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말 더워도 더워도 너무 더웠다.
지금처럼 에어컨이 집집마다 있어서 여차하면 틀 수 있는 때도 아니었다. 기껏 해봐야 지나가면서 더위 먹은 강아지 마냥 혀를 쭉 빼고 은행 간판이 보이면 달려가서 한숨 돌릴 수 있었다. 혹은 카페라도 들어가면 집채만 한 에어컨이 시커먼 입을 벌리고 손님들을 향해서 찬바람을 뿜어주고 있었다.
뉴스에서는 몇십 년 만의 더위라느니 하면서 조선 시대의 무더위 역사까지 더듬어 올라가 연일 떠들어댔다.
1994년 여름.
설설 끓는 더위만큼이나 내 마음도 팔팔 끓어대고 있던 시절...
나는 하루가 멀다고 크고 작은 스캔들로 폭죽을 터뜨리는 남녀 공학 중학교를 나왔다. 폭죽은 내게도 예외 없이 터졌다.
중학교 2학년 때 우리 반 반장이었던 남자애랑 요즘 말로 하면 ‘우리 오늘부터 1일’을 선언하며 사귀기 시작한 것이다. 날짜도 정확히 기억한다. 1988년 9월 17일.
36년 전 이 날짜를 기억하냐며 놀랄지 모르겠지만, 조금만 센스가 있다면 알아챘을 것이다. 이날은 우리나라 역사상 가장 큰 이벤트였던 ‘88 서울 올림픽’의 개막식 날이다.
부모님은 어떻게 운 좋게 티켓을 구하셔서 올림픽을 구경하러 가신다고 새벽 일찍부터 채비해서 나가신 터였다.
빈집. 피 끓는 사춘기 남녀 청춘에게 빈집이란 매혹적인 공간이다.
나는 반장네 집으로 전화를 걸어 우리집으로 올 수 있냐고 물었고, 그는 왔다. 그리고 내 방에서 함께 유재하, 변진섭, 동물원 음악을 들었고, 함께 사과도 깎아 먹었다.
이 시절의 영롱한 연애 수단은 오직 전화와 편지였다. 학교 끝나고 집에 오면 전화벨만 울려도 깜짝, 깜짝 놀라며 전화기 쪽으로 칼 루이스 저리 가라 뛰어갔다.
하루가 다 저무는데도 영 벨이 울리지 않으면 혹시 전화기가 고장 난 것 아닌가 하고 전화선을 살피는 것은 예사. 밤이면 혼자 책상에 앉아 낮에 학교 앞 아트박스 선물 가게에서 사 온 편지지에 일기를 쓰듯 나의 하루를 고백했다. 아니 나의 하루에다가 나의 마음을 수없이 얹어 초록색 펜으로 꼭꼭 눌러썼다.
다음 날 아침 제일 먼저 등교해서 다른 교과서보다 크기가 조금 컸던 과학책 사이에 편지를 끼워 반장의 책상에 갖다 놓았다. 그러면 그 과학책은 우리 둘만의 우체통이 되어 다시 내 책상 서랍에 답장을 배달해 주었다.
반장은 중학교 그 어린 나이부터 집안을 일으켜서 고생하시는 부모님을 돕겠다는 어른스러운 의지가 강한 아이였다. 그래서 그 시절 약국에서 처방전도 없이 파는 각성제까지 먹으며 맹렬하게 공부했었다. 반에서 중간치밖에 안 갔던 나는 늘 1등 자리를 놓치지 않았던 반장을 보며 조금은 부끄러웠지만, 사랑은 성적순이 아니지 않은가. 내 사랑의 순도는 반장 못지않았으니 그걸로 되었다.
이런 나에게 반장은 겨울 방학식 날, ‘연애 중단’을 선언했다. 사유는 공부에 몰두하고 싶어서.
과학책에 도톰한 편지 대신 메모지가 한 장 띡 들어있었다. 이럴 수는 없었다. 사랑이 어떻게 변한단 말인가.
그해 겨울방학은 추운 겨울 날씨만큼 내 삶도 얼어붙어 버렸다. 겨울 시즌이 되면 ‘백구의 대제전’이라는 이름으로 큰 배구 대회가 열렸는데, 그걸 보러 가도 재미가 하나도 없었다. 학교 앞에 즉석 떡볶이 가게에 가도 오로지 반장 생각뿐. 혹시나 걔도 떡볶이를 먹으러 들어오지는 않을까 하고 내내 가게 문 열리는 것만 넋 놓고 바라보고 있었다.
그것이 반장과 짧은 사랑의 종말이었다. 그러나, 사랑의 상처는 오래갔다.
내 친구는 빠르게 훨훨 타오르는 장작이 빨리 꺼지는 법이라고 제법 철학적으로 충고해주기도 했다. 그러나 내 속에서는 '네가 뭘 알아.'라는 메아리만 쩌렁쩌렁 울릴 뿐.
개학 후 새 학기가 되니 여기저기에서 소문이 날아들기 시작했다.
겨울방학 동안 반장은 다른 새로운 여자를 만나고 있었던 것이다! 나와는 분위기와 스타일이 겹치는 구석이 하나도 없는, 자그마하고 다소곳한 우리 옆반 아이였다.
반장, 너 취향이 이런 거였어? 그럼 나는, 그냥 잠깐 가지고 노는 거였어?
