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년을 살며 자동차에 대한 관심은 조금도 없었다. 내게 차란 타기만 하면 졸린 것,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면허도 따지 않겠노라 고집스레 우겼다. 서울에선 차 없이도 어디든 편히 갈 수 있으니까. 무엇보다, 이 좁은 땅 위에 기어코 내 차까지 얹고 싶지 않았다.
그랬던 내게 새로운 취미가 생겼다. 그건 바로 운전이다. 머쓱하다. 생에 34년째 접어들어 서울을 떠나 살 줄 누가 알았겠나. 시골살이에 운전은 필수라 제주로 이주하기 직전에 면허를 땄는데, 막상 운전을 하고 보니 재미까지 있었다. 일찍이 내게 운전하면 잘할 것 같다거나, 틈만 나면 어딘가로 쏠 게 분명하다고 예언한 자들이 더러 있었다. 그땐 그들의 말을 듣는 둥 마는 둥 했는데. 여러분의 예감은 틀리지 않았다.
지구에 새 차 하나를 추가하는 것보다야 중고차를 사는 게 낫겠다 싶어 중고차 매매 어플을 몇 날 며칠 뒤졌다. 물론 신차에도 관심 없던 내게 중고차 시장은 그야말로 끝없는 미로나 마찬가지였다. 금액을 어느 정도 선으로 할지, 디젤과 가솔린 중 어떤 것을 택할지, 어떤 브랜드가 좋을지. 농기구나 서핑보드 실을 걸 감안해 좀 큰 차를 사는 게 나으려나. 가솔린보다는 전기차나 하이브리드 쪽에 관심이 더 가는데 중고차로는 매물이 많지 않군. 그런데 이 차는 과거에 어떤 삶을 살았을까? 고질병이 있다면? 아참, 제주도까지 차를 어떻게 받지? 결국 제주도에서 중고차를 사야 하나? 아... 중고차는 나처럼 귀찮은 게 세상에서 제일 귀찮은 사람에겐 호락호락 자신을 내어주지 않았다.
그러던 와중에 먼 길 떠나는 딸에게 해줄 수 있는 건 이것뿐이라며 덜컥 새 차를 사주겠다는 엄마를 막기는커녕 넙쭉 고맙습니다. 잘 타겠습니다. 역시 하이브리드가 좋겠군요, 하고 지금의 차를 선물 받게 된 것이다.
처음 요가원 앞에서 새하얗게 빛나는 내 차를 보신 선생님 목소리가 지금도 또렷이 들린다. "제주도에 이주하면서 새 차를 샀어~? 그것도 초보운전자가~?" 그때 알았다. 엄청난 것을 간과했다는 걸. '제주도'에서 '초보운전자'가 '새 차'를 사다니. 에이, 뭐 별 일이야 있겠어요.
얼마 지나지 않아 별 일이 생겼다. 차의 전면 하부가 조금 구겨진 일. 여기저기 튀어나온 제주 돌담을 미처 보지 못 하고 주차한 탓이다. 제멋대로 생긴 현무암에 차가 구겨지는 소리는 내 뼈가 부러지는 것만큼이나 또렷이 들렸다. 꽤 소름 끼쳤다. 처음 겪은 일이라 당황하던 찰나, 앞으로도 뒤로도 가지 못 하는 나를 가엾게 여긴 행인 삼춘이 차를 빼주셨다. 비록 차는 조금 찌그러졌지만 다행히 마음까지 타격을 입진 않았다.
또 어느 날은 인가에 있는 미용실 옆 골목길에 주차했다가 차 옆구리가 움푹 파인 일도 있었다. 한밤중에 뺑소니를 당한 걸 며칠 후에야 알았다. 심지어 둔감한 나는 못 보고 지나친 그 상처를 동거인이 발견하곤 나보다 더 격분해 한참이나 블랙박스를 뒤져 범인을 찾아냈다. 하지만 칠흑같이 어두운 밤, 범인을 잡을 단서라곤 검은색 차체뿐이었다. 주변엔 CCTV조차도 없었다. 파출소에 가 잘 좀 찾아봐주십사 부탁드려봤지만 끝내 연락은 오지 않았다.
