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녀관계
할아버지가 연세가 들수록 꾸준히 병원 갈 일이 많아진다는 건 알고 있었다.
그런데도 단 한 번도 병원에 동행한 적은 없었다. 아흔에 가까운 나이에도 지하철 택배 일을 쉬지 않으실 정도로 정정하셨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번 겨울에 그저 지나가는 감기로 생각했던 증상들은 낫기는커녕 쉬어도 좋아질 기미가 없었다. 그렇게 응급실로 향했고 간병생활이 시작되었다.
한 달이 좀 넘는 시간 동안 할아버지의 보호자 역할을 하며 병원을 오갔다. 그렇게 지내면서 끊임없는 고민이 불쑥불쑥 튀어 올랐다.
정보도 구하기 어려웠고, 경험도 없는 병원이라는 생소한 환경은 내가 더 잘해야 한다는 부담감으로 다가오기도 했다.
나와 주로 보호자 교대를 했던 사람은 엄마였다. 엄마는 어떤 느낌을 받고 있을까.
내가 30년 넘게 살아오면서 나는, 그간 집안에 대소사에 당연하게 동원되었었다. 맏딸이기에 요구되는 책임감은 어릴 적부터 내 단짝이었다.
그렇게 나에게 아주 당연하고 자연스럽게 각종 책임들을 나누던 이는 바로 엄마였다.
엄마 역시 그녀의 일평생을 할아버지의 맏딸로서 살아왔다.
가끔 엄마가 내 친할아버지를 돌보던 이야기를 할 때가 있다. 어떤 일이 힘들었었고 어떤 어려움이 있었는지, 119를 몇 번이나 불러야 했는지 등등. 그렇게 본인의 활약상을 늘어놓는 엄마의 말은 점점 빨라진다. 하지만 그 내용 안에 내가 궁금했던 엄마가 어떤 감정을 느끼고 어떤 느낌을 받았는지는 어디에도 없었다. 원래부터 그런 것들을 잘 생각하지 않는 사람인지, 아니면 혹시 본인도 그 감정을 모르고 지나간 것인지 알 수 없었다.
그녀는 항상 그런 식이었다. 어떠한 상황과 그걸 지나온 이야기. 그 속에는 감정은 없고 원인과 결과, 그리고 당위성으로 채워진 이야기들을 한다. 그러고 보면 내 엄마라는 사람은 본인이 겪은 것들을 아주 논리적으로 설명하는 것에 능숙해 보인다.
어쩌면 그녀가 성장해오며 받았던 사랑들이 그런식으로 표현되어왔던 것은 아닐까.
내 어린 시절, 내가 아직 초등학교도 입학하기 전. 그때의 엄마는 지금의 내 나이보다 어렸다. 외할머니는 갑작스레 뇌출혈로 세상을 떠났고, 나의 아빠는 집에 거의 들어오질 않았다. 그 당시 그녀에겐 남편에게도, 본인의 엄마에게도 기댈 수가 없었던 것이다.
어쩌면 이 가정을 지금까지 지탱해온 엄마만의 비결은, 힘든 상황에서도 자신을 끝없이 설득하고 다독이며 버텨오는 것이지 않을까. 장녀로서의 책임을 져야 하는 순간들에도 마찬가지 였을 것 같다.
그래서 엄마는 어떤 상황이 변할 때마다 그렇게 꾸려진 본인의 스타일로 대처한다. 이번 간병에서도 아주 자연스럽게 그 스타일이 흘러나왔다. 논리적으로 자기 자신을 납득시키던 그 말들. 이제는 그 말들을 그대로 나에게 건넨다. 이전엔 어떻게는 이겨내고 살아내려고 본인 스스로에게 말하고, 혼자만 듣고 견뎠을 말들. 이제는 듣는 사람이 두 사람이 되었다. 엄마 자신과 딸인 나.
할아버지가 입원 며칠 만에 큰 고비를 넘긴 날. 치료에 가닥이 잡히고 수술일정을 잡을 수 있겠다는 희소식이 들렸다. 정말 기쁜 소식이었다. 이런 희노애락을 느끼는 건, 장녀에게는 허락된 틈이 아닌가 보다. 그 때 갑자기 엄마는 혹시 모를, 이후에 가족들이 해야 할 일들에 대해 이야기를 했다.
가만 듣고 있자니, 묘한 기시감이 들었다. 나는 분명 기쁜 소식을 들었지만 기뻐할 겨를없이 가족에게 닥칠 수 있는 일들에 대해 의무들을 들으며 마음속에 부담감을 턱턱 무겁게 얹고 있었다.
이게..대체 무슨 일이지. 이게 장녀로 살아가는 삶인 건가.
어쩌면 같은 장녀인 엄마와 나 사이이기에, 가족의 책임을 나누는 것을 좀 더 편하게 생각했을 수도 있겠다. 모녀라는 관계만 빼면 아주 비슷한 K장녀 두명이니까.
그런데 항상 엄마의 이야기들을 들을 때면 머리도 마음도 그렇게 무거울 수가 없다. 마치 거대한 누군가가 꾹.. 내 가슴을 누르고 있는 것만 같다.
잠깐의 감정을 느낄 새도 없는 미래의 의무적인 할 일들을 나열한 단어들, 그걸 잇는 엄마의 논리정연한 설명들. 나는 그 안에 사람다운 감정을 넣고 싶었다.
나에게는 그녀가 살아온 비결. 그것만으로는 버거울 때가 많다. 그런 나를 엄마는 이해하지 못하겠다고 한다. 하지만 어쩌겠나 같은 장녀라도 우리는 다른 사람인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