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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커오 Jun 20. 2019

고양이, 잠

잠 못 이루는 밤: 고양이를 빌려드립니다

고양이는 생의 3분의 2를 잔다고 한다.

삶이 곧 잠인 셈이다. 깨어 있는 쪽이 부속이다. 반면 인간인 나는 어떤가. 고양이와 달리 대부분의 인간들은 잠을 더 자기보다는 잠을 덜 자기를 요구받곤 할 것이다. 나 또한 한 인간으로서 그러한 현상에 편승해 왔을지도 모르겠다.


- 수면장애네요.


저, 그래도 잠을 못 자는 건 아닌데요, 처음 진단을 받았을 때 무심코 내 입에서 튀어나온 대답이 그랬다. 쉽게 잠에 들지 못하거나, 아니면 일어나기가 힘들거나, 때로는 쉬는 날에 잠을 몰아 자기는 했지만, 어쨌든 나는 한 번 잠이 들면 끊임없이 울리는 알람에도 불구하고 깨지 못했기 때문에, 그 날따라 종종 들어본 적 있는 그 단어가 몹시 생소하게 들렸다.


의사는 내 수면의 질이 매우 좋지 않다는 사실을 거듭 강조하며 생체 리듬, 생활 패턴, 내 몸에 투입되는 하루분의 카페인의 종류 및 총량 일색을 확인한 후, 생체 호르몬과 가장 유사하다는 수면 보조제를 처방했다. 패턴을 돌려 놔야 해요. 잠에서 깨서 개운하다, 그런 느낌 느껴 본 적 있어요? 대체 잠에서 깬 사람이 어떻게 개운할 수 있다는 말일가. 나는 보조제가 든 작은 약 봉투를 들고 집에 돌아오면서 의사와의 대화를 복기해 보았다.


현관 문을 열자, 여느 때처럼 나의 고양이들이 잠에서 깬 가뿐한 얼굴로 기지개를 켜고 있었다.




그 시기에 나는 양질의 잠을 자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다.


소파 위는 고양이가 좋아하는 잠자리 중 하나다.


며칠 간은 완전히 커피를 끊어 보았다. 당시 나는 학생이었는데, 하루가 지나자 다음 날부터 수업 내용은 물론이거니와 무슨 요일이어서 무슨 수업을 들었는지조차 헷갈리기 시작했다. 교정을 걷고 있으면 주변에 뿌옇게 안개가 끼어 있는 것 같아, 둥둥 뜬 느낌이 마치 꿈 속에 있는 기분이었다. 그렇다고 낮의 혼미함을 말미암아 밤에 잠이 드는 것도 아니었다. 밤마다 야행성이라고 하는 나의 고양이들은 소파에서 색색, 하는 고른 숨을 쉬며 잠에 빠져있는데, 주행성의 인간인 나는 뜬 눈으로 침대 위와 책상 앞을 오갔다.  


결국 삼 일 만에 내 몸에는 다시 카페인이 돌게 되었다. 딱 한 잔만요, 딱 한 잔. 한 잔을 강조한 의사 덕에 나는 아침이나 낮에 늘어지게 자고 있는 고양이들 옆에서 한 잔 분량의 커피를 타 마시는 것이 낙이 되었다. 보조제는 잘 들었지만 여전히 수면 상태는 엉망이었고, 수면 패턴이라도 잡아보자는 심정으로 나는 수면에 도움이 된다는 어플리케이션까지 설치하기에 이르렀다. 수면의 질을 측정해 얕은 잠일 때 알람을 울리는 앱 A와, 목표 시간에 맞추어 잠들고 일어났을 때마다 가상의 건물을 보상으로 세워주는 앱 B. 이들을 아군 삼아 잠의 세계를 진두지휘할 수 있을 것이라는 나의 기대와는 달리, 나는 A를 통해 내 수면의 질이 평균 60%가 채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밝혀냈고, B를 통해서는, 글쎄. 부서진 건물만을 잔뜩 지어 놓게 되었다.




