뻔뻔하게 사는 법: 연기하는 나, 유희하는 고양이
7년 전, 나는 연인 관계를 지속하기 위해 나의 불만을 모른 척 했다.
그 덕분에 연인 사이의 갈등은 눈에 띨만치 쉽게 줄어들었다. 당시 나의 연애 상대도 나의 그러한 상태에 꽤나 만족한 눈치였다. 그렇지만 결과적으로, 그로부터 그 연애는 어처구니 없이 빠른 속도로 끝이 났다. 내가 모른 척 하기로 결심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서의 일이다. 연애를 시작하는 데보다 끝내는 데 드는 기회비용은 터무니 없이 적었고, 당시의 나는 그마저도 모른 척 하기로 결심했다. '척'의 연속이 일상이었던 때였다. 그만큼 나는 지쳤고, 여러모로 삶을 연기하는 건, 정말이지 제대로 사는 것보다 편했다.
새로운 연애를 시작하고, 그로부터 한참 후에야 나는 깨달았다.
상처 받지 않기 위한 나의 연기가 얼마나 어설펐던지를.
나는 연기하는 데 익숙한 편이다. 솔직히 말하자면 겉과 속이 반대일 지경이다. 당신 말 그대로 작성한 기획안을 수정하라는 상사에게 서류를 집어 던지고 싶은 충동 대신 정중한 수용의 응답을 건네고, 안 그래도 바쁜 길에 목적지를 묻는 행인을 나몰라라 하는 대신 친절하리만치 자세히 지리를 알려 준다.
이런 나의 모습을 본 지금의 연인은 나를 한 마디로 일축시키기도 했다. 너, 진짜 뻔뻔하다, 진짜로.
이처럼 뻔뻔하기가 이루 말할 데 없는 나에게 있어, 나를 포함한 전 인류와 동물이 척 하기를 통해 생존해 왔다는 점은 정말이지 주목할 만한 일이다. 동물들은 풀이나 숲 같은, 또는 모래로 뒤덮인 사막 같은, 그도 아니면 자연의 그 어떤 색을 몸에 둘러 지금 여기에 없는 척 할 줄 안다. 나 또한 먹고 살기 위해 내 낯빛 정도쯤은 조절할 줄 아니 제법 생존 능력이 괜찮은 셈이다. 또, 어떤 동물들은 포식자 앞에서 얼마든지 죽은 척 열연을 펼치고도 자존심 상해 하지 않는다. 나도 매일 매일을 죽은 듯 산 듯 살고 있으니 비슷하다고 말하고 싶지만, 사실은 좀 자존심이 상하는 게 사실이다. 왜냐하면, 문명화된 인류 모두가 그러하듯, 나의 연기는 오직 내 마음의 생존을 위해서이기 때문이다.
고양이와 함께 살다 보면, 고양이야말로 척 하기 위해 태어난 존재들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종종 하게 된다. 고양이란 여간 뻔뻔한 존재가 아닐 수 없다고 전 세계에 소리라도 치고 싶은 심정이다. 나와 함께 살고 있는 마당에 자신의 생존을 몸소 지켜야 할 필요는 없을텐데도 그들은 끊임없이 어떤 척을 한다. 그 이유도 인간과 유사한 범주에서부터 알 수 없는 범주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것 같이 보이니, 짐짓 모른 척하며 곁을 지나가는 내 고양이들에게 나도 한 마디 할 수밖에 없어지는 것이다.
너희들, 진짜 뻔뻔하다, 진짜로.
나의 두 번째 고양이는 아닌 척 하기의 달인이다.
아닌 척이라 하면 으레 사냥감을 놓치거나 높은 곳에서 실수로 떨어졌을 때 보이는 고양이라는 종 특유의 겸연쩍음을 생각할 수 있겠지만, 나의 두 번째 고양이는 좀 더 복잡한 수준의 아닌 척을 구사하고는 한다. 그녀는 누워 있는 나에게 다가와 몸을 부딪혀 올 때도 아닌 척을 하고, 내가 몸을 돌려 껴안아 줄 때도 기쁘지 않은 척 고개를 휙 돌려 버리기 일쑤다. 그녀의 목울대를 울리는 그릉그릉 소리가 행복을 감출 수 없는데도 그녀는 기어코 아닌 척을 한다. 놀아달라고 보챌 때조차 최대한 사냥용 장난감은 쳐다보지 않아야 하고, 식사를 요구할 때에도 나는 지금 막 이거 먹으려고 했는데, 하는 듯이 다른 밥 그릇에 입을 댄다.
