조종을 당할 수 있겠느냐는 것이다.


저자는 이에 대해 어느 정도 대답을 해준다. 먼저 상대적으로 심리 조작에 잘 걸려드는 유형의 사람들이 있다. 주체적으로 생각하고 판단하고 행동할 수 있는 힘이 부족한 사람, 한마디로 남에게 잘 의존하는 사람이 그런 경우다. 남의 말을 쉽게 잘 믿는 사람이 있듯이 심리 조작에 잘 넘어가는 사람이 있다는 것이다.


책에선 이들을 구체적인 유형으로 정리했다. 자신을 과소평가하고 타인에게 의지하는 '의존성 인격장애', 암시에 걸리기 쉬운 성향인 '피암시성'이 높은 사람, 이상과 현실의 괴리로 내면이 항상 불안정한 '불균형한 자기애'를 가진 사람 등이 그런 경우다.


반대로 남에게 덜 의지하는, 자기 주관이 뚜렷한 사람들은 어떨까. 심리 조작의 성공 여부가 '의존성'에 달려있는 만큼, 자기 생각이 분명한 사람은 아무래도 심리 조작에 걸려들 가능성이 낮다. 다만, 같은 사람이라 하더라도 당사자가 어떤 상황에 놓였느냐에 따라 결과는 달라질 수 있다고 저자는 지적한다.


'스트레스' 상황에서 '암시'를 던진다 


같은 사람이라도 '스트레스를 강하게 받고 있거나 본인을 지탱해주던 요소가 취약해졌을 때' 심리조작을 당하기 쉬워진다. 구체적으로 좌절을 겪거나 병이나 이별, 경제적 곤경 등으로 마음이 약해져 있을 때가 그렇다. 실제로 심리 조작의 달인은 이런 약한 고리를 포착하고 파고든다.


영화 역사상 최고의 악당으로 꼽히는 다스 베이더(Darth Vader)는 원래 공화국을 수호하는 기사 제다이(Jedi)였다. 본명은 아나킨 스카이워커. 떡잎부터 남달랐던 그는 남다른 '포스'를 뽐내며 한때 우주를 악의 세력으로부터 구원할 '메시아'가 될 것으로 기대를 모았다. 아나킨의 곁에는 그가 꼬마일 때부터 지켜봐 온 오비완 케노비란 든든한 스승과 사랑하는 연인 파드메 공주가 함께해 정서적인 안정을 지켜주었다.


소위 아나킨의 '멘탈'이 흔들리기 시작한 건 어머니의 죽음부터다. 고향에 두고 온 홀어머니가 악당에게 살해당하자 그는 이를 자신의 탓으로 돌린다. 이 같은 죄책감은 자신이 사랑하는 또 다른 한 사람, 파드메를 지키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불안으로 발전하고 그는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을 지키기 위해 더 큰 힘을 갈구하게 된다.


악의 화신인 시스 로드(Sith Lord)는 이러한 틈을 놓치지 않는다. 아직 본모습을 드러내지 않은 채 우주 공화국의 수상 팰퍼틴으로 위장하고 있던 그는 처음부터 아나킨을 자신의 편으로 끌어들이려고 적극적으로 설득하지 않는다. 대신 심리적으로 불안해진 아나킨에게 제다이의 순수성을 의심하도록 '암시'를 던진다.


이는 굉장히 영리한 심리 조작 수법이다. 특히 의자가 강한 사람일수록 '본능적으로 타인의 의도에 좌우되기를 거부'하기 때문에 논리적인 설득보다 가볍게 암시를 주는 것이 훨씬 효과적이기 때문이다.


아나킨 마음속에 제다이에 대한 '불신'이 충분히 자라나자 시스는 본격적으로 그의 마음에 불을 지른다. 오카다 다카시는 "세뇌를 시도하는 사람은 목표 인물의 마음속에 불만, 분노, 아니면 죄악감, 좌절감과 같은 갈등이 내재되어 있다는 사실을 느끼면 그런 감정을 부채질하고 불타오르게 한다"고 말한다. 이렇게 하면 이전까지 막연하게 가졌던 불만이 특정인이나 집단에 대한 격렬한 증오나 강한 분노로 바뀌게 된다.


