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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aime Mar 20. 2021

저는 좀 쉬면 안되나요?

2편 : 어떻게 쉬어야 할 지 모르겠어서 또 답사 하듯이 미술관 다닌 날

제주도에 오기 전, 일명 "여대다니는 남학생" Y군에게 제주도 어디를 추천하냐고 물었다.


Y군을 잠깐 소개하자면 동양화 화실을 같이 다녔던 몇 살 어린 친구인데, 가끔 미술관을 함께 관람하는 미술관 메이트 이기도 하다. 왜냐면 그는 소문난 한국미술 덕후인데다가 미학 전공이어서, Y군과 함께 미술관을 가면 정말 몇 시간 동안 작품에 대한 설명과 한국미술(특히 현대회화) 특강을 들을 수 있었다. 거기에 설명도 맛깔나고, 구수해서 평소에도 이것저것 많이 물어보게 되는 친구다.


암튼 그런 친구가 제주도의 몇 몇 미술관을 추천해줬는데 그 중 하나가 숙소에서 걸어서 5분인 아라리오 뮤지엄이었다.


아라리오 갤러리 제주는 국내 사립 미술관 중에서도 현대미술 전시를 한다는 성격을 보다 뚜렷이 보여주는 미술관이 아닐까 생각했다.


왜냐하면 미술작품은 작가들의 작품 대부분이 미술관에 전시가 되어야 판매로 이어져서, 결국 사상과 형태의 자유를 추구하는 현대미술가들이 작품 판매와 생계를 위해 미술관의 전시 공간에 작품 사이즈를 맞출 수 밖에 없는 시장 환경이 조성된다. 그런 의미에서 공간을 확장하고 변형시킨 테이트 모던과 국립현대미술관(서울관) 그리고 영화관을 매입해 작품 설치의 자유도를 확장시킨 제주 아라리오 갤러리는 현대미술을 보다 현대미술스럽게 보여주기 위해 노력하는 미술관이라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그래서 다양한 높이의 전시관을 자랑하는 제주 아라리오 갤러리에서는 중국 출신의 장환 작가의 어마어마한 크기의 소가죽 조형물 부터 앤디워홀, 키스헤링의 전시까지 다양하게 감상할 수 있으며, 다수의 백남준 작품과 우리나라에 잘 알려지지 않은 다른 현대미술 작가들의 작품도 신선하게 즐길 수 있다.


층고를 터서 매달아 전시한 대형 전시물

이 전시장에서 유명한 것들만 보고 인스타그램에 올릴 인증샷을 고민하는 것이라면 키스헤링과 앤디워홀이 있는 2층과, 백남준 작품이 있는 4층을 방문하면 된다. 하지만! 이 미술관의 소장품들이 꽤 괜찮아서 직원분이 안내하는 대로 맨 윗층부터 지하 1층까지 천천히 작품을 관람하는 것을 추천한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한 방에 올라가, 짬짬이 제주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계단을 따라 내려오며 레트로한 분위기와 탁 트인 풍경 그리고 작품에 집중된 어두운 전시공간이 어우러지는 모습들을 함께 경험하는 것이 의외로 빡빡한 일상에서 숨통을 틔어주는 듯한 그런 모먼트(?)들을 연출하기 때문이다.


(좌) '기원(작가 : 아사미 키요가와)'와 바다, (우) 80년대 스멜의 축발전 거울
특별히 인테리어를 하지 않았지만, 제주 바다가 펼쳐져 매우 아름다웠던 계단


나는 어린시절 백남준에 대한 전기를 읽으면서 그의 작품을 직접 보지는 못하고 글과 사진으로만 그의 작품을 느꼈었다. 어린 마음에 찰흙덩이를 덕지덕지 붙이는 것과, 텔레비전을 덕지덕지 붙이는게 대체 무슨 차이냐며 어려워 했었는데, 백남준은 무대에서 콩도 던지고 넥타이도 자르는 기행도 예술로 승화시켰기에 그는 아직 초등학생이었던 내게 몹시도 난해한 사람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그 시절 작은 내 머리로 상상했던 백남준의 작품과 가장 유사한 형태를 20년이라는 시간을 훌쩍 넘어 이 곳에서 만날 수 있었다.

 

아라리오 제주에 전시된 백남준의 작품들. 미술관에 사람이 없어서 나 혼자 온전히 즐기기 정말 좋았다.


정말 좋은 작품들이 많았지만(물론 개인취향이 아니었던 작품들도 있었다) 가장 인상이 깊었던 것은 시간을 추상적으로 표현한 김인배 작가의 작품이다. 김인배 작가의 작품들 모두가 다 괜찮았다. 특히, '시간의 옆모습'이라는 작품과  '혼자 잘 할 수 있겠습니까?', '시간의 외각선'은 시간에 대한 인지와 철학적인 측면을 이렇게까지 군더더기 없이 추상화 시킬 수 있는지에 대해 놀랐다.