반면, 나의 세 번째 고양이는 항복한 척 하기의 달인이다.
이 항복은 정말 말 그대로의 항복인지라, 한껏 과장된 몸짓으로 몸을 빠르게 뒤집어 배를 보여야만 하는, 고양이로서는 여간 번거롭지 않을 수 없는 행동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가족 중 누군가에게 혼날 때, 또는 사냥용 장난감을 쫓아가다 잡을 수 없을 것 같을 때, 부단히 항복, 항복, 하는 느낌으로 배를 보여준다. 가장 빈번하게는, 한참 나이 차이가 나는 두 번째 고양이가 조금이라도 자신을 귀찮아 하는 눈치면 어김없이 그녀보다 두 배 가까이 큰 몸집을 뒤집어 항복한 척을 하니, 아주 가끔은 눈물겨워 보이는 척이 아닐 수 없다.
척 하는 두 고양이가 만난 덕에, 나는 매일같이 아주 재미 있는 광경을 본다.
함께 놀고 싶으면 한껏 보채는 세 번째 고양이와는 달리, 두 번째 고양이는 세 번째 고양이 곁을 아닌 척, 지나가며 늘 딱히 놀자는 건 아니지만, 같은 느낌으로 놀이 신호를 보내곤 한다. 이 신호가 아주 잘 먹히면 세 번째 고양이는 후다닥 사냥 자세를 취해 그녀를 쫓아 가는데, 그러다 그녀가 뒤돌아 쏘아 보면 배를 벌렁, 뒤집어 항복한 척을 하는 것이다. 그러고는 다시 아닌 척 달려가는 두 번째 고양이와 그녀를 뒤따르는 세 번째 고양이의 추격전, 그리고 항복의 반복.
이러니 하루 온종일 인간 세계에서 연기를 일삼다 돌아오는 나일지라도, 그들의 척에 웃어 버리고 마는 것이다.
마음을 위해 연기하는 나와는 달리, 고양이들의 척 하기에는 실로 다양한 이유가 있는 것 같다.
감정을 표현하려고, 요구를 받아줬으면 해서, 장난을 치고 싶어서. 이런 수많은 이유 중 사실 많은 경우를 차지하는 경우는 놀랍게도 그냥, 그냥인 것 같다. 어쩌면 척 하기가 놀이인 것처럼 보일 정도의 그냥. 인간인 내가 미루어 짐작하기에는 그들만이 아는 이유가 있을지도 모르겠지만, 그들과 함께 살며 이런 저런 척을 겪다 보면 그렇게밖에 설명할 수 없는 기분이 든다. 그리고 그런 그들에게 나 지금 다 알아, 네가 척 하고 있는 거. 라는 티를 내도 그들은 뻔뻔한 표정으로 나를 돌아보고는 하는 것이다. 그게 어때서? 나는 이렇게 재미있는데.
최근 나의 연인은 연기하는 나를 보며 이제 뻔뻔한 거 숨기지도 않네, 하고 웃은 적이 있다.
그 웃음에 나는 왠지 모를 안도감이 들었다. 상처받고 싶지는 않으니까, 상처를 피하는 나조차도 티를 내면 안 된다고 생각했던 나의 연기가 들킨 순간, 그대로도 뭐 어때, 하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마치 고양이처럼 되어 버렸네, 하며 나 또한 함께 웃었다.
지금 나의 연기를 고양이들은 인정해줄까. 아직도 인간 세계에서 몸과 마음의 생존을 위해 아등바등 노력하는 나지만, 적어도 상처를 피하기 위해 척 하지 않는 그들처럼 나 또한 언젠가는 척, 할 수 있기를. 매일같이 인간 세계에서 마음을 지키고 싶은 나는 오늘도 소망하는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