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험을 넘어서 구조를 이해하려는 시도
며칠 전 술자리에서 베트남 행정 이야기가 나왔다. 사회보험 환급이 또다시 연장되었다는, 말도 안 되는 이유 때문이었다. 한 번은 서류가 잘못 기입되었다는 이유였고, 두 번째는 주소란에 현(군) 이름이 빠졌다는 이유였다. 문제는 그 종이와 내용 모두를 담당자 스스로 확인하고 건네줬다는 점이다. 고쳐서 넣었다면서도 다시 일주일을 연장한다는 말에 허탈감이 극에 달했다.
그 때 한 사람이 말했다.
“사회주의 나라라 원래 그래. 돈 쥐어주면 끝나.” 순간 알 것 같으면서도 이상한 찜찜함이 남았다. 경험을 전체로 환원하는 말처럼 들렸기 때문이다.
베트남에서 살다 보면 불분명한 절차, 짐작하기 어려운 행정 속도, 말을 바꾸는 관공서 같은 일들을 종종 겪는다. 나도 수없이 경험했다. 하지만 이런 문제들을 곧바로 ‘사회주의라서 그렇다’라고 말하면, 우리는 너무 쉽게 결론을 내린 셈이 된다. 그렇다고 또 완전히 무시할 수도 없다. 어떤 부분은 정말 구조에서 비롯된 차이이기도 하니까.
나는 이번 일을 계기로 ‘베트남이 사회주의이기 때문에 한국과 실제로 다른 점들’을 자세히 들여다보고 싶어졌다. 즉, 경험을 전체화하지 않으면서도 체제적 차이를 정확히 짚어보는 작업이다.
아래는 내가 정리해본, 사회주의 체제에서 기인하는 베트남의 확실한 ‘차이’들이다.
1. 생필품 가격이 낮게 유지되는 국가 구조
베트남에서 쌀, 채소, 생선, 계란 같은 기초 식재료가 유난히 저렴하다는 인상은 단순히 '물가가 싸서'가 아니다. 그 배경에는 사회주의 국가들이 공통적으로 갖고 있는 ‘기본 생존비는 국가가 책임진다’라는 철학이 깔려 있다.
베트남은 식량과 기본 식품을 시장 논리로만 움직이게 두지 않는다. 국민 생활비가 일정 수준 이상 올라가면 사회 전체가 불안정해진다는 경험적 인식이 강해서, 기초 식품은 ‘시장 상품’이기 전에 국민의 기본 권리에 가깝게 취급된다.
여기에 유통 구조도 한몫한다. 한국은 농가에서 소비자의 식탁까지 오기까지 여러 단계의 유통망과 인건비, 물류 비용이 붙지만, 베트남은 농가 → 시장 → 소비자처럼 단계가 매우 단순하다. 포장, 보관, 검사, 세금이 적게 들어가기 때문에 가격이 오를 틈이 애초에 적다.
또 필요할 때는 정부가 가격 안정을 위해 직접 움직이기도 한다. 쌀값이 오를 조짐이 보이면 비축미를 풀거나, 생선·육류 가격이 급등하면 수입물량을 늘리는 식이다.
'식량 안정이 곧 사회 안정'이라는 인식이 강하기 때문에, 정부는 기본적 생필품만큼은 급격한 가격 변동을 허용하지 않는 편이다.
결과적으로, 베트남의 생필품 가격이 낮게 유지되는 것은 단순한 물가 문제가 아니라, 사회주의 체제가 가진 생활 안정 중심 정책 + 짧은 유통 구조 + 식량 자급 시스템이 함께 만들어낸 결과다. 그래서 외식이나 수입품은 한국과 비슷하거나 오히려 비싼 경우가 많지만, 기초 식재료만큼은 베트남이 훨씬 저렴하다는 체감이 확실히 존재하게 된다.
