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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기끄 Aug 19. 2019

여행으로 주인공이 되는 것에는 러닝타임이 있다



  대학생 때 싸이월드 게시판에 종종 웃기지도 않는 “감성글”을 남기고는 했는데, 그중에 <관람석>이라는 제목의 글이 있다. 대강 다른 사람의 인생은 무대 위의 주인공 같은데, 보잘것없는 나는 늘 관람석에 있는 것 같아 체념하는 내용이. 누구나 특별해지고 싶다는 욕망이 있다. 저마다 특별함을 획득하는 수단이 다르겠지만 적지 않은 인원의 그것이 여행일 것이고 나 또한 그랬다. 20대의 끝자락 짧은 시간 동안은 말이다.


  스물네 살 때, 입사 전 멋모르고 회사 워크숍을 따라간 적이 있었다. 나는 앞으로의 사회생활을 좌지우지할 낯선 이들 사이에 있는 것이 정말이지 공포스러웠다. 급기야 야밤에 숙소를 나와 개울가의 다리에 올라 뛰어내릴지 말지 심각하게 고민했다. 아마 2미터 남짓한 높이에서 뛰어내려봤자 어디 부러지는 게 고작이었겠지만 모진 창피를 당하고 좁은 업계에서 이름이 오르내렸을 테니 아무 일 없었던 것이 참 다행이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것이 공황발작 같은 게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그렇게 사람을 두려워하는 내가 여행이라니. 자세히 생각해보면 아마 여행에서 만나는 이들은 다시 만날 필요가 없기에 그리 편했던 것이다. 김영하는 <여행의 이유>에서 호텔을 좋아하는 이유로 오래된 집이 기억하는 상처에서 자유로울 수 있다는 것을 꼽았다. 나는 먼 타국으로 떠남으로써 엉망으로 쌓아버린 테트리스 블록 같은 막막한 인간관계로부터 잠시나마 도망칠 수 있었다. 직업이나 경제적인 문제에 대한 고민을 여행 후로 유예할 수 있다는 건 덤이다.


  아무도 나를 모르는 곳에서는 쉽게 불안을 갈무리하고 낭만을 가장할 수 있었다. 여행지에서는 대체로 즉흥적인 방종은 미덕이 되고 별다른 책임이 따르지 않기 때문이다. ‘나도 이런 모습일 수 있구나.’라는 고양감은 곧 ‘나는 이런 사람이야.’라는 자감으로 이어졌다. 그리고 그 마음은 동유럽 여행 중 만난 한 친구가 했던 “넌 누구와도 잘 사귀고 어울리는구나.”라는 말에 마침내 ‘나는 이런 사람이어야만 해.’로 치닫기 시작했다. 하지만 내가 ‘이런 사람’ 즉 붙임성 좋고 유쾌한 사람이 될 수 있는 건 오직 여행길에서 뿐이었다.


  집으로 돌아오고 나면 그간 다짐해 온 온갖 포부를 이행할 용기는 뙤약볕 아스팔트에 떨어진 아이스크림처럼 끈적하게 녹아내렸다. 여느 때처럼 마감 날짜에 허덕이며 근근이 외주를 해야 했고, 나만의 콘텐츠를 만들겠다는 결심은 잔고 앞에 무색해졌다. 여전히 불안정하고 겁이 많은 존재라는 걸 부정하고 싶어 반복해서 집을 나섰지만, 그 충만감은 오래 붙잡아둘 수 없었다. 다시 후미진 관람석으로 밀려나는 기분은 참담했다. 그걸 수 없이 겪고 나서야 깨달았다.


여행으로 주인공이 되는 것에는 러닝타임이 있다는 걸.








  애초에 나는 왜 외향적인 사람이 되는 것이 특별함으로 이어지는 길이라고 믿었을까? 세상에는 그러한 사람들이 정말 무수하게 많은데도 말이다. 곰곰이 생각해보면 그 당시에 자기계발서들의 주된 논조가 그랬듯이 사회는 내성적이고 소극적인 사람들을 환영하지 않았다. 나는 어쩌면 주인공이 되고 싶었다기보다는 환영받는 부류의 대열에 함께 서고 싶었던 걸지도 모른다.


  요즘도 간간히 여행을 다니지만 굳이 비행기를 타야 갈 수 있는 곳이 아니더라도 충분히 만족스럽다는 점은 다르다. 더 이상 여행으로 하여금 나를 다른 사람으로 만들어주기를 기대하지 않기 때문이다. 체력이 예전 같지 않아서 일을 크게 벌일 자신도 없지만 말이다. 운이 좋게도 그 시기와 맞물려 불안하고 예민한 사람들이 목소리를 내기 좋은 분위기가 되어 다행이라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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