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수 경험에서 찾은, 작지만 확실한 진실. 기억이 아닌 습관의 힘!!
인간은 망각의 동물이라고 했던가?
가만히 생각해보면 맞는 말 같다. 나부터 시작해 딸, 아들 모두 재수를 했다. 세 아이(?)라고 할까? 우리 집 세 사람 모두 처음보다 성적이 올랐다는 건 분명하다. 아직 아들의 최종 결과는 나오지 않았지만 방향은 분명히 위쪽을 향하고 있다.
그런데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재수를 하면 당연히 성적이 오르는 게 정상 아닌가? 생각해 보면 일 년을 더 공부한다. 학교를 오가며 낭비되는 시간도 없고, 공부만 하는 환경이 만들어지고, 어쨌든 ‘한 번 더’ 준비하는 과정이다. 그런데도 주변을 보면 재수를 했는데 성적이 별로 오르지 않은 사람도 있고, 심지어 떨어진 사람도 꽤 많다. 도대체 왜 이런 일이 일어나는 걸까?
여기서 ‘망각’이라는 단어가 떠오른다. 사람은 기억하려 하는 것보다 잊어버리는 것이 훨씬 많다. 지금 당장 어제 점심 뭐 먹었는지, 지난주에 어떤 대화를 했는지, 시험에서 어떤 문제를 틀렸는지 떠올리려면 머리가 하얘지지 않나. 하지만 이상하게도 어렸을 때 듣던 동요나 가요의 가사는 지금도 생생하게 따라 부른다. 텔레비전에서 20년, 30년 전에 들었던 멜로디 한 줄만 흘러나와도 음정이 자연스럽게 맞춰진다. 심지어 가사를 다 기억하고 있는 게 신기할 정도다.
여기서 중요한 차이가 나타난다.
1. 망각은 자연스러운 기능이다
사람의 뇌는 ‘필요 없는 정보’를 지우면서 효율을 유지한다. 그때그때 중요하다고 느끼지 못한 정보는 빠르게 사라진다. 시험 공부도 마찬가지다.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순간에만 집중하고, 시간이 지나면 뇌는 과감하게 날려 버린다.
2. 반복이 있는 기억만 남는다
동요, 가요의 가사가 지금까지 남아 있는 이유는 단순하다. 반복했다. 억지로 외운 게 아니라 자연스럽게 즐기면서 수십 번, 수백 번 들었기 때문이다. 반복은 의지를 넘어서 습관이 된다. 습관은 망각을 이긴다.
3. 감정이 들어가면 잊히지 않는다
어릴 때의 노래는 단순한 멜로디가 아니다. 그 때의 공기, 냄새, 마음, 풍경까지 다 묶여 있다. 감정은 기억의 접착제다. 즉, 감정이 실린 기억은 쉽게 날아가지 않는다.
4. 재수한다고 성적이 오르지 않는 이유
여기서 현실이 드러난다. 재수한다고 해서 모두가 성적이 오르지 않는 이유는 크게 두 가지다.
가.공부를 ‘반복’하지 않아서 나.공부 내용에 ‘감정’이 실리지 않아서
노력의 시간만 늘어난다고 기억이 쌓이지 않는다. 똑같은 방식으로, 똑같은 감정 상태로, 똑같이 반복되는 하루라면 기억은 새는 물처럼 증발한다. 반대로, 방법을 바꾸고, 스스로 납득하고, 이해가 감정으로 연결될 때 비로소 성적이 움직인다.
그래서 결국 망각은 실패의 징조가 아니라 자연스러운 전제 조건이다. 망각이 많기 때문에 우리는 더 나은 방식으로 반복하고, 더 의미 있는 방식으로 배우고, 그래서 성적도 오른다.
5. 세 사람 모두 성적이 오른 이유
돌아보면 우리 집 세 사람 모두 성적이 오른 데에는 이유가 있다. 재수 과정에서 "해야 하니까 하는 공부"에서 벗어나, "이걸 이해하고 넘어가야 한다"는 감정과 동기가 생겼기 때문이다. 그 감정은 곧 반복을 만들어냈고, 반복은 기억을 밀어 올렸다.
누군가는 말한다.
“재수는 성적을 올리기 위한 마지막이자 최고의 기회이다.” 내 생각은 조금 다르다. 재수는 망각을 이기는 방법을 몸으로 배우는 과정이다. '잊어버리는 것이 당연한 인간의 뇌'를 탓하기보다는, 반복하고, 이해하고, 감정을 실어서 기억을 쌓는 방식을 배운 시간이었다.
그래서 이제 이렇게 생각하기로 했다. 망각에 늙어가고 있다고 움추려 들기 말자고. 망각은 어쩌면 자연스럽게 흘려보내도 되는 것 아닐까? 문제는 잊는 것이 아니라, 잊히는 만큼 새로운 것을 다시 배우는 습관을 만드는 것이다. 노래 가사처럼 자연스럽게 몸에 남는 기억은 억지로 만들 수 없지만, 매일 조금씩 반복하고, 의미를 찾고, 감정을 담는다면 어떤 지식도 남게 될 것이다.
결국 중요한 건 ‘기억’이 아니라 ‘습관’이다. 이제야 나는 그 사실을 다시 배우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