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소심 Oct 14. 2018

저는 방관자입니다.

『카타리나 블룸의 잃어버린 명예』와 소심한 내 이야기

무척이나 맑고 깨끗한 가을 날씨였다. 높고 푸른 하늘, 선선한 바람, 시원한 공기. 완벽한 가을의 삼박자가 지친 몸과 마음을 절로 가볍게 했다. 평소에 싫어하던 북적함마저 오늘만큼은 기분 좋게 느껴졌다. 특별할 것 없는 일상적인 얘기들이 여기저기, 자연스레 섞여있었다. 그렇게 가벼운 마음으로 산책을 하던 찰나였다.


"허ㅑ!!!!! ~~ 하면 ~~@^#$&~!!!"


갑자기 큰 소리가 났다. 뒤를 돌아보니, 어떤 노인께서 지나가는 젊은 행인에게 호통을 치고 계셨다. 어떤 말인지는 자세히 듣지 못했다.  그가 화났다는 점은 확실했다. 노인은 무엇 때문에 화가 난 걸까. 바닥을 향해 삿대질하는 노인의 주변에는  무것도 없었다. 아마도 침을 뱉었거나, 눈에 띄지 않는 쓰레기를 버렸을까 싶다. 사실 젊은 행인이 쓰레기를 버렸는지, 무엇을 했는지는 잘 모르겠다. 단지 나는 "아~ XX 시끄럽네 XX"이라는 비속어와 함께 비난 섞인 말들을 들었다.

photo by. Unsplash.com

그 짧은 순간 동안 제삼자인 나는 많은 것을 파악할 순 없었다. 하지만 사람들은 노인을 향한 날 선 눈빛과 말들을 늘어놓았다. "이렇게 어그로를 끄시네", "꼰대 실제로 처음 봄ㄷㄷ" "굳이 저렇게까지 소리쳐야 되나?"  나 또한 평화로운 가을 날씨의 고요함을 깨는 이유 모를 이질감에 약간의 불쾌함을 느꼈던 거 같다. 그러나 나는 노인을 뒤로하고 비속어를 내뱉으며 지나가는 행인들과, 노인을 쳐다보는 차가운 눈길들을 바라보며 알 수 없는 섬찟함을 느꼈다. 젊은이들로 북적이는 거리 속에서, 늙고 초라해 보이는 사람은 소외받아야 할 존재였던 걸까.


나는 소심한 방관자였다. 누구의 잘못인지 구별하지 않은 채, 이야기조차 들어주지 못한 채, 불편해하는 노인을 그저 스쳐 지나다. 그곳을 떠나고 머지않아 후회했다. '도대체 왜 그렇게 화가 나셨던 걸까' 하는 생각이 머릿속에서 떠나질 않았다. 그 후로도 나는 그 길을 지날 때마다  노인을 떠올린다.


생각하다 보면 이와 비슷한 일들이 참 많았다. 그리고 나는 꾸준히, 방관해왔다. 잘못된 것을 바라보며 느꼈던 회의감은 늘 용기를 앞서질 못했다. 이러면 안 된다는 생각을 늘 하면서도, 마음 한 편으로는 '굳이 내가 나설 필요가 있을까' 싶은 순간도 많았다. 그런 내 어긋난 마음가짐을 제대로 꼬집은 책이 있었다. 하인리히 뵐의 『카타리나 블룸의 잃어버린 명예』라는 책이었다. 나는 위에서 언급했던 '노인'에 대한 찝찝함과 이유 모를 섬찟함을 이 책에서도 느낄 수 있었다.


이 작품이 독자들의 주목을 끈 까닭은 하인리히 뵐 특유의 문학 세계의 특성과 관련이 있다. 그는 전후 독일의 혼란스러운 상황 속에서도, 사회의 억압과 인권 침해에 대해 깨어 있는 양심의 소릴 내기를 마다하지 않았다. 특히 1970년대 독일 사회 전체를 뜨겁게 달구었던 테러리즘에 대한 논쟁과 언론의 폭력에 대해서도 함구하지 않았다.


