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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고만 Apr 25. 2022

나무 터널

걷기 싫은 길이 있었다.

대낮에도 어두운 그 길은 한 여름에도 선선했고, 겨울에 눈이 한 번 내리면 봄이 오도록 녹지 않았다.

한쪽은 깎아지는 산비탈이고 맞은편은 키가 큰 나무들이 병풍처럼 빼곡한 길이었다.

무성한 나뭇가지가 하늘을 가릴 정도로 우거져 있다 보니 터널이 아님에도 터널을 걷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낮이든 밤이든, 여름이든 겨울이든 정말 걷기 싫은 길이었다.

그런데도 가끔 그 길을 이용한 건 그 길이 지름길이었기 때문이다.


고등학생 때였다.

야간자율학습은 밤 11시에 끝났다. 밤이 늦다 보니 동네 친구와 하교하곤 했는데, 하필이면 친구가 땡땡이를 쳤었다.

혼자 집으로 가는 경우에는 집까지 좀 더 걸리더라도 돌아가곤 했었다.

그런데 사건은 나기 마련이라고, 그날따라 배가 아팠던 나는 어쩔 수 없이 나무 터널길로 향했다.

시골의 밤 11시는 매우 고요하다.

어느 정도냐면 갑자기 튀어나오는 사람보다 귀신이 더 자연스러울 정도다.

무겁게 가라앉은 밤공기를 드문드문 늘어선 가로등이 음침하게 비출 뿐이다.

그 누런 빛은 겁이 많은 이의 위안이 되지 못한다. 뿌옇게 흩어지는 가로등 아래에 아지랑이라도 피어오르면 기절하고 싶은 정도로 무서워지기 때문이었다.

아무튼 아무 생각 없이 나무 터널에 진입했다. 화장실이 급했으므로.

그 순간부터 산비탈 쪽에서 '바스락' 나뭇가지가 부서지고, 마른 풀잎이 바스러지는 소리가 들렸다.

걸음을 잠깐 멈추었다.

뭐, 고양이나. 들개겠지. 그게 아니면 들쥐거나. 작은 소리에도 한껏 예민해졌지만, 일부러 무섭다는 생각을 떨쳤다.

다시 걷기 시작하는데 또, 바스락, 바스락.

분명 바로 옆 산등성이에서 소리가 났다. 그런데 목에 깁스한 것도 아닌데 옆을 돌아볼 수가 없었다. 도대체 무엇일까? 고개를 조금만 돌려도 바로 보일 정도로 가까운 곳에서 소리가 났다. 아니 어쩌면 내 왼쪽 시야 끝에도 걸릴 것만 같았다. 순간 별의별 생각이 다 들었다.

이놈은 뭐지? 범죄자인가? 귀신인가? 동물인가? 소리를 지르면서 그대로 내달릴까? 아니면 재빨리 뒤로 돌아 학교로 돌아갈까? 내가 갑자기 돌발행동을 하면 훅 튀어나와서 덮치는 게 아닐까? 식은땀이 났다.

그러다 나는 눈치챘다. 내가 걸음을 멈추면, 바스락대는 소리도 따라서 그친다는 것을.

눈치 없는 배는 또 아파지기 시작했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아무렇지 않은 척 다시 걷기로 했다.

아니나 다를까 또다시 바스락바스락 댔다.

불행 중 다행인 것은 이 길은 그리 길지 않았다. 터널 끝에는 가로등이 있었다.


타닥, 타닥

바스락, 바스락

타닥, 타닥

바스락, 바스락

탁, 탁, 탁, 탁,

바삭, 바삭


터널 끝이 가까워질수록 조금씩 빨라지는 내 발걸음에 맞춰, 바스락대는 소리도 점점 속도를 올렸다.

놈인지, 녀석인지 알 수는 없지만, 나와의 거리를 좁혀오는 것 같은 느낌이 들어서 아예 왼쪽 눈은 감아버렸다. 막판에 가서는 눈물도 조금 맺혔던 것 같다. 체력장 때처럼 가슴이 쿵덕대고, 그 와중에 아픈 배도 참느라 이마에 식은땀이 맺혔다. 뛴 것도 아닌데 다리의 힘이 풀려서 그대로 주저앉을 것만 같았다.

그래도 빠르게 걸었다. 지금 생각하면 그냥 소리를 빽빽 지르면서 뛰었을 걸 그랬다.

하지만 그때의 나는 그런 생각을 하지 못했었다.

아무튼 그렇게 터널을 벗어났을 때, 바스락대는 소리가 멈추었다.

그리고 바람이 뒤에서 훅하고 불었다.

목덜미의 땀이 식으며 뒷골이 서늘해졌다. 그리고, 나는 들었다.

낮게 킬킬대는 소리를.

그것은 겁에 질린 학생이 도망치는 모습이 우스워 비웃는 소리였을 지도

아니면 나의 착각이었을 지도

단순히 나뭇잎끼리 바람에 부딪치는 소리였을지도.

그리고 당연한 결과였을지 모르지만, 그 길은 두 번 다시 이용하지 않았다.


그렇게 고향을 떠나고, 몇 년 만에 다시 찾아가 보니

길 한쪽 빽빽하던 나무들은 모두 베어져 있었다.

왜 그렇게 되었는지 궁금하지도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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