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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기끄 Dec 30. 2020

두께에 쫄지 않기

<망내인> 찬호께이

 


 나에게 종이책의 낭만이란 전자책의 편의성 앞에서 무색하다. 종종 같은 책이 종이책과 전자책 둘 다 있거나, 밀리의 서재에 오픈되는 경우가 있다. 그러면 나는 주저 없이 E-book 리더기를 집어 든다. 아아, 책은 무겁고 난 게으르다. 책의 무게를 두 손으로 고정하고 종잇장을 하나하나 넘겨야 한다니, 생각만 해도 귀찮다. E-book 리더기를 거치대에 두고 바닥에 드러누운 채 리모컨으로 페이지를 넘겨보자. 독서에 필요한 노동량을 극한으로 줄일 수 있다. 





  전자책의 정말 큰 장점이 하나 더 있는데, 보고 있는 책이 얼마나 두꺼운 책인지 알 수 없다는 것이다. 예전에 서점에서 <망내인>을 살까 말까 고민하다가 내려놨던 기억이 어렴풋이 난다. 아마 두께에 쫄아서 그랬을 것이다. 하지만 난 잊어버렸지. 그냥 도입부가 재미있었다는 기억만 가지고 밀리의 서재에 오픈되었을 때, 신이 나서 읽기 시작했다. 완독 후 작가의 말에 이르러서야 이 책이 700페이지나 된다는 것을 알고 깜짝 놀랐다. 이야기 흐름이 굉장히 빠르고 재밌어서 읽는데 얼마 걸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망내인>의 도입부는 주인공이 여동생과 식사를 하기 위해 장을 보고 집에 돌아오는 것으로 시작된다. 그동안 있었던 여러 사건들 때문에 여동생과 자신 모두 힘든 나날을 보냈지만, 주인공은 점점 여동생이 기운을 차리고 있다며 스스로를 다독였다. 하지만 공동주택 입구에 몰린 인파의 틈에서, 바닥에 거꾸러진 채 피 웅덩이에 잠긴 여동생의 시신을 발견했을 때, 그녀는 그 모든 생각이 틀렸다는 것을 깨닫는다. 여동생은 전혀 괜찮지 않았고, 그럴 법도 했다.


  여동생은 얼마 전 지하철에서 성추행을 당했다. 범인은 현장에서 검거되었고, 법의 심판을 받아 복역하게 되었다. 하지만 문제는 거기부터였다. 범인의 외조카라는 사람이 우리로 치면 디시인사이드 같은 유머사이트에 '14살 쓰레기가 외삼촌의 인생을 망쳤다'라는 제목으로 글을 올린 것이다. 외삼촌은 가정적이고 따뜻한 사람인데, 반면 '14살의 쓰레기'는 마약과 원조교제를 일삼는 불량학생이며, 거짓말을 해서 외삼촌에게 누명을 씌웠다는 것이다. 이 글은 엄청나게 회자되어 여동생은 네티즌들의 질타를 받았고 학교에서도 소외되게 되었다. 


  어떤 의혹이 제기되고, 네티즌들이 달려들어 그 대상에게 린치를 가하는 것은 우리가 매일같이 마주하게 되는 이야기다. 나는 엄청난 쫄보라서 익명으로 브런치에 글 하나 올릴 때에도 자신을 특정할만한 부분이 있는가 늘 주의한다. 특정해봤자 물 껀덕지가 없는, 아무것도 아닌 사람인데도 말이다. 대중의 관심으로 먹고사는 사람들은 얼마나 두려울지 가늠하기도 어렵다.


  그렇다고 이 책이 이런 고구마 같은 이야기로 가슴만 치게 만드는가 하면 그렇지 않다. 이 책은 주인공이 문제의 글을 올린 외조카라는 작자를 추적하는 이야기다. 정확하게 말하면 그녀에게 의뢰를 받은 '아녜'라는 이름의 해커가 그 일을 맡아한다. 간판도 없는 엉망진창인 사무실에서 만난 지저분한 몰골의 괴팍한 탐정. 생각만 해도 짜릿해지는 맛이다. 추리물 좋아하는 사람들이라면 믿고 먹는 그 맛! 그래서 이 책은 금방 읽힌다. WPS니 WPA니 온갖 인터넷 보안 관련 약어들이 생소한 재료로 쓰여도, 아는 양념으로 버무렸기 때문에 별 거부감 없이 술술 넘어간다. 



  숨도 못 쉬게 바빴던 기간이 드디어 끝이 나고, 요즘은 미뤄둔 독서와 감상을 쓰는데 대부분의 시간을 보내고 있다. 병마가 설치는 탓에 가족들 친구들 만나기도 어렵고, 스팀에 쌓아놓은 게임 목록을 해치우기엔 그동안 내 컴퓨터가 퇴물이 되어버렸다. 내 여유는 오롯이 내면을 채우는 데 쓰이고 있구나.


 참으로 목마르고도 충만한 나날들이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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