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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인문고전 Mar 18. 2020

영화 '버닝' 해석

메타포의 중요성

    

    이창동 감독은 ‘버닝’을 “하루키의 세계에 살고 있는 젊은 포크너의 이야기”라 요약했다.

“저도 작가 출신으로서 포크너와 하루키의 대립이 흥미로웠어요. 세상은 점점 더 하루키 소설처럼 돼가는 것 같아요. 그런 삶의 방식을 취하죠. 하지만, 이 시대 젊은이들에겐 아버지의 분노가 아들의 분노로 옮겨가는 포크너 소설의 얘기가 더 가깝다고 생각했습니다”          

- 이창동감독의 인터뷰 중에서-


    그렇다면 '하루키의 헛간 태우기'의 내용은 무엇이고 '포크너의 헛간 방화'는 어떤 내용 일까?


    현대사회와 동떨어져서 한적한 시골에 버려진 쓸모없는 헛간을 태우는 내용을 다루는 소설이  '하루키의 헛간 태우기'의 내용이고, 미국 남부 지역의 상류층의 헛간을 방화 후 법정싸움을 하는 아버지를 바라보는 아들의 성장을 다룬 소설이 윌리엄 포크너의 '헛간 방화'이다. 두 소설은 어떤 맥락에서 보면 완전하게 대립 구도인 것처럼 보인다. 한쪽은 사회적 약자에 대한 방화이고  다른 한쪽은 상류사회에 대한 방화이기 때문이다. 


    제목 ‘버닝’은
무엇인가를 태우는 행위이다.
그렇다면 무엇을 태우는 걸까? 그리고.....
 왜 태우는 것일까?  


‘노을’은 주변을 빨갛게 불태운다. 감독은 촬영 중 가장 적당한 노을 장면이 나타날 때까지 수많은 시간과의 사투를 벌였다고 언급했었다. 그리고 감독은 이렇게 촬영된 노을 장면을 실제 영화 속에 3번 연출하였다. 숨겨진 노을 장면을 제외하면 말이다. 우리는 3개의 실제 노을 장면을 이해해야 숨겨진 노을 장면을 찾을 수 있고 그때야 비로소 감독의 메시지를 접할 수 있다.  그러나 4번째 노을을 영상 속에서 쉽게 찾을 수 없다. 왜냐하면 그것은 진짜 노을이 아니기 때문이다. 


    저녁노을이 보이는 종수의 집 앞마당에서 종수와 해미가 벤으로부터 대마초를 받아 피우며 노을 속으로 해미가 사라지는 이미지를 연출한 장면이 2번째 노을 장면이며, 감독이 말하는 '무라카미 하루키의 헛간 태우기'에 해당하는 영상이다.  


    그리고 3번째 노을 장면은 잊혀가는 농촌 배경의 헛간태우기와 달리, 종수가 혜미의 방에서 자고 난 후 소설을 써 내려가는 창밖 도시를 배경으로 한 저녁노을 장면이다.  이 장면 이후에 종수는 아무도 없는 들판에서 문명사회의 게츠비 같은 상류층으로 대변되는 벤을 제물로 종수 자신의 옷과 함께 태운다. 그래서 이 혜미의 방 뒤쪽 노을 장면은 감독이 언급한 ‘포크너의 헛간 방화'처럼 ‘하루키의 방화’와 대립되는 연출이라고 볼 수 있겠다. 이 2번째와 3번째의 노을 장면은 농촌과 도시, 약자와 강자를 대상으로 한다는 점에서 확연한 대비를 이루고 있다.  


     원작 '하루키의 헛간태우기'에서 모티브를 가져왔지만 이창동 감독은 원작의 영역을 벗어나 포크너의 분노와 현대 문명 속에 사는 젊은이들의 분노까지 첨가해 놓았다.

세상은 분명 편리해지고 좋아지고 있다. SF영화에서나 나올법한 인공지능 이야기도 현실세계에서 튀어나오고, 신체의 노화조차 새로운 장기로 교체하여 생명연장이 가능해졌고, 국가 GDP는 세계 상위권에 진입하였다. 그런데 이런 세상의 밝은 기류와는 다르게 직접적인 우리의 삶은 제자리다. 세상이 좋아질수록 우리의 삶은 더 나아지는 것 없이 왠지 박탈감마저 느껴져 화가 날 수밖에 없는 현실이다.