2. 모든 최종 결정권이 공산당에 집중된 단일 권력 구조와 이에 따른 행정의 지연
베트남은 단일 정당 국가다. 정책, 인사, 법률, 예산 같은 국가의 핵심 판단은 모두 공산당 조직을 거쳐야 한다. 이론적으로 보면 ‘한 곳에서 결정하니까 빠르겠다’고 생각하기 쉽지만, 실제 현실은 정반대다. 바로 결정권이 한 곳에 몰려 있기 때문에 오히려 절차가 더 느려지는 구조가 된다.
일단 베트남의 행정 체계는 중앙 → 성 → 군 → 현 → 동으로 이어지는 수직적 피라미드 구조다. 문제는 이 수직 구조에서 어느 단계도 단독으로 최종 책임을 지지 않는다는 점이다. 작은 사안이라도 “윗선의 확인”과 “조직 내부 보고”가 필요하고, 결정 후에도 다시 당 조직의 승인 절차를 거쳐야 하는 경우가 많다. 즉, 어느 한 단계라도 책임을 단독으로 지려고 하지 않고, 반대로 ‘확인받은 뒤 처리하는 것’이 안전한 방식으로 자리 잡혀 있다. 이게 첫 번째로 속도를 늦추는 요인이다.
두 번째는 정책과 행정 판단이 법보다 ‘당의 방향성’에 더 민감한 구조라는 점이다.
정확한 규정이 있어도 담당자는 '혹시 위의 판단과 다르면 문제가 생기지 않을까?'하는 심리를 갖게 된다. 그래서 단독 판단을 피하고, 가능하면 다시 묻고 다시 확인하고 다시 문서를 보낸다. 의사결정이 빠르게 내려오지 않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세 번째는 수직 조직이 너무 촘촘해져 있어서, 하나의 사안이 여러 부서와 기관을 순차적으로 거쳐야 한다는 구조적 문제다. 한국에서라면 하나의 창구에서 끝날 일을 베트남에서는 “접수 → 확인 → 재확인 → 승인 → 명부 작성 → 보고” 같은 과정을 각각 다른 부서가 맡는 경우가 많다. 이 과정에서 ‘책임 분산’과 ‘절차 중복’이 발생한다.
결국 베트남의 단일 권력 구조는 명령 하나로 전 국가를 움직이는 강한 조직처럼 보이지만, 행정 집행 단계에서는 확인 → 보고 → 승인 → 재승인의 단계가 많아지기 때문에 오히려 결정을 늦추는 방향으로 작동하는 셈이다. 그래서 베트남에서는 서류 한 장을 처리하는 데도, 담당자 재량보다 ‘절차의 안전성’을 우선 고려하는 경향이 강하고, 이것이 우리가 체감하는 행정의 느린 속도로 이어진다.
3. 토지가 국가 소유이며 개인은 ‘사용권’만 가진다. 하지만...
베트남의 땅은 모두 국가 소유다. 국가가 토지의 ‘소유권’을 갖고 있고, 국민과 기업은 그 땅을 일정 조건으로 사용하는 ‘사용권(Land Use Right)’만을 가진다. 이론적으로 보면 부동산 시장이 작게 움직여야 맞지만, 현실의 베트남은 오히려 부동산 가격이 급격하게 오르고, 개인들이 사실상 ‘사유재산’처럼 거래하는 시장이 존재한다.
이 지점에서 많은 사람들이 의문을 갖는다. '국가 소유인데 왜 사유화된 것처럼 시장이 움직일까?'
그 이유는 베트남의 토지 제도가 사회주의적 원리와 자본주의적 시장이 절충된 형태이기 때문이다. 우선, 베트남의 사용권은 매우 강한 권리다. 사용권을 가진 사람은 그 땅을 매매, 증여, 상속, 임대할 수 있으며, 건물을 짓고, 개발하고, 은행 담보로 잡을 수 있다. 즉, 소유권을 갖지 않았지만 ‘소유권에 준하는 권리’를 대부분 행사할 수 있는 것이다. 이 강력한 사용권 때문에 시장에서는 이를 사실상 사유재산처럼 취급하게 된다. 이 점이 중국 사회주의와는 다른 점이다.