"나는 비록 종이 한 묶음, 뾰족이 깎은 연필 한 통, 타자기 하나를 가지고 혼자서 글을 쓰고 있지만, 나 자신이 혼자라고 느낀 적은 없고 항상 뭔가에 연결되어 있다고 느꼈다. 시간과 동 시대성에 연결되고, 한 세대에 의해 체험되고 경험된 것에 연결되어 있음을 느낀다." - 하인리히 뵐


그는 작품을 통해 현실의 모순이나 문제점들을 적나라하게 들춰내고 비판함으로써, 작가 자신의 시대 체험, 동시대인의 문제, 동시대적 현실 인식을 강조한다. 그 사례가 바로 이 책, 『카타리나 블룸의 잃어버린 명예』다. 이 작품은 특히, 출판되자마자 베스트셀러는 물론 학생들 교재로도 자주 선정됐고, 당시 노벨 문학상 수상 작가의 작품들 중에 가장 많이 읽혀서 잘 알고 있는 책이라고.



소박한 그녀 카타리나 블룸은 어쩌다 살인까지 저지르게 되었는가

photo by. Unsplash.com

1974년 2월 24일 일요일, 한 일간지 기자가 살해당하는 사건이 발생한다. 살인범은 카타리나 블룸. 27세의 평범한 여인으로, 늘 성실하고 진실한 태도로 주위의 호감을 사던 자였다. 그런 그녀가 어째서 살인을 저지른 것일까? 이때부터 이야기는 과거로 거슬러 올라간다.


지난 수요일, 카타리나 블룸은 어느 댄스파티에서 괴텐이라는 남자를 만나 함께 밤을 보낸다. 그런데 이튿날 경찰이 그녀 집에 들이닥쳐 수색을 벌이더니, 급기야 그녀를 연행하기에 이른다. 사실 괴텐은 은행 강도에 살인 혐의까지 있는 인물로, 그동안 계속 언론과 경찰에 쫓기고 있었. 이 소식을 들은 <차이퉁> 지는 곧바로 "살인자와의 금지된 사랑"이라는 기사를 내보내며 블룸의 존재를 온 세상에 알린다. 이러한 상황 속에 카타리나 블룸은 묵비권을 행사하고, 이것이 언론에 보도되면서 그녀의 명예는 산산조각 나게 된다.


단지 첫눈에 반한 남자와 하루를 보냈을 뿐이었지만, 카타리나 블룸 사회와 언론에 의해 철저히 파괴된다. 언론은 그녀를 살인범의 정부, 테러리스트의 공조자, 음탕한 공산주의자로 만들어 버린다. 그리고 군중은 언론의 왜곡된 언어와 허위 보도에 폭발적으로 반응하며 개인을 파괴해나간다.  오늘날에서 보아도 이상하지 않은, 충격적인 작품이었다.


photo by. Unsplash.com

다시, 그 날로 돌아가 보자. 나는 카타리나 블룸의 내면을 들여다보지 못한 것처럼, 노인의 말 또한 듣지 못했다. 그가 어째서 화난 것인지, 지나가는 젊은 행인에게 무슨 호통을 친 것인지 알 수 없었다. 그렇다고 해서 굳이 알고 싶진 않았다. 지나가는 사람들 또한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그 노인의 호통을 '어그로', '꼰대 짓'으로 만들어버렸다. 그 날, 우리는 또 한 명의 카타리나 블룸을 만든 것이다


사람들의 '무반응'에 고개를 돌리는 노인의 모습은 속상하지도, 분이 풀리지 않은 표정이지도 않은, 그러나 조금은 씁쓸해 보이는 표정이었다. 카타리나 블룸과 노인. 두 사람이 속한 상황은 무척 달랐지만, 나는 그들을 보며 비슷한 감정을 느낄 수 있었다. 그 날의 기억은 온몸으로 퍼져나가 저릿한 상처를 남겼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