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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aime Feb 26. 2021

저는 좀 쉬면 안되나요?

- 1편 : 이 시국에 제주도 (a.k.a. 졸업여행)

"저는 좀 쉬면 안되나요?"


나는 많이 자면  시간, 일찍 잔다고 누워도 심장이 두근거려서  못들기도 하고, 심리상담을 해도  효과가 없고, 위축된 긴장감에 목소리도 평소와 다르게 나오고 떨고 더듬는 상황이 계속 반복되고, 갑작스럽게 찾아온 컨디션 난조에 7kg 증가한 몸무게(수술  3kg 정도는 빼왔으면 좋겠다고 말씀하셨던 담당 교수님...), 수술하고 나서도 병실 침대에서 일어나 앉자마자 입원하는 동안 만들게  60 짜리 PPT(회사/학교  아님), 여기저기서 들려오는 한계와 기타 등등!!!!


이 모든 것에 다 지쳤다.


그러나 이 와중에도 얼마전에 대학원 졸업을 했다.

개인적으로 만족스럽지는 못한 부분도 많았지만, 문송출신으로 'Master of Science' 학위기를 받으니 왠지 모르게 '나님 정말 고생했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성급한 일반화의 오류를 하는 사람들에게 보다 명확하게 그들의 논리가 틀렸음을, 내 생각이 맞았음을 이야기할 수 있는 '방법론을 학습하는 방법'을 드디어 얻게 되었다는 인증과도 같은 것이었다.


이 상황에서 이미 깊이 번아웃에 빠져서 나를 잃고 허우적 대는 나에게 무엇인가 탈출구를 만들어 주고 싶었다.


 "넌 이미 번아웃이 몇년 전부터 왔어. 이제와서 새삼스레 이제 번아웃 왔다고 말하지 마."


언젠가 지쳐서 힘들어하는 내게 퇴근길에 전화한 친구가 해 준 말이다. 나는 인복이 많은 사람이라, 이날도 이렇게 걱정과 함께 전화를 해준 친구가 정말 고마웠고, 그날이 매우 힘들었던 날었기 때문인지 당시 통화하던 순간은 잔상처럼 모두 생생하게 다시 떠올랐다. 그래, 난 좀 쉬어야 겠다.


사실, 장기간 쉴 수 있는 기회가 생기면 시칠리아 1달 살기, 남미여행갔다가 남극 찍고 오기 이런걸 하고 싶었는데 요즘에 해외를 나간다는 것은 정말 어불성설이다. 그래서 나는 어짜피 많이 가보지도 못한 제주도를 별 망설임없이 선택했고, 약 4박 5일간 쉬다가 돌아왔다.



제주도 한 달 살기 안해요...

처음에 제주도를 간다고 할 때 사람들이 "한 달 살기 하러 가는거야?"라는 질문을 많이 해 주셨다. 그러나 사실 나는 제주도 한 달 살기에 큰 흥미가 없다.


왜냐하면 나는 시골에서 올라온 일개 무주택자 서울러이기 때문에, '언어와 음식, 생활문화권이 모두 동일한 지역에서 굳이 한 달이라는 시간과 비용을 소비하는 것이 합리적인가?' 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실제로 한달 살이 하러 가냐는 지인들의 말에 나는 "왜? 굳이? 어짜피 제주도에서 한 달 살이 해도 *마트에서 장 볼텐데 왜 굳이??"라고 대답했었다. 그리고 제주도 한 달 살기라는 말이 뭐랄까... 사람들에게 낭만과 환상을 불러 일으킨 것 같다는 생각도 들었다. 아니면 사람이 바글거리는 도시에서 치이고, 지치고, 찌든 모든 이들의 탈출에 대한 소망이 작게나마 '제주도 한 달 살기'라는 단어로 표상되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게다가 시골 출신인 나는 어릴 때, 쏟아질 것 같은 별들이 가득한 밤하늘을 바라보고 엄마 손잡고 밤에 잠깐 나왔다가 혼자 돌아다니는 반딧불도 보고, 요즘 시즌에는 할머니랑 호미랑 칼을 들고 밭에 나가 냉이를 캐오면, 엄마가 그걸로 냉이 된장국 끓여주셨던 일상을 보낸 기억이 있다. 어린시절이긴 해도 그런 삶을 살았던 내게 같은 문화권의 시골에서 한 달 살기 이런 것들에 대해 아직 큰 감흥이 없었다.