최근 1년간 읽었던   가장 흥미있게 읽었던 '시간은 흐르지 않는다(저자 : 카를로 로밸리, 출판사 : 쌤앤파커스)'라는 시간 관련 물리학  때문이라고도 생각했고, 존경하는 모모 교수님들( 분은 사람의 행동으로 머릿속의 생각을 끄집어 내는 분이시고,  분은 진짜 머리에 전극을 붙여서 사람의 생각을 끄집어 내는 연구를 하는 분이시다) 덕분에 HCI(Human Computer Interaction)분야와 행동경제학에 관심을 갖고 있기 때문일 수도 있는데, 작품을 보자마자 생각할 거리와 숙제들이  방에 ! 하고 던져져서 혼란스럽기도 했다. 어떻게 작품을 보고 그런 생각이 나냐고 하실 수도 있겠지만  즐겁게 놀다가 갑자기  했던 중요한 일이 불현듯 생각난 느낌이랄까.


암튼, 그래서 참 좋았는데, 그래서 참 불편한 작품이었다.


(좌) 혼자 잘 할 수 있겠습니까 (중) 시간의 외각선 (우) 시간의 옆모습


그래서 김인배 작가의 이 작품들은 엽서로라도 간직하고 싶었지만, 아라리오 제주에는 굿즈를 판매하는 아트샵이 없다. 굿즈를 구매하고 싶어서 두리번두리번 거리고 직원께도 여쭤봤지만 제주의 물품을 파는 상점은 있어도 미술관 아트샵은 없었다. (어흑흑)




그리고 호텔 주차장으로 돌아와 차에 시동을 걸고, 전날 만났던 제주도의 지인과 함께 보말 칼국수를 먹기 위해 출발했다. 그러나 흡 ... 제주시의 도로는 나를 또 혼돈의 카오스로 몰아넣었고 나는 겨우 제주시 일원을 벗어나 성산일출봉 근처의 보말 칼국수 집으로 향했다. tv에도 나왔던 곳이라고 했는데, 면류 자체를 좋아하는 나로서는 진짜 함냐함냐 엄청 잘 먹음. (감사합니다 BS오빠!) 다만 창가로 보이는 방파제가 자꾸 저게 대교인가, 방파제인가 애매한 뷰를 시전하는 덕에 나는 밥 먹다 말고 또 방파제를 보고 흠칫흠칫 놀란...(왠지 서해대교 같았다)


칼국수를 먹고 지인과 헤어져 김영갑갤러리 두모악으로 향했다. 김영갑 갤러리는 사진작가 김영갑의 전시관인데, 작은 폐교를 갤러리로 꾸민 곳이었다. 입장료를 결제하자 감사하게도 티켓이 엽서였다. 제주의 자연을 찍는 것으로 작품세계를 구사한 김영갑 작가의 사진 작품들로 자리를 지키고 있던  갤러리는 실외공간도 꽤나 예쁘고 좋았다. 지저귀는 새들, 미로처럼 구성된 담벼락 밑에  수선화, 중간중간 제주의 신령처럼 나타나는 작고 귀여운 조각들이 마음을 잔잔하게 펼쳐 주었다.


외진 곳에 찾아와주셔서 감사하다는 김영갑 갤러리. 정말 외진 곳에 있다.

김영갑 작가의 작품은 왠지 모르게 영화 '서편제'가 생각나기도 했다. 서편제가 롱테이크 방식으로 주인공들이 긴- 길을 걸어가는 장면과 우리나라의 자연환경을 굉장히 잘 살려 표현한 것처럼 김영갑 작가도 제주도의 모습을 해와 오름들의 긴 흐름을 시각적으로 보여주며 마치 영상과 같이 표현했기 때문이다.


나는 정말 사진은 잘 모르지만, 작가의 작품에서 오는 특유의 색감이 왠지모를 쓸쓸함과 깊이를 자아냄과 동시에 아름다움을 선사했다. 확실히 그림이 주는 감동과 사진이 주는 감동의 결이 다름을 느끼면서 뭔가 기분이 오묘해진 나는 사진 작가인 사촌언니와도 공유하고 싶다는 핑계로 엽서를 왕창 샀다. (굿즈를 사기 위한 핑계일지도 모른다 ㅋㅋㅋㅋ)


김영갑 갤러리는 정원도 아기자기하고 예뻐서 조용히 산책하기에도 좋고, 책읽기에도 좋고, 사진찍기에도 좋다.


그리고 난 일찍 숙소로 왔다. 숙소를 변경하는 날이었기 때문에 주차 공간 확보를 위해 일찍 들어왔지만, 근처에 올레길이 있어서 대충 짐만 풀고 동네 탐방을 위해 숙소를 나섰다. 원래 미술관을 가면 몇 시간씩을 관람해서 피곤하니 그냥 숙소에 늘어져서 쉬려고 했는데, 코로나 때문에 호텔이 조식 서비스를 안해서 다음날 먹을 일용할 양식을 구해야 했기 때문이다. 아이고-소리가 나는 몸을 일으켜 숙소에 나와 또 주변을 둘러보니 올레길이 있었고, 거길 또 해 질 때까지 돌아다닌 나는 대체 왜 이러고 있나 하는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나의 몸뚱이는 흡사 닌텐도 동물의 숲 '경재개발 3개년 계획' 마냥, 본래 목적이 힐링이 아닌 힐링 따위 없는 퀘스트 달성을 위해 돌아다니고 있었다. 그래도 뭐 재미있으니까...


그래도 이 때 아니면 이런 작은 지방에 있는, 그러나 좋은 작품들이 있는 미술관을 언제 가보겠나 싶다.


(다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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