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기끄 Jan 05. 2021

할매동맹

<여자 둘이 살고 있습니다> 김하나, 황선우



  세상 사는 거에 정답이란 건 없다고는 하지만 그 비슷한 '남들 다 하는 것'이 있다. '남들 다 하는 것'이란 탄탄대로에서 벗어나려면 전투력을 상당히 길러야 한다. 아니면 주변의 훌륭하신 분들이 수시로 원펀치 쓰리강냉이를 날리실 테니, 이빨 다 털리기 싫으면 가드를 잘해야 한다. 그래서 아직 결혼 생각이 없었던 2017년 그때는 페미니즘 도서를 참 많이도 읽었다. 똑똑하고 말발 좋은 분들이 얼마나 많은지. 그분들께 속성으로 변론 기술을 배운 덕분에, 남녀가 아주 유별하던 정통 경상도 집안인 우리 가족 사이에서도 기죽지 않을 수 있었다.  


  그런데 결혼을 하고 나니 그 전투력이 뚝 떨어졌다. 이미 우린 동거 5년 차였고, 나는 결혼해도 헤어질 사이는 어차피 헤어진다는 주의였기 때문에, 혼인신고서 종이 쪼가리 한 장이 뭐 대단할 것도 없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남들 다 하는 것'을 달성했을 때 드는 그 편안함이란 엄청났다. 친구들이 투덜거리면서도 "결혼하면 너무 좋아~"라고 말했던 이유를 알게 되었다. 결격사유가 하나 빠지고 나니, 혹시 내가 인생을 잘 못 살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불안감이 상당분 덜어진 것이다.


  내가 이런 쓸데없는 얘길 왜 하냐면, 이제 배때지가 좀 부르다 보니 이런 전투력 넘치는 책을 볼 때 힘이 들기 때문이다. 이 책의 두 작가님들 정말 존경스럽고 대단하신 분들이다. 두 분 다 우수한 커리어를 달성했고, 망원동의 아파트를 자가로 소유하고 있다. 또 독특하고 재미있는 친구분들을 이웃으로 두고 있는데, 그 이웃 간에 우정을 챙기는 방식도 범상치 않다. 이분들의 힙한 삶을 엿보는 건 굉장히 즐거운 일이지만, 문득 그런 생각이 든다. '남들 다 하는 것'을 거부하고 당당하게 자기 만의 길을 가려면 세상에, 이렇게나 훌륭하게 살아야 하는 것이다. 


  한편으로는 '이런 형태의 가족도 좋다'가 이 책의 주제라서 그런지 내가 방문한 곳이 모델하우스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직 본편인 아파트가 지어지기 전인 것이다. 청결 개념이 달라서 다투는 거야 누구에게나 있을 수 있는 싸움거리다. 진짜 이런 가족형태가 지속 가능한지는 둘 중 하나가 연인이 생기거나, 경제적으로 파탄이 나봐야 알 수 있다. 반대하는 게 아니다. 결혼한 부부도 비슷한 문제로 더 쉽게 찢어진다. 하지만 돈문제란 가족의 핵심이다. 내가 남편과 굳이 결혼을 결심하게 된 이유가 그 '돈'이었다.


 차라리 돈을 떼이고 말지 남한테 빚지고는 살지 마라.



  아버지가 어릴 적의 나에게 건 주박 중의 하나다. 그래서 연애든 친구관계에서든 내가 주면 더 줬지 신세 지는 것을 최대한 피하려고 했다. 지금의 남편과도 마찬가지였다. 결혼 전, 같이 살면서부터 공동계좌에 반반씩 돈을 넣고 생활해왔는데, 계약 문제로 우리 둘 다 수입이 몇 년 동안 제로가 되는 바람에 문제가 생겼다. 무급 생활 3년 차에 씀씀이가 더 큰 내가 먼저 잔고가 바닥이 났다. 그때 남편은 뭐 대수롭지 않다는 듯이 공동계좌를 자기 돈으로 채워 넣었다. 남편이 나를 대하는 태도는 한치도 변하지 않았는데, 난 타인에게 100% 의지하면서 비루하지 않았던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다. 그래서 남편과 결혼을 결심했던 것이다.


  돈문제는 사람을 치졸하게 만들지만, 한편으로는 신뢰를 증명하는 가장 쉬운 수단이기도 하다. 내가 무너졌을 때 의지할 수 있다는 믿음 없이는 나도 상대에게 온전히 헌신할 수 없다.


  이 책의 말미에서 황선우 작가님은 "우리에게도 끝이 언젠가 오겠지만, 최대한 미루고 싶다."라고 말한다. 아마 작가님들이 가장 잘 알고 계실 것이다. 아직 세상에는 두 친구 간에 서로 완전히 경제적으로 의지했을 때 생길 수 있는 문제에 대한 제도적인 안전장치가 없다. <여자 둘이 살고 있습니다>의 아름다움은 그 위태로움에 있기도 하다. 나는 두 분의 용기 있는 도전을 응원하고 또 성공하길 기원한다.





  결혼한 친구하고 자기 건강 안 챙기는 남편들 흉을 보다가 우스갯소리로 내가 그런 얘길 했다. "영감들 다 죽고 나면 할망구들끼리 동맹 맺고 살자." 남편은 벌써부터 자길 죽일 생각부터 하냐고 투덜거렸다. 농담으로 나온 말이지만 남겨진 사람들의 고통은 웃음으로 넘기기에는 너무 처절하다. 자식들이 부모님을 모시고 사는 분위기도 아니고, 딩크 부부가 넘쳐나는 세상이니, 남겨진 사람들을 위해 대안가족에 대한 논의가 필요하다는 생각이 든다.


  그게 '할매동맹'이 됐든 '할배동맹'이 됐든 말이다.



매거진의 이전글 두께에 쫄지 않기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