그래서 진짜 대자연 속에서 살아볼까? 하고 알프스 스위스 목장 1달 살기 숙소금액(160만원) 찾아보고 계산기를 두드려 보기도 했다. 거기 가면 정말 산과 빙하에서 흘러나온 물과 들판만 있는 곳이었기 때문에 코로롱 걱정을 안해도 되었지만, '의식주' 중에 '식'이 보장이 안되었다. 차를 빌려서 먹을 것들을 사와야 했는데 1달 렌트비(180만원, 보험료 제외)와, 알프스 산맥에서 눈 많이 오는 날 나는 그 렌트카를 끌고 나가 시내 마트에서 식료품을 살 수 있을까(100만원/월). 야생동물의 울음소리 속에서 나는 두려움 없이 홀로 한 달을 버틸 수 있을까. 내가 아프면 병원까지 누가 데려다 주나? 비싼 스위스 물가는 또 어떻게 하고... 이런 것 저런 것 고려하니 또 비용이 문제였다. 그래서 나는 그냥 아주 잠깐의 쉼을 선택했다. (일개 ENTJ의 갬성)



어쩌다 졸업여행

제주도는 원래 1주일을 가려고 했다. 그런데 학교에서 느즈막히 졸업식을 한다고 문자가 왔고, 그 마저도 금요일이라고 했다. 졸업식 가지 말까를 엄청 고민했는데, 아버지는 나의 입학식/졸업식을 한 번도 본 기억이 없으셔서 은퇴하시고 나서야 찾아온 이 기회를 은근히 기대하셨다. 그래서 나는 제주도 일정을 줄이고, 그 일정에 맞춰서 코로나 검사도 받고(제주도 방문 시 권고사항. 당연히 음성 받았다) 그 추운날 시골에서 올라오신 부모님과 함께 졸업사진을 찍고, 동기들과도 간만에 얼굴보면서 사진찍고 힐링하고(동기들 넘흐 조음) 지도교수님께도 "졸업 시켜주셔서 감사합니다."하고 90도로 인사하고 사진찍고 즐겁게 마무리한 뒤 눈썹 휘날리도록 달려 김포공항에 도착했다.


늦게 도착한 제주도는 껌껌했다.

렌트카 회사에서 차를 받아 출발하려는데, 옆에서 라이트를 안 킨 또 다른 렌트카가 슉- 하고 지나가서 식겁했지만 뭐 무난히 숙소에 잘 도착해서 짐을 풀었다. (제발! 라이트 좀 켜고 운전하세요...)


어짜피 쉬려고 온 것이라 오션뷰에 욕조가 있는 곳으로 예약한 나는 근처 맥도날드에서 빅맥 사다가 먹고 반신욕하고 바로 딥슬립을 청했다. 다음날 아침도 그냥 호텔 조식 신청해서 먹었는데, 조식을 하루 전에 신청하면 1천원을 할인 받을 수 있어, 영혼없이 이틀 내내의 조식을 신청하려 했으나 직원이 "모레꺼는 내일 신청하셔도 되니까, 일단 드셔보시고 결정하세요."라고 조언을 해줘서 "오잉?" 하면서도 고개를 끄덕였다.


매번 나름대로 철저히(?) 계획을 짜서 여행을 하는 나는 이번에는 "무조건 쉰다. 무념무상의 여행!"이 컨셉이었다. 게다가 코로롱과 나의 변변치 않은 운전실력을 믿지 못하니, 최대한 차 없고 사람없는 곳을 가는 것이 목표였다. 그래서 나름대로 고심한 것이 제주도 해안도로 일주였다.


그.러.나. 제주에 사는 지인의 조언을 듣고, 시계방향으로 돌아 애월 쪽에서 석양을 보기로 했던 나의 계획은 무참히 무산되었다.


숙소에서 나와 한 시간 동안 막다른 길을 세 번 들어간 나는, 해안도로 일주를 포기할 수 밖에 없어서 결국 제주도에서 좋아하는 카페 중 하나인 함덕 해수욕장 근처 '델문도'로 향했다(사실 식사/산책/바다보기/커피/원두구매 모두 한 큐에 해결 가능).


너무 오랜만에 운전해서 감떨어져서 조심조심 운전하던 나는 후방주차 한 방에 성공하고 신나게 책 한 권을 들고 카페로 들어갔다. 그런데 아침이라 그런지 사람들이 많지 않아서 1층에 자리를 잡고 책을 읽기 시작하는데, 캬~~~ 바다를 보면서 따스한 햇살 아래서 맛있는 커피를 마시며 독서라... 캬~~~~

가져간 책은 넷플릭스와 관련된 '규칙없음'이라는 책이다.

