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심이 있으면 기억하고 싶다: 내가 기억하는 내 삶의 모든 고양이들
기억력이 좋으냐, 는 질문에는 쉽게 망설여지곤 한다.
이상하게도 다른 질문-먹는 걸 좋아하는지, 상상력은 좋은 편인지-와 같은 종류의 질문들은 여전히 익숙하지 않지만서도 쉽게 대답할 수 있다. 그렇지만 기억력에 관해서는 어디서부터 이야기하면 좋을지 모르겠다. 단순히 무언가를 외우는 암기력에 관한 것인지, 지나간 사건의 단편을 끄집어 낼 수 있는 능력에 관한 것인지. 전자라면 자신이 있지만, 후자라면 어떤지, 어떤 기억에선 자유롭지만 어떤 기억에선 여전히 벗어나지 못하는 나는, 스스로 도저히 대답을 알 수 없다.
그렇지만 대답과 별개로, 기억이란 우습다는 것이 요컨대 나의 감상이다. 자주 들른 지 오래 되지 않은 카페의 종업원에게는 나를 기억하길 하는 작은 바람이 있지만, 아주 오래 된 동창생에게선 나를 기억해주지 않아도 정말이지 괜찮은 안도감. 그런 감정들이 기억이라는 것의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첫 번째 고양이의 두 번째 기일을 얼마 남기지 않은 시점이었다. 나는 그를 다시 떠올려봤다. 기억의 끝에서 마주친 감정은 당황스러움이었다. 그의 연한 베이지색 부드러운 긴 털과 호박색 눈, 귀가했을 때 건네어 오는 상냥한 눈빛, 놀이용 낚싯대 끝에 매달린 장난감보다 낚싯대의 줄에 호기심을 보이던 그의 귀, 그리고 그 밖의 잊지 않고자 노력해 온 많은 것들이 내 기억에서 사라져 있었다. 써 놓은 채 한 번도 열지 않았거나 열지 못했던, 그를 보내고 이틀 후에야 그를 잊지 않기 위해 써 놨던 메모를 황급히 펼치자 기어이 눈물이 흘렀다. 기억하고 싶은 것, 현재를 살기 위해 기억하고 싶지 않아야만 했던 것, 그런 많은 것들이 기록 속에 있었다.
때때로 나는 내가 삶에서 만났던 많은 것들을 잊어버리지는 않을까 걱정한다.
고양이에 대한 나의 최초의 기억은 아주 어린 나이에 시작됐다. 친척 집의 아주 똑똑한 고양이. 고양이와 나는 줄곧 잘 어울렸고, 마음 좋은 친척과 낯선 환경을 가리지 않았던 고양이의 성격 덕분에 종종 그 고양이는 우리집에 하루 내지 이틀 정도 머물렀다 돌아가곤 했다. 얼마 후, 고양이가 집을 나갔다는 소식에 나는 매우 상심하고 말았는데, 성인이 된 후에야 발정을 견디기 힘들어하는 고양이를 다른 집에 보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지금처럼 고양이와 함께 사는 일이 흔하지도, 따라서 중성화를 권하는 일도 잘 없었던 때였다. 친척과 함께 살던 고양이지만 나는 그녀를 퍽이나 좋아했고, 고양이를 좋아하던 아이는 쉽사리 고양이를 좋아하는 청년으로, 그리고 고양이 없이는 못 사는 성인으로 자라게 되었다.
또다른 기억은 십대 봄 무렵에 만났던 턱시도 무늬의 고양이였다. 그 때 나는 나의 첫 번째 고양이와 함께 살고 있었지만, 집 앞 화단에서 떨고 있었던 아직 새끼인 그를 모른 척 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그를 책임질 여력은 없었기 때문에 나는 종종 밥을 가져다주었고, 그도 쉽사리 그 근방을 떠나지 않고 곁에 머물러 주었다. 나 외에 운 좋게도 많은 따뜻한 사람들이 그와 함께한 덕에 그는 무럭무럭 자라 어엿한 성묘가 됐고, 어디선가 노란 암고양이를 데려오기까지 했다. 그리고 그는 가을 무렵에 돌연, 내가 여행을 간 사이 교통사고가 났다고 했다. 누군가가 그를 묻어 주었다 했고, 노란 암고양이는 그 해 겨울 새끼 고양이를 데려왔지만, 금방 둘 다 자취를 감췄다.
이듬해 봄, 나는 그 해 겨울에 많은 고양이가 동사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나의 책임 하에 있지 않았던 고양이의 부재에도 나는 외로웠지만, 나의 책임이 반 정도 머물렀던 고양이와의 이별 앞에서 나는 더욱 견디기 힘든 슬픔과 부채감, 그런 것들이 뒤섞인 덩어리진 감정과 마주해야만 했다. 그리고 오롯이 내가 책임졌던 고양이의 빈 자리에서, 나는 기어이 무너져 내렸다.
그렇지만 역설적이게도, 기억이란 우습다는 나의 감상처럼, 그런 기억들이 나와 고양이들의 많은 만남을 가져다주었다. 그 뒤로도 나는 짙은 고등어, 삼색이, 노란 태비 남매, 덩치 큰 턱시도, 희고 예쁜 암컷, 함께 다니는 세 삼총사, 그리고 그 밖의 많은 고양이들의 기억을 갖게 되었다. 영영 채워지지 않을 것 같던 첫 번째 고양이가 비워낸 자리에는 세 번째 고양이가 왔다. 첫 번째 고양이처럼 긴 털을 가졌지만 연한 베이지색이 아닌 짙은 밤색의 털을 가진 그녀는 종종 무심코 이전의 그와 비슷한 행동을 하고는 한다. 그럴 때마다 나는 그녀에게 깊은 애정을 느끼며 그의 기억을 꺼내곤 한다.
나와 함께 했던 그들의 기억 속에도 내가 있다. 언젠가 나는 내가 만났던 내 삶의 모든 고양이들을 기억하기 위해 기록을 해야 한다는 강박에 시달리기도 했다. 그들을 만난 장소, 그들의 특징과 행동, 그 밖의 많은 것들을 나는 한시도 잊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몇 번인가의 시도 끝에 이내 나는 그만두었다. 나의 첫 번째 고양이를 떠올리다 찾았던 메모의 내용과 같이, 나는 생각보다 그들의 많은 부분들을 기억하고 있었고, 사진이나 그 밖의 많은 기록 속에 보관하고 있었다. 보채지 않으면 언제든 금방 찾아낼 수 있는, 책장에 오래도록 꽂혀 있는 빛바랜 책들처럼.
기억력에 대해 이야기하다 보니, 일전에 고양이의 기억력에 대한 글을 읽은 기억이 난다.
여러 접시에 고양이들에게 밥을 주고 15분 뒤 그들이 자신의 그릇을 기억하는지 실험한 결과, 고양이의 기억력은 15분 이상이라고 했다. 나는 그만 웃고 말았다. 이 사람들, 고양이가 바보인 줄 아네. 내가 기억하는 그들은 꽤나 기억을 잘 하고, 내 생각보다 많은 것들을 잘 잊어버리기도 한다. 그들도 아마 질문을 받으면, 도대체 어떻게 대답하라는 건지 모르겠잖아, 하고 말하지 않을까. 고양이에게 너는 기억력이 좋은 편이니, 하고 물어본다면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