4. 높은 공공, 국가기업의 비중
베트남은 핵심 기반 산업의 대부분을 국영기업(SOE, State-Owned Enterprise)이 맡는다. 전기, 통신, 수도, 철도, 항만 같은 나라의 뿌리 역할을 하는 분야는 민간 기업이 아니라 국가 주도로 움직이며, 이 때문에 가격 인상이 느리고 큰 변동이 거의 없다. 사회주의식 경제 운영에서 가장 중요한 가치가 ‘경쟁’이 아니라 ‘안정’이기 때문이다.
우선 전기는 베트남전력공사(EVN)가 사실상 독점 공급한다. EVN은 베트남 전체 발전소, 송전, 배전망을 운영하며, 전기요금 역시 국가가 결정한다. 그래서 산업단지 전력 수요가 폭발적으로 늘어도 요금이 급격하게 오르는 일이 거의 없고, 반대로 적자가 나더라도 국가가 보전하거나, 장기 계획으로 개선한다. 한국처럼 민간 발전회사들이 경쟁하며 시장 가격이 오르내리는 방식과는 완전히 다르다.
통신 역시 마찬가지다. 베트남의 주요 통신사는 Viettel, VNPT, Mobifone 이 세 곳이 핵심인데, 이 중 Viettel은 국방부 산하 국영기업이고, VNPT와 Mobifone도 모두 국영 회사다. 이들과 경쟁하는 민간 통신사는 사실상 없다. 그래서 데이터 요금이 싸고, 3사 요금이 거의 똑같이 움직이는 이유도 ‘시장 경쟁’이 아니라 국가 조정 구조에서 기인한다.
수도 공급은 대부분 각 지방의 지방 국영 상수도 회사(문자 그대로 시·도의 소유)가 맡는다. 수돗값 역시 정부가 정한 범위 안에서 움직이며, 인플레이션이 있더라도 서서히 조정되는 방식이다. 민간 상수도 사업자가 경쟁하며 가격을 올리거나 설비 교체 비용을 소비자에게 전가하는 구조가 아니다.
철도는 베트남철도공사(Vietnam Railways)가 단일 운영 주체다. 항만 역시 Vinalines(국영 해운·항만 그룹)과 각 지방의 국영 항만 관리기관이 주도적으로 운영한다. 물류 효율이 한국이나 싱가포르처럼 빠르게 개선되지 않는 이유 중 하나도 이 국영 중심 구조 때문이다.
이런 구조는 경제 발전 속도나 혁신 측면에서는 느리게 보이지만, 반대로 가격 안정과 공공 서비스의 지속성이라는 장점이 있다. 요금이 급격히 오르지 않고, 국영 기업이기 때문에 설비 교체나 적자 문제를 단기 수익성으로 판단하지 않는다. 국가 계획에 따라 천천히 움직이며 전국적 서비스 균형을 맞추는 방식이다.
정리하자면, 베트남의 기반 산업은 '수익 극대화'가 아니라 '국가 안정'을 중심 목표로 한다. 경쟁이 적고 변화가 느린 대신, 국가 전체가 감당할 수 있는 속도로 조정되며, 요금 또한 급변하지 않는다. 사회주의 국가 특유의 공공 중심 구조가 그대로 반영된 결과다.
5. 외국 기업·자본에 대한 강한 진입 규제
사회주의 국가들은 핵심 산업을 외국 자본에 쉽게 개방하지 않는다.
언론·방송, 금융(은행, 보험), 교육(학교 설립), 의료(병원 설립), 통신(모바일 망, 국영기업), 에너지(전력, 석유), 국방·치안 분야 들로 전략 산업(Strategic Sector) 혹은 국가 통제산업(Control Sector)라고 부른다. 이는 사회주의 국가가 “절대 놓지 않는 영역”들이다. 이 분야는 외국이 들어갈 수 없거나, 지분 제한이 매우 크다. 또한 경쟁이 거의 없고, 국영기업이 독점하는 곳도 많다.
결국, 경제는 개방되어 있지만, 전략 산업은 분명한 보호벽이 존재하는 것이다.