질투와 분노가 동시에 불붙어 활활 타올랐다.
어느 날 하루는 도저히 이렇게 지낼 수는 없을 것 같아서 반장네 집도 모르면서 일단 그 동네 근처로 가서 만나보자 싶었다. 겨울밤 추위가 몹시 매운지라, 목도리를 둘둘 둘러매어 눈만 내밀고는 밤 9시가 넘어 까치발을 떼고 몰래 나가려다가 엄마에게 들켜 등짝을 맞으며 엉엉 울어버렸다.
세월은 약이라고, 나는 이렇게 사랑과 상실의 괴로움에 몸부림을 칠지언정 시간은 물처럼 흘러 반장도 나도 어느덧 대학생이 되었다. 영화를 좋아했던지라 주말이 되면 비디오 가게에서 영화 테이프 한 네댓 개는 빌려왔었다. 그날도 터덜터덜 비디오 가게로 테이프를 반납하러 가던 중이었다. 그런데, 저쪽에서 어떤 껑충하게 키 큰 남자가 테이프를 한 아름 들고 걸어온다. 반장이었다! 나, 그리고 반장은 예전의 냉정한 쪽지 사건일랑 저 멀리 뒤로한 채 반갑게 인사를 나누었다.
“전화번호... 그대로야?”
“어, 그대로야. 전화해.”
나는 전화하라는 말을 할까 말까 잠시 망설이다가 해버렸다.
대학로의 마로니에 공원 옆에 있는 켄터키 후라이드 치킨 앞에서 만나기로 했다. 그 시절에는 줄여서 ‘켄치’라고 불렀다. 휴대전화가 있는 것도 아니고, 기껏해야 삐삐도 완전히 다 보급되지 않던 시절, ‘어디’에서 만나자는 약속이 유일한 기다림의 끈이었다.
소원대로 집안을 일으키기 위해 재수 한 번 거치고 결국 서울대에 들어갔다는 집념의 사나이, 첫사랑의 추억을 고스란히 담고 185센티미터가 넘는 큰 키로 자라난 반장은 어떤 어른이 되었을지 궁금했다.
대학로로 출발하기 전, 뾰족구두를 꺼내서 광을 내고, 화장도 있는 도구 없는 도구 다 꺼내어 호들갑을 떨고 치장에 정성을 들였다.
그러나 1994년 여름은 천하일색도 와르르 무너뜨릴 만큼 더웠다. 빨간 벽돌 건물 앞에서 연신 손수건으로 땀을 닦고, 손이 안 보이게 부채질해 댔다.
얼른 반장이 약속 장소로 나와서 어딘가로 땡볕을 피해 들어가야 숨을 돌릴 텐데, 좀 늦는 모양이었다. 너른 마음으로 혜량 할 수 있었다.
10분, 20분, 30분...
온몸 구석구석에서 워터파크가 개장하기 시작했다. 민소매 티를 입고 나갔는데, 겨드랑이 아래로 다 젖을 판이었다. 잠깐 사람 찾는 척하면서 켄치로 들어가서 땀을 식혔지만, 이미 구겨져 버린 스타일은 돌이킬 수 없던 터.
같은 곳에서 누군가를 기다리던 다른 커플들은 벌써 수십 쌍이 손을 붙잡고, 어깨를 두르고 켄치를 유유히 떠났는데, 나만...
외로웠다.
끈질기기도 하지. 내 미련함은 참 이런 것이다. 뭔가 사정이 있을 터라 짐작하고, 묻고 믿어주는 것이다. 무려 한 시간 삼십 분을 기다리다가 화가 잔뜩 나서 집으로 돌아왔다.
휴대폰으로 “야, 너 어디야?” 전화 한 통만 걸면 될, 간단한 일인 요즘에는 상상도 못 할 사건이다.
뜨거운 날씨 속, 굽도 높디높은 구두를 신고 그렇게 오래 서 있었으니 흐물흐물한 미역 같이 녹초가 되어 집에서 씻고 있는데 연락이 왔다.
그리고 제일 중요한, 반장이 왜 제시간에 못 나왔는지에 대한 이유는 정말 이상하게도 기억이 나지 않는다. 깡그리... 지난 일은 그래도 그날 입었던 옷 색깔까지 기억하는 나에게 몹시 드문 일이다.
그날 이후, 어떤 이유로든지 나를 한 없이 기다리게 하는 사람은 절대로 만나지 않으리라 두 주먹 쥐고 다짐했다. 그리고 그 다짐은...
아아. 지금까지 잘 지켜지고 있을 리가 없다. 요즘도 세상에는 온통 기다릴 일투성이인 것을.
애들도, 남편도... 기다려야 한단다.
"너는 언제 한 방 터져?"
"기다려 봐."
"인생에 한 방이 어딨어."
"있어. 터져. 기다려 봐. "
본격적으로 수영 선수반에 들어간 아들 또한 기다려야 한단다. 지금 팀에서 까마득한 꼴찌다.
"들어간 지 얼마 안 됐잖아요. 기다려보세요."
"혹시 이 길이 아니면 어떡해요?"
"그걸 누가 알아요, 기다려보세요."
삶은 무언가를, 아무것이라도 '기다리는 시간'을 세포 삼아 하루하루 분열하면서 확장하고, 실망하고, 떨궈내어 망각하는 일이 아닌가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