호기롭게 전면 주차하다 보기 좋게 범퍼를 긁어먹은 일도 있다. 흙바닥을 뛰어놀다 넘어져 턱에 벌건 스크래치가 난 초등학생 같다고 자주 생각한다. 그 사건으로 전면 주차의 위험성을 깨닫고 후방 주차만 고수하고 있다.
급기야 며칠 전엔 또 한 번의 주차 뺑소니를 당했다. 그날따라 극장에서 영화가 너무 보고 싶어 서귀포 월드컵경기장 야외 주차장에 주차를 하고 롯데시네마로 향했다. 이제 막 어둠이 내려앉은 저녁이었다. 서귀포 롯데시네마는 초행이라 헤맨 끝에 겨우 찾고는 ‘참 멀리도 주차했네, 쯧쯧’ 하며 상영을 기다렸다. 그런데 아뿔싸, 영화가 시작되기 10분 전 중요한 일이 생각나 다시 차로 달려가 급히 노트북을 열었는데. 곧 낯선 이가 똑똑 창문을 두드렸다. "저, 혹시 누가 연락처 남기고 가지 않았어요? 방금 전에 트럭이 차 박고 갔는데." 잠시 상황 파악이 안 돼 눈을 껌뻑이다 차에서 내려 살펴보니 연락처 따위는 없고 방금 전까지 보이지 않던 보조개가 운전석 문에 깊게 파여있었다. 언뜻 보기에도 이전 사고보다 훨씬 깊은 상처였다. 덩달아 검은 흔적이 남은 사이드미러는 열고 닫을 때마다 옅은 신음을 내뱉기까지 했다. "고맙습니다. 말씀해주시지 않았으면 모르고 지나칠 뻔했어요." 그건 그렇고 하던 일이 급해 서둘러 마무리하고 김혜수 배우님이 기다리는 상영관으로 부랴부랴 달려갔다. 그래 나는 바보다. 가까운 주차장까지 차를 타고 가면 됐을 텐데.
영화를 보고 난 후 같은 길을 네 번째 걸으며 시원한 가을바람을 맞았다. 극장 개봉작 중엔 오랜만에 볼만한 영화였다. 그 여운을 안고 1시간 여를 달려 집으로 돌아갔다. 이번에도 감정에 큰 타격은 없었다.
이튿날, 정신을 차리고 블랙박스부터 확인했다. 영화 시작 시간 언저리의 영상을 뒤졌더니 한 트럭이 후진을 하다 내 차를 박는다. 덜컹, 주춤. 그리고 끝. 괘씸한 자다! 어둠 속 실루엣으로 트럭이라는 것 외에 단서를 찾긴 어려웠다. 다시 파일을 뒤져 내가 주차할 때의 영상을 살폈다. 오호라! 내 차 전조등이 맞은편 차들을 한 번씩 훑고 자리를 잡는데, 괘씸한 차주의 트럭 번호판이 연극 무대에서 빛을 받듯 극적이고 또렷하게 드러났다. 내 손으로 범인을 찾다니! 상당히 뿌듯했다. 나는 번호가 정확히 보이는 화면을 캡처했고, 해당 영상과 함께 내 차가 해를 입는 영상, 차량 손상 부위의 사진 여러 장, 주차 위치를 표시한 지도 앱 화면까지 캡처해 USB에 담아 한 시간 거리의 서귀포경찰서로 향했다. 이번에는 모든 것이 완벽했다.
사고 접수 후 며칠이 지나자 피의자의 보험설계사로부터 연락이 왔다. 상당수 도민들이 운전자보험을 들지 않고 운전한다 들었는데, 일이 복잡해지지 않아 다행이었다. 덕분에 차량 파손 부위 수리비용과 수리 기간 렌트비용을 지원받아 하루 만에 말끔히 치료할 수 있었다. 그보다 오래된 상처는 여전히 남아있지만.