    세상은 성실하게 살면 성공하던 종수 아버지 세대인 70년대와 많이 달라져있다. 지배자와 피지배자로 양분되었던 사회는 이제 다양화되어 재산만 모으면 권력을 행사할 수 있고 그것이 비록 비도덕적이라 하더라도 많은 사람들의 비판과 함께 부러움까지 사고 있다. 씁쓸한 현실이지만 부를 축적하기 위해 많은 사람들이 양심을 쉽게 버리기도 하는 현실이다.   


    영화의 마지막에는
놀라운 반전이 우리를 기다린다.


해가 없는 4번째 노을 영상이 등장한다. 종수가 포르셰와 '벤'를 자신의 옷과 같이 불태우고 혼자 트럭을 운전하는 장면이 바로 그 장면이다. 이 장면이 왜 노을 장면인지 이해가 잘 안 갈 수도 있다. 그러나 우리에게 이 장면은 낯익다. 1번째 노을 장면, 종수가 두 사람을 태우고 곱창집으로 가는 장면을 떠올려보자. 벤의 통화도 별 내용 없지만 나머지 캐릭터들도 민숭맨숭 별다른 액션이 없는데 유난히 롱테이크로 찍혔다. 인상적인 부분은 트럭 뒤에 노을이 운전 내내 사라지지 않고 우리에게 각인되고 있다이다. 그렇다. 1번째 노을 장면은 이 4번째 노을 장면을 알리기 위한 감독의 의도가 깔려있는 씬이다.



두 캐릭터가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가?


    파주의 시골집에서 종수가 발견하는 트럭은 영화 내내 종수의 내면세계를 표현하는 매개체다.  

그리고 ‘벤’은 비상식적으로 부를 축적하고 비도덕적으로 쾌락을 누리는 도덕성이 결여된 게츠비 같은 표상이다.

    또한 혜미라는 캐릭터는 자본주의의 덫에 걸려 현대판 게츠비들의 쾌락물로 전락하고 쫓겨다니다 결국엔 우물 속에 갇혀서 자유를 갈구하는 사회적 약자의 표현임과 동시에 종수의 내면 속에 있는 성적 욕구의 대상이기도 하다.

곱창집으로 가는 트럭에 올라탄 두 욕구는 어려운 현실에 빠져있는 종수의 내면 속에서 꿈틀대기 시작한다.  

 

종수의 욕구는 무엇인가?


   하루하루를 힘들게 살아가고 있던 종수는 초반에 그런 게츠비의 삶을 경멸하듯 말하지만 극 중에서 벤이 누리는 호화로움에 마음을 빼앗기며 동경의 태도를 취한다. 꿈속에서 비닐하우스를 태우고 경이로운 경험을 하는 아이의 표정은 게츠비스러운 삶에 대한 동경의 시작을 알린다.


벤으로부터  쾌락의 도구 라이터넘겨받은 종수는 자신이 태우고 싶은 비닐하우스(욕구)찾아다닌다. 벤이 쾌락을 위해 태운다는 그 비닐하우스를 자신도 찾아보는 것이다. 그것은 성적 욕구라고 해석할 수도 있겠다. 또한 벤을 쫓아다니며 빵, 우유로 삶을 버티는 자신과 달리 여유로운 그의 삶을 목격하고 추종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산 중턱 폐가에 트럭을 주차시킨 그와 다르게 산 정상에 우뚝 있는 포르셰를 향해 욕구의 손을 뻗어본다.


왜 두 캐릭터를 소멸시키는 것인가?


그러나 그 삶은 너무나 높은 곳에 있다는 것을 실감하고 체념할 수밖에 없다. 그런 그의 마음을 표현한 것이 바로 호수의 장면이다.


그리고 나서야 종수는 게츠비들의 쾌락에 이용되고 소모되어 우물에 빠진 이들의 목소리가 들리기 시작한다. 원망스럽기만 하던 엄마의 이야기도 들리고, 집 앞마당에서 쾌락의 도구로 희생된 혜미가 구원의 손길을 요청한 대사도 이해가 된다.