6. 국가의 언론, 교육, 종교의 흐름 관리
베트남은 언론, 교육, 종교 분야에서 국가의 관리가 분명하게 존재한다. 많은 사람들이 '통제'라고 표현하는 이유는, 특정 정치적 논쟁이나 비판적 담론이 공개적으로 크게 확산되는 구조가 아니기 때문이다.
언론은 대부분 국가·공산당 산하 기관이 운영하며, 민간 언론도 있지만 정치적 이슈에서는 보도 범위가 제한적이다. 정치적 충돌을 피하고 사회적 혼란을 막으려는 목적이 크지만, 반대로 보면 정권 비판이나 다양한 정치 담론이 자리 잡기 어렵다는 한계도 명확하다.
교육 역시 국가가 강조하는 가치 : 단결, 사회 안정, 공산당 현대사 해석이 기초 교육 과정에 들어간다. 이는 국가 정체성을 유지한다는 장점이 있지만, 역사, 정치 분야에서 다양한 관점의 토론이 부족해지는 단점으로 이어질 수 있다.
종교는 일상적 신앙 활동은 자유롭지만, 대규모 종교 단체의 급격한 확장이나 정치적 색채가 감지되면 허가, 조정, 승인 절차가 강화된다. 이는 사회 갈등을 예방하는 목적도 있지만, 국가가 종교의 자율성을 일정 부분 제한한다는 비판도 존재한다.
결국 이 영역은 사회주의 국가의 특징이 가장 선명하게 드러나는 부분이다. '안정을 우선시한다'는 장점과 '표현과 사상의 다양성이 제한된다'는 단점이 동시에 존재하는 구조라고 할 수 있다.
7. 재벌 중심이 아닌 ‘중소기업 + 외국기업’ 중심의 경제 생태계
국가가 재벌급 민간 대기업의 출현을 거의 허용하지 않는다. 그 결과 민간 기업의 대부분은 중소기업이고, 대형 투자는 한국·일본·싱가포르 같은 외국 자본이 맡는다.
베트남이 대규모로 개방한 분야 (외국 기업이 경제를 이끄는 영역)는 실제로 '베트남이 자국이 약하다고 판단한 분야'들이다.
특히 제조업(FDI Manufacturing)은 베트남이 자국 성장의 핵심 엔진으로 삼는 분야다. 제조업(전자, 의류, 신발 등), IT 개발, 부품 생산, 반도체 조립, 물류, 관광·호텔, 유통(대형마트는 부분 허용), 식음료 생산, 건설 등이 이에 해당된다.
이 산업들에 외국 기업이 들어오면 일자리, 수출, 기술 획득이 동시에 가능하기기 때문이며, 베트남이 가장 적극적으로 개방한 영역이다. 그래서 삼성, LG, 도요타, 폭스콘(애플 협력사), 인텔 등이 베트남 경제의 중심축이 된 것이다.
경험을 이해할 때 필요한 태도
베트남에서 우리가 겪는 많은 불편함이 있다. 그중 일부는 사회주의 체제 구조에서 오는 것이고, 일부는 개별 직원의 역량이나 책임감 부족에서 오는 것이다. 문제는 많은 사람들이 이 둘을 구분하지 않고 모든 원인을 ‘사회주의라서’라고 결론지어 버린다는 점이다.
사회주의 체제가 가진 특성이 확실히 존재하는 건 맞다. 하지만 그 체제 자체가 베트남의 모든 문제를 설명해 주는 건 아니다. 이런 단순화를 벗어나기 위해서는 ‘경험을 전체화하지 않는 연습’이 필요하다. 어떤 문제는 제도에서 오고, 어떤 문제는 사람에게서 오고, 또 어떤 문제는 문화에서 온다. 중요한 건 그걸 구분하고 이해하려는 태도다.
베트남에서의 경험은 나에게 계속 질문을 던지게 한다.
'내가 본 것이 정말 전체일까?'
'혹시 내가 너무 빠르게 결론을 내린 건 아닐까?'
이런 질문을 놓지 않을 때, 우리는 더 넓은 시야로 베트남을 이해할 수 있고, 또한 한국도 더 잘 이해하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