고립무원, 심리 조작의 또 다른 필요조건


멀쩡한 사람들, 오히려 보통 사람보다 똑똑하다고 생각되는 사람들이 테러리스트가 되거나 사이비 종교에 귀의하는 경우가 있다. 책에선 일본의 신좌익 정치 집단이나 컬트 종교가 지방에서 도시로 올라와 혼자 살기 시작한 청년들을 포섭한 사례를 든다. 고향에선 수재 소리를 들었던 이들이 사투리란 벽 때문에 친구들과 어울리지 못하고 고립되다가 심리 조작의 제물이 되곤 한다는 것이다.


외로움, 고립무원의 상황은 심리 조작에 넘어가기 쉬운 조건을 형성한다. 저자는 "고립되고 의지할 대상이 없으면 상대를 제대로 살펴보지 못하고 안이하게 도움을 요청하거나 기대기 쉬워지며 심리 조작의 제물이 되기 쉽다"고 말한다.


아나킨의 경우도 비슷하다. 시스에게 넘어가기 직전, 아나킨은 평소 의지했던 오비완과 파드메와 떨어져 서로 연락할 수 없는 상황에 놓이게 된다. 주위에 자신의 생각을 털어놓고 얘기할 친구가 없는 상황에서 시스의 암시를 통해 자신이 소속됐던 제다이를 불신하고 적으로 돌리게 된다. 자연스럽게 다음 수순은 제다이의 적인 시스에 귀의하는 것이다.   


어머니의 죽음에서 비롯된 좌절과 죄책감이 불러온 스트레스 상황, 평소 믿고 의지했던 사람들과의 분리. 평소와 다른 이런 극단적 상황은 시스의 심리 조작에 이용됐고, 한때 제다이의 구원이 될 것으로 기대됐던 아나킨은 결국 시스의 종인 다스베이더로 변신하게 된다.  


심리조작에 안 걸리는 사람들


주관이 뚜렷하고 의지가 강한 사람도 심리 조작에 걸려들 수 있다. 반대로 극단적인 상황에서도 심리 조작에 넘어가지 않고 자신의 신념을 지켜내는 이들이 있다. 후자는 어떤 경우일까.  


저자는 "확실한 소속 의식을 지니고 있거나 흔들리지 않는 신앙이나 신념을 갖고 있는" 사람들에겐 좀처럼 심리 조작이 먹혀들지 않는다고 말한다. 그 대표적인 사례로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살아남은 경험을 바탕으로 <죽음의 수용소에서>란 책을 쓴 정신과 의사 빅터 프랭클을 꼽는다.


프랭클 박사는 가족들과 떨어져 수용소 생활을 하면서도 마음속으로 끊임없이 아내와 대화를 나누었다고 한다. 혹한 속에서 몇 시간 동안 서있으면서도 마음속 아내에게 그런 혹독한 상황을 농담 섞어 말해주며 절망적인 상황을 버텨냈다는 것이다.


아이러니한 것은 그가 마음속으로 대화를 걸었던 아내는 진작에 죽고 없었다는 것이다. 프랭클 박사는 전쟁이 끝나고 집에 돌아오고 나서야 아내가 죽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그가 마음속으로 대화를 나누었던 아내는 이미 그의 마음속에서만 존재하고 있었던 것이다."(106P)

 

프랭클 박사의 경우 사랑하는 사람과 연결되어 있다는 느낌이 그를 다스베이더보다도 강하게 만들었다. 심리적으로 믿고 의지할 수 있는 관계. 이것이야말로 사회적 동물인 우리 인간이 험난한 세상을 살아가며 맞닥뜨리는 고난 앞에서 꺾이지 않고 버티도록 해주는 동아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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