자리도 다른 사람들과 꽤 떨어져 있고, 정면으로 바다라서 꽤나 후련하고 좋았다. 그런데 현실은 자리가 자리이다 보니 사람들이 자꾸 옆에 와서 사진찍는 바람에 생각처럼 길게 독서는 하지 못하고 커피 한 잔을 다 마실 정도만 책을 읽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게다가 바닷바람이 세다 보니 커피를 다 마시고 나니까 자꾸 커피잔이 쓰러지는 안타까운 현실, 자꾸 모래가 불어와 온몸과 책에 내려앉는 것도 귀찮은 현실이었다.


이 후, 향한 곳은 또 알 수 없는 무슨 작은 항구였다. 이 때만 해도 여전히 해안도로 일주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했기 때문이다. 사람들 안 갈 것 같은 길로 들어서자 작은 항구가 나왔는데, 펜션 몇 채와 작은 어선들이 있는 곳에서 혼자 슬슬 산책이나 하고 다시 차에 올라서 그 근처에 있다는 창꼼바위로 향했다.


창꼼바위는 창문을 쏙- 내다볼 수 있는 모양의 바위여서 창꼼바위라는 이름이 붙었다고 한다. 여기에도 몇 사람들이 와서 인생샷을 찍는다며 서로 사진을 찍어줬는데, 보고있는 내가 민망했더랬다. 하지만, 정작 나는 아무도 찍어줄 사람이 없어서 DSLR 타이머를 설정하고 창꼼바위로 쏙 들어갔다가 다시 카메라를 보는 형태로 인증샷을 찍었는데, 마치 골룸과 같아서 나의 인생에 인생샷은 없나보라는 아쉬운 생각이 들었다.

바위에 구녕이 뚤린 창꼼 바위

그리고 제주도에 사는 지인을 만나러 가기 위해 드디어! 해안도로 다운 해안도로를 탈 수 있었다. 김녕에서 성산일출봉까지 향하는 여정이었는데, 그냥 김녕 해수욕장을 내비게이션에 찍고 달린 뒤 슬슬 동쪽으로 향하다 보면 자연스럽게 해안도로를 만나게 되어있었다. 이 길은 많은 차들이 아름다운 풍광을 보며 드라이브를 하기 위해 달리는 곳이라 차들 속도도 빠르지 않고, 중간중간 차를 정차시키고 풍경을 바라볼 수 있었다. 바람이 어마어마하게 셌지만 그래도 잠시 사진을 타닥 찍고 들어가기엔 괜찮았다. 근데 예쁜 풍광이 펼쳐진 곳에서는 계속 달리고 있어서 그것들은 눈으로 본 것으로 만족하고, 나는 지인과의 조우를 위해 성산일출봉으로 향했다.




성산일출봉에서 지인의 차로 옮겨 타 섭지코지로 향한 나는 드디어 비가 안 올 때의 섭지코지를 보고 감동했다. 고등학교 때부터 섭지코지를 가면 무조건 늘 비가 왔던 터라 내 기억 속의 섭지코지는 늘 눅눅하고, 파도치고, 껌껌한 인상이어서 이렇게 밝고 맑은 섭지코지는 처음이었다. 그리고 안도 타다오를 좋아해서 본태 박물관도 예약해두었기 때문에 제주에 있는 또 다른 안도 타다오의 건축물을 빛이 드는 방향 대로 여러 각도별로 볼 수 있음에 대단히 만족했다.


섭지코지 정말 예쁘긴 예뻤다.

섭지코지에서 커피를 1잔 하고, 천천히 걸어서 한바퀴 돈 뒤에 향한 곳은 '비밀의 숲'과 '풍림다방'. '비밀의 숲'은 안돌오름 근처의(?) 사유지인 숲인데, 민트색 차량을 배경으로 한 숲길 인증샷이 꽤나 유명한 장소였다. 이전까지는 몰랐다가, 민트색 차량을 보니 오오! 하고 알게 되었는데 이 곳은 사유지이다 보니 입장료 2천원을 현금으로 준비해 가야 한다.


비밀의 숲을 갈 때 부터는 각자의 차를 가지고 갔는데, 이 방향이 내가 묵는 숙소로 향하는 방향이어서 쫄래쫄래 지인의 차를 따라갔다. 그러면서 소소한 팁을 하나 주신 것이, 이 비밀의 숲을 가는 길은 포장도로와 비포장 도로가 있는데, 내비게이션에서는 비포장 도로로 안내한다고. 그래서 나는 다행히 제주도에서도 아는 사람만 안다는 포장도로를 달려 비밀의 숲으로 향했다.

