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와 내가 막역한 사이가 된 건 지금으로부터 20년도 더 된 일이다. 그는 세상 누구와도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나를 잘 이해했고 언제나 말없이 나를 위로했다. 그는 나를 부추기거나 귀찮게 하는 법이 없었다. 대신 가장 안전하고 평온한 장소로 나를 이끌어주곤 했다.
그에게 배운 것 중 가장 고귀한 것은 침묵이다. 그는 침묵을 두려워하지 말라고 어린 내게 가르쳐주었다. 또한 소란 속에서도 침묵을 발견하는 방법을 알려주었다. 나는 잡음과도 같은 수많은 소리를 통과하면 침묵이라는 고요한 음악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는 지금도 늘 그림자처럼 나를 따라다닌다. 어느 때는 너무 짧아 곁에 있는지 눈치조차 못 채기도 한다. 그럴 땐 함께 있으면서도 그 존재를 잊게 된다. 그러다 어느 때는 한없이 짙고 길게 드리워 내 몸집보다 더 커져 나를 앞지르기도 한다. 우리는 어디까지나 동등한 관계인데, 나보다 나를 더 앞질러 걷는 그에게 끌려갈 때에는 등 뒤에 빛이 있다는 것도 새까맣게 잊고 만다. 아, 네가 있다는 것을 잠시 잊어 너도 서운했나 보구나. 그래서 마치 나를 집어삼킬 듯 커져버린 거구나. 나는 그렇게 그를 이해한다. 그리고는 다시 나란히 걷는다.
내 가장 오래된 벗. 당신은 누구에게나 손을 뻗지만 누구나 당신을 친구로 여기진 않지. 당신을 낯설어하는 사람도, 심지어 거부하는 사람도 있어. 하지만 나는 알아. 당신을 받아들이고 이해할 때, 우리에게 늘 빛도 따라다닌다는 사실이 더 명명백백해진다는 걸. 그러니 오래전 당신을 알게 된 것이 어쩌면 행운인지도.
오늘은 깊이 잠들 수 있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