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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송주홍 Dec 29. 2023

자급자족해야했던 산골 살림

#12 가사 노동사 ②

대전광역시 대덕구 신탄진동의 서당골. 그러니까 동분이 줄곧 “서당살 때”라고 표현하는 시댁(이하=서당)은, 철길 건너 산길을 10분쯤 걸어 올라가야 나오는 산골 마을이었다. 시댁 포함 다섯 가구 정도가 오붓이 모여 지냈다. 편의시설이랄게 전혀 없었으니 시장 한 번 다녀오는 게 일이었다. 그러니 거의 모든 걸 자급자족할 수밖에 없었다.      


“니네 할머니가 소, 돼지, 닭을 아예 안 드셨잖어. 냄새난다고. 생선 중에서도 갈치나 동태, 양미리 같은 거, 비린내 안 나는 것만 조금씩 드셨지. 그러니까 시장 갈 일이 거의 없었지. 그런 데다가 밭에서 메주콩, 배추, 열무, 옥수수, 대파, 상추, 감자, 호박, 가지, 풋고추까지. 아무튼 간에 어지간한 야채는 다 길러 먹었으니까. 마당에 자두나무도 큰 거 하나 있었고, 앵두랑 대추나무도 있었고, 마당 수돗가 한쪽에 미나리깡도 있었거든. 그러니 쌀이랑 소금, 양파랑 마늘 같은 거, 가끔 생선만 시장에서 사다 먹었지, 뭐.”     


서당의 1년 살림은 꽃 피는 3월부터 시작이었다. 앞마당 텃밭에 감자, 대파, 옥수수, 가지, 시금치, 아욱 등을 시작으로 4월이면 고추, 호박, 상추, 5월이면 뒷마당 산자락에 메주콩을 심었다. 철마다 동분의 시어머니가 앞장서고, 동분이 뒤따랐다. 


동분은 그전까지 줄곧 공장만 다녔다. 농사는커녕 호미 한 번 잡아보지 않았다. 모든 게 서툴렀다. 그때마다 시어머니는 못마땅한 표정으로 혀를 ‘끌끌’ 찼다. 그러면서 꼭 한마디를 붙였다.     

 

“너는 도대체 집에서 뭘 배워왔냐?”

“…….”


그렇게, 귀에 딱지가 앉도록 잔소리 들어가며 농사일 배우고 살림을 익혔다. 봄부터 초여름까진 미나리깡에서 키운 돌미나리와 텃밭 상추, 아욱, 시금치 등이 주된 찬거리였다.      


“미나리깡에서 미나리가 얼마나 잘 자랐다고. 한 움큼씩 베어다가 줄기는 김칫국물 담가 먹고, 여린 이파리는 훑어서 식초 넣고 새콤하게 무쳐 먹었지. 아무튼 간에 여름까지는 미나리가 밥상에서 안 빠졌어. 그렇게 베어 먹어도 금방금방 줄기가 올라왔으니까. 그러고 아욱, 시금치 같은 건 물에 살짝 데쳐서 된장이랑 들기름 넣어서 무쳐 먹거나 된장국에 넣어서 끓여 먹고. 상추 이파리 올라오면 따다가 쌈 싸 먹고. 시골 밥상이 뭐 있냐? 맨날 김치에 된장국 아니면 된장찌개지. 그냥 척척 하긴? 니네 할머니한테 다~ 혼나면서 배운 겨. 얘기했잖어. 청주에서 신혼 살림할 때 오뎅국밖에 못 끓였다고. 그러니 얼마나 깨졌겄냐. 아휴~ 말도 말어. 아무튼 뭐 하나 대충 넘어가는 법이 없었어. 너도 알잖어, 니네 할머니 성깔. 얼마나 까다롭고 깔꼼 떠는 양반이었냐.”    

 

초여름이면 감자를 수확했다. 수확한 감자는 뒷광 흙바닥에 풀어놓고, 1년 내내 골라 먹었다. 채 썰어서 소금이랑 후추 뿌려 볶아도 먹고, 간장 넣어서 졸여도 먹고, 납작 썰어서 감잣국도 해 먹었다. 


1992년, 동분의 시어머니 故 김동춘 여사의 생전 모습. 당시 71세.


감자를 시작으로 여름부턴 먹거리가 풍성했다. 옥수수부터 호박, 가지, 풋고추, 자두, 앵두 등이 저마다 달렸다. 가지는 식용유에 달달 볶아먹거나 물에 데쳐서 고춧가루 뿌려 무쳐 먹고, 호박은 감자와 함께 된장찌개에 숭덩숭덩 썰어 넣었다. 새우젓 넣고 자박자박 졸여 먹기도 했다. 호박 이파리도 손질해 쪄서 밥에 싸 먹거나 절구로 으깨 된장국에 넣어 먹었다. 끼니마다 풋고추와 상추도 빠지지 않았다. 


긴긴 여름밤이면 자두나 앵두 따다 씻어 먹고, 옥수수 따다 ‘뉴슈가’ 한 숟갈씩 퍼 넣어 쪄먹었다. 옥수수 껍질 벗길 때 수염은 따로 말려 차로 우려먹었다. 무엇 하나 허투루 버리지 않았다. 


그런 모든 순간마다 시어머니가 앞장서고, 동분이 뒤따랐다. 동분의 시어머니는 뭐든 자신이 직접 해야 직성 풀리는 타입이었다. 어떤 일이든, 그러니까 농사든 요리든 살림이든 동분에게 전적으로 맡기지 않았다. 설령 맡겨도 끝내는 본인이 와서 다시 해야 비로소 일이 마무리되곤 했다.      


“그러니까 서로 피곤한 겨. 차라리 모든 살림을 맡기고 신경을 안 써주면 엄마가 마음이라도 좀 편할 거 아녀. 아니면 아예 당신 혼자서 다 하시던가. 그것도 아니면 딱 나눠서 역할 분담을 하던가. 이건 뭐, 시켜놓고 사사건건 쫓아다니면서 잔소리를 해대니 니네 할머니는 할머니대로 피곤한 거고, 엄마는 엄마대로 몸고생, 마음고생을 다 한 겨. 근데 또 지금 와서 가만가만 생각해 보면 니네 할머니가 뭐 대단하게 잘못했나 싶어. 성깔이 좀, 아니 대~단~하게 까다로웠다 뿐이지. 호호호. 그냥, 그 시대가 그랬던 거고, 상황이 어쩔 수 없었던 거지, 뭐. 아무튼 니네 할머니도 스스로를 가만 못 두는 양반이라, 평생 고생만 하다가 갔어. 세월이 오래 지나서 그런가? 가끔 니네 할머니 생각하면 짠한 마음이 든다?”     

 

그렇게 예순 넘은 노파와 이제 갓 스물을 넘긴 새댁은 새벽부터 일어나 마당을 쓸고, 아이들을 씻기고, 아침을 차리고 설거지를 하고, 수돗가에서 손빨래하고 청소를 하고, 밭일하고 점심을 차리고 설거지를 하고, 밭일하고 저녁을 차리고 설거지를 하고, 아이들을 씻기고 야식을 챙겼다. 당시 서당엔 동분의 시아버지부터 시어머니, 시동생, 동분과 남편 송일영, 큰아들 주성과 조카 영희와 철수까지. 8명의 대식구가 살았다. 당연한 건 아무것도 없었다. 


감자를 수확하고 빈 텃밭에 7월이면 배추와 열무 씨를 사다 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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