성산일출봉에서 비밀의 숲을 가는 구간은 우거진 숲도 지나고 높은 고지에 올라서 쭉- 일직선으로 달리는데 광활한 정경이 펼쳐져 또 가슴이 뻥 뚫려버렸다. 타이밍 좋게 스피커에서는 영화 호빗 OST가 나와 분위기를 배가 시켰고, 다시 숲길로 접어들 때에는 영화 '러쉬-더 라이벌'의 OST가 흘러나오며 예전에 녹색지옥인 뉘르부르크링 갈 때의 추억에 잠겨들 수 있었다.


그러나 비밀의 숲을 가는 포장도로도 꽤 길이 좁고, 산 속 구간인데가 1차선이어서 며칠 전 내린 눈이 진흙탕을 만들어서 서로 피해주느라 흰 차가 오프로드를 달린 갬성이 되어버렸다. 차가 더러워진 왠지 모를 뿌듯함에 오는 길이 길이 좁아 째금 힘들었다고 하니 지인께서는 얘가 뭘 모르는 군... 하는 표정으로 "반대편 길(비포장) 가볼래?" 라고 하셔서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난 편한게 좋다. 조용하고, 물 흐르듯 그냥 있는 뭐 그런...(끼룩끼룩)

 

고즈넉한 길지 않은 숲길을 천천히 걷는 기분은 몹시 좋았다. 평온한 장소에서 나혼자만 들뜬 기분이라 이상했지만, 슬슬 걸으면서 나무 사이사이로 비치는 햇살을 본다던가 하는 그런 것들이 참 괜찮았다. 힘든 구간이 전혀 없이 잘 관리된 사유지 숲이니 부모님들을 모시고 가족사진을 찍으러 온 사람들도 있었고, 혼자 삼각대를 놓고 인생샷 찍는 사람도 있었는데, 나는 그냥 킁킁 거리면서 피톤치드 냄새 맡는게 좋았다. 내 지인은 나의 또다른 지인들이 제주도에 방문했을 때 그들을 데리고 사려니 숲길 7km 구간을 모두 걸었을 때가 가장 나무냄새가 최고조였었다며, 당시 모두가 킁킁거리며 등산했다고 말씀해주셨다(그 때 방문한 지인들은 등산을 좋아하는 분들이다).



슬슬 저녁때라 그림자가 예뻤음.

산책하듯 나무냄새를 맡고, 인생샷 찍는 사람들을 구경하고 어색하게 나도 사진을 찍은 뒤, 비밀의 숲을 나와서 향한 곳은 풍림다방.


원래 다른 곳에 있었는데 새로 이 근처에 지점이 생긴 것 같았다. 풍림다방은 예전부터 와보고 싶었던 곳이라 내게 풍림다방 방문을 권하는 지인에게 고개를 끄덕였지만 소심한 나는 왠지 나 때문에 많은 시간을 쓰시는 것 같아서 죄송스러운 마음과 번거롭지 않으신가? 하는 생각이 들어 살짝 송구한 마음이 들었다.(원래는 그 다음날 만나서 보말 칼국수 먹기로 되어있었음)

풍림다방 시그니쳐 메뉴라는 '풍림 브뤠붸'

옛 양옥을 개조한 풍림다방은 한적한 주택가 사이에 있었는데 창가도 테이블로 만들어 놓아서 공간의 활용성을 높인 곳이었다. 과거 주택시절의 거실로 보이는 곳에서 손님을 맞이하고, 방으로 보이는 곳에 자리를 잡은 뒤, 또다른 작은 방에 가서 주문을 하면 되는 프로세스다. 먼저 메뉴를 주셔서 응? 자리에서 주문하는 것인가? 했지만 아니었다.


한적한 시골마을을 내려다보며 마신 달달하고도 크리미한 커피는 여행을 하며 당 떨어진 내 체력을 보충해주었다. 그리고 제주도에서 예쁜 카페를 여러군데 가보고 싶다는 마음 속 깊은 곳의 소망도 달성한 것 같아 좋았는데, 생각해보니 나는 이날 카페를 세 군데를 갔고 모두 핫플레이스(함덕 해수욕장, 섭지코지, 풍림다방)였었다. 카페인 과다 복용인가 싶었지만, 오랜만에 거의 하루종일 운전했던 나는 큰 무리없이(?) 제 시간에 취침할 수 있었다.



(다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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