내가 이렇게 잠과의 사투를 벌이는 와중에도 나의 고양이들은 놀라우리만치 잘 잤다. 내가 끝내 숙면을 포기하고 일상으로 돌아갔을 때도 보란듯이 쿨쿨 잠을 자고 있었고, 내가 학교를 떠나 직장인이 되었을 때도 어김없이 잠에 빠져 들었으며, 직장을 그만두고 쉴 때조차 수마에 못 이겨 나른한 눈빛을 보내고 있었다. 그 때문에 나는 일어나야 해서가 아니라 잠든 고양이의 눈치가 보여서 울린 지 한참 된 알람을 황급히 끄곤 했다. 고양이들이 나 대신 자는 게 아닐까, 생각하던 때, 나는 아주 잠꾸러기처럼 보이는 세 번째 고양이를 우리 집에 들이게 되었다. 우습게도 그 고양이의 잠든 사진에 퍽 반해버려서였다.


세상 모르고 자는 모습에서 이 고양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면 운명일까.


그러나 세 번째 고양이의 등장과 함께 그나마 제 리듬을 찾는 것처럼 보이고 있던 수면은 또다시 위기를 겪게 되었다. 한 번 깨진 패턴은 아무리 돌려 놓아도 쉽게 망가져 버린다. 아직 아기 고양이었던 탓에 세 번째 고양이는 잠을 자거나 나를 찾거나 뭐든 엉망으로 만들거나 했고, 나는 도무지 그녀에게서 눈을 뗄 수가 없어 가뜩이나 못 자는 잠도 줄일 판이었다. 게다가 덤으로 나와 다른 고양이를 매섭게 감시하는 두 번째 고양이까지. 둘 사이 샌드백이 되어 까무룩하게 잠이 들려다가도 금세 일어나 고양이들이 잘 있나 확인을 거듭했으니 잠의 질이 좋을 리가 없었던 그 때, 바로 그 무렵이었다. 나는 우연히 깜빡 잠이 들었다가 새벽에 눈을 떴고, 마침, 두 고양이가 내 침대 옆자리에서 함께 잠들어 있는 광경을 보게 되었다. 


당시의 장면은 죽기 전에 스쳐 간다는 인생 장면 베스트10에 들어도 손색이 없다.  


새벽 6시가 채 되기 전이었는데도, 잠든 내 고양이들을 보면서 나는 처음으로 잠에서 깨어 개운한 기분이 들었다.




나의 고양이들은 나의 수면장애를 치료해 주었을까. 안타깝게도 현실은 그렇지는 않은 것 같다. 그 이후로 일어났을 때마다 개운하거나, 수면 패턴이 완전히 돌아왔다거나 하는 마법은 일어나지 않았으니 말이다. 하지만 그 날의 경험 덕분에, 그 후로 나는 고양이들과 함께 아주 많이 자게 되었다. 신기하게도 그 후로 쉬이 잠이 들지 못할 때 졸고 있는 그들을 쓰다듬거나, 자고 있는 그들 옆에 누워 있노라면 나 또한 비교적 빨리 잠을 청할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이제는 고양이를 위한 수면 음악을 함께 듣고 있다가 나만 덩그러니 잠에 드는 일도 부지기수다.


혹자는 고양이의 그릉거리는 소리, 그리고 따스한 촉감이 숙면에 도움을 준다고 한다. 나는 아직도 엉망인 수면 습관을 갖고 있고, 보조제의 도움도 종종 받는 정도의 수면 상태를 유지하고 있는 중이다. 하지만 더 이상 수면 패턴이나 습관에 집착하지는 않게 된 데는, 잠이 오지 않을 때, 잠이 걱정일 때조차 태평한 얼굴로 늘어지게 잠을 자고 있는 고양이들이 있기 때문이 아닐까. 그래서 나는 고양이를 권하고 싶다. 잠에 들지 못하는, 나처럼 잠이 걱정인 모두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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