 “아무도 날 못 보면 죽는구나 싶어서 너무 무서웠는데 얘 얼굴이 딱 보이는 거야... 그런데 지금은 기억도 못하네“


그래서 종수는 우물의 메타포를 가진 벤의 집에 빠진 또 다른 보일이를 구해내고 엄마의 빚도 소를 팔아 갚는다. 한순간 그가 쫓았던 쾌락과 욕구에 가려져  보지 못했던 내 주변인들 즉 가족, 여자 친구의 희생을 이해하고 부질없던 욕구들을 타자기 앞에 앉아 정리한다. 혜미의 방에서 꾼 마지막 자위의 꿈은 스스로 갈구하던 종수의 욕구를 접은 것에 대한 마지막 위로일 것이다.


게츠비의 삶은 사회적 약자들을 대상으로 재산 축적과 쾌락을 추구한다. 무라카미 하루키는 그렇게 내 주변의 엄마와 여동생, 여자 친구를 그들의 재산 축적을 위한 소모품으로 여기며, 또한 그들의 취미생활과 쾌락을 위한

하나의 도구로 전락시킨다. 이 사회의 약자들은 뒤늦게 사실을 깨닫지만 이미 게츠비들이 만들어 놓은 사회의 깊은 우물 속에서 빠져나오지 못해 허우적거리며 구원의 손길을 기다릴 수밖에 없는 것이다.  



결국 '버닝'이라는 제목은 벤이 비닐하우스를 태우는 행위를 말하는 것일 수도, 종수가 부도덕한 사회에 대하여 분노를 태운다는 것일 수도 있지만 감독이 표현하고 싶은 메시지는 현사회의 모든 젊은이들이 한 번씩은 품을 수 있는 잘못된 욕망에 대한 안타까움이며, 이러한 욕망으로 인해 내 주변의 수많은 희생자들이 우물 속으로 떨어질 수밖에 없다는 것을 깨닫고 그 잘못된 욕망들을 불살라야 비로소 순수 자아를 찾고 고통받는 우리 사회를 구할 수 있지 않겠는가라고 관객에게 묻는 것이다.  


시작장면과 마지막장면의 시퀀스

    영화의 첫 장면에서 종수가 어떤 상표인지 확인도 할 수 없을 만큼 수많은 상표들로 가득한 옷더미에 파묻혀서 트럭 뒷문에서 나와 힘겹게 길을 걸어가는 장면은 무수한 세상의 상표 속에 치여 미래에 대한 자신의 색깔 없이 어렵게 하루하루를 살아가고 있음을 반영하는 장면이며,

영화의 마지막 장면은 주변에서 부를 움켜쥐고 쾌락을 자신의 뜻대로 누리는 캐츠비의 삶을 보면서 동경하는 자신의 잘못된 욕망의 상표를 벗어 태운다는 설정이다. 물론 그 욕망이 어떤 것인지는 벤을 통하여 우리에게 충분히 보여준 것이다. 


    곱씹어 볼수록 감탄을 연발할 수밖에 없는 설정들로 가득한 영화다. 숨겨진 메타포를 찾고 또 찾고 감독의 ‘버닝’ 관련 인터뷰들도 찾아보고 영상 속에서 스토리와 관련 없이 포커싱 되는 장치들을 계속해서 찾는 작업은 수많은 조각의 퍼즐들을 맞추는 작업과 같았고, 마침내 완성된 퍼즐(?)을 보면서 전율 속으로 빠져야 했다. 혜미의 죽음에 연연하며 보던 미스터리 한 느낌과 달리 이 마지막 장면은 그 옛날 메멘토를 보고 났던 그때의 충격 속으로 다시 빠져드는 느낌이었다.  


 “옛날과 달리 지금은 분노의 원인을 설명하기 어렵고 싸워봤자 소용없다는 무기력감마저 느낄 수 있다. 세상은 더 좋아지지만 정작 자신에겐 미래가 없는, 그런 처지의 젊은이들에겐 세계 자체가 미스터리로 보이지 않을까 했다. 나름대론 꽤 여러 겹의 코드를 심어놨는데 안 읽히고 있는 게 굉장히 많더라.”

 -이창동감독의 인터뷰 中에서-                                        



보다 더 자세한 메타포 설명은 1년 전에 작성된 제 블로그를 참조하시면 도움이 될 것입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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