제주에서 새로운 취미를 위해 감수해야 할 위험부담이 이렇게나 많다. 내 부주의 때문이기도 하지만 거칠고 뻔뻔한 아무개 씨들의 처사까지 감당하려면 앞으로도 몇 번은 사후 비용과 시간을 지불해야 할 것이다. 그럼에도 운전을 단순 생존 수단이 아닌 취미라 격상시킨 이유는, 그만큼 내 마음과 많은 시간 동행해주었기 때문이다.
처음 제주에 적응하지 못하고 어떻게든 돌파구를 찾으려 했을 때, 나는 종종 집에서 1시간 20분 거리의 표선면 가시리로 향하곤 했다. 그곳엔 오래된 쉼터 타시텔레가 있다. 뿐만 아니라 가시리 특유의 차분한 분위기를 나는 좋아한다. 제주 서쪽에 있는 집에서 동남쪽에 위치한 가시리로 가는 중산간로는 줄곧 한라산의 안내를 받으며 쭉 뻗어 있다. 가는 내내 구간단속이라 속도를 내고픈 욕심이 샘솟지만 눈높이로 한라산이 보이는 구간에 접어들면 이내 엄숙해져 두 눈으로 수 백 장의 사진을 찍게 된다.
어느 날은 타시텔레에 머물다 저녁 무렵 집으로 돌아가게 됐다. 그날은 코앞도 보이지 않을 정도로 안개가 짙었다. 비상 깜빡이를 켜고 천천히 중산간로를 달리는데, 내차의 불빛과 저 멀리 보이는 불빛의 반복적인 하모니에 묘한 동질감을 느꼈다. 나는 마음속으로 전했다. 우리 무사히 이 길을 지나자고.
가슴이 뻥 뚫리는 경험은 높은 지대에서 해안가로 향할 때 어김없이 찾아온다. 넓은 도로는 모른 척 속내를 감추며 시치미를 떼다 한순간 눈앞에 바다를 펼친다. 그것이 바다라는 걸 보고도 믿지 못할 때가 많다. 그러다 문득, '아, 나 제주에 살고 있지?' 하고 깨닫는다. 눈부신 태양이 수면 위로 내려앉은 시간이라면 감회에 젖어 눈가가 촉촉해지는 걸 막을 도리가 없다.
해질 무렵 귀가 중이라면 습관처럼 하늘을 살핀다. 날이 맑다면 핸들을 꺾어 집 근처 수월봉으로 향한다. 일몰을 놓치고 싶지 않아서다. 태양이 수놓은 광경은 늘 표현할 수 없는 경외감을 주고는 순식간에 사라진다. 다시없을 하루가 허무하리만치 빠르게 지나간다. 그제야 지금 이 시간의 소중함을 인식한다.
가끔은 내비게이션을 켜지 않고 아무 길로나 들어서 보기도 한다. 서두를 것 없이 원한다면 언제든 탐험할 수 있다는 건 그만큼 내게 여유가 생겼다는 반증이라 의미가 깊다. 설레는 마음으로 정감 어린 골목을 굽이굽이 지나다 보면 뜻하지 않은 장소를 발견하기도 한다. 그렇게 머무는 곳은 괜스레 더 포근하게 느껴진다.
친구들이 제주도에 놀러 올 때 공항으로 마중 나가는 일도 꽤나 즐겁다. 운전하는 것도 재밌는데, 목적지에 도착하면 보고 싶었던 친구들이 기다리고 있다니! 이 어찌 신나지 않을 수 있겠나. 물론 집에서 공항까지의 한 시간 거리가 짧다고는 할 수 없다. 그래도 문제 될 건 없다. 드라이브용 음악 리스트를 크게 틀고 달리면 평화로도 지루하지만은 않다. 때때로 시내 다녀오는 길에 졸음이 쏟아지면 평화로 비상 정차대에 차를 세우고 잠시 잠을 청하기도 한다. 그게 또 꿀맛이라서.
내 차에는 항상 필름 카메라가 동승한다. 나와 내 차만 발견할 수 있었던 그 무수한 장면들을 조금씩 기록해두기 위해서다. 어쩌면 우리의 여정이 더 근사한 취미가 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이제 8개월이 지났으니 남은 한 계절도 부디 무사하고 찬란하게 흐를 수 있기를 바라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