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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계꽃 Aug 31. 2020

러시아어를 전공하고 JLPT1급을 딴  영어 번역가?!

멀티링구얼이 아니라 외국어 덕후입니다

이 글은 완벽하게 3개 국어를 구사할 줄 아는 멀티링구얼의 이야기가 아니다. 효과적인 외국어 학습법에 대한 글은 더더욱 아니다. 그렇다면 왜 제목을 저렇게 지었느냐고? 거짓은 아니기 때문이다. 소제목에서 알 수 있듯, 나는 멀티링구얼이기보다는 외국어 배우기가 취미인 외국어 덕후에 가깝다.


나는 영어를 미친 듯이(?) 좋아하진 않는다. 영어 번역을 본업으로 삼는 사람이 무슨 황당한 소리를 하느냐 물을 수도 있겠지만 이 또한 사실이다. 앞 문장을 더 정확하게 고쳐보겠다. 나는 영어‘만’ 좋아하진 않는다. 솔직히 말해 ‘외국어’가 좋다. 더 정확하게는 ‘언어’ 그 자체가 좋다.

     

초등학생 때 유니텔이라는 PC통신에 빠져 있었다. PC통신은 인터넷 시대가 열리기 전 존재했던 일종의 커뮤니티로 전화선(모뎀)을 통해 접속할 수 있었다. 왜 하필 유니텔이냐고 한다면 유니텔 내에는 ‘꾸러기 동산’이라고 초등학생 전용 커뮤니티가 따로 있었다. 동네 놀이터에서 이리저리 뛰어다니며 놀던 기억보다 컴퓨터 앞에 앉아 채팅을 하고 게시판에 글을 쓰던 기억이 더 생생하다. 한 번은 전화 요금 고지서에 10만 원이 넘게 찍혀 부모님께 등짝을 아주 찰지게 맞기도 했다. (그 당시 금액으로 10만 원이었으니 맞을 만했다.) 도대체 초딩 꼬맹이가 컴퓨터 앞에서 무얼 했느냐면, 바로 소설을 썼다. 그것도 연애 소설을. 더 정확하게는 ‘순정 만화를 베껴놓은 듯한’ 연애 소설을 썼다.


만약 그때 글들을 갈무리해두었다면 지금쯤 잊지 못할 추억의 자료(라고 쓰고 흑역사라고 읽겠지요)가 됐을 텐데. 안타깝게도 제목만 기억날 뿐이다. 어떤 순정만화 대사에서 차용한 듯한 냄새가 폴폴 풍기는 '민트향 초콜릿'이라는 제목이었다. 그런데 세상 내성적이었던 이 꼬맹이가 여기서 그치지 않고 본격적으로 일을 저지른다. 무려 ‘글쓰기 동호회’를 개설한 것이다. (너무 오글거려 차마 이름은 밝힐 수 없다.) 나는 그 동호회의 대표 시삽(운영자)이었고, 심지어 오프라인 번개를 개최해 광화문 교보문고에서 같은 또래의 초등학생 여자 아이와 함께 세 시간 동안 해리포터를 읽다 온 적도 있다. (부모님과 함께 광역버스를 타고 사람 바글거리던 광화문 교보의 카페테리아에 앉아 우리는 조선시대 유생들처럼 미동도 없이 해리포터를 읽었다.) 지금 생각해도 인생 최대 미스터리다. 도대체 그런 용기가 어디서 났던 걸까?


비슷한 시기에 영어학원을 보내 달라고 부모님을 조르기도 했다. S대학교에서 운영하는 어학당을 가고 싶다고 했는데, 당시 그곳의 교육비는 15만 원가량으로 초등학생 학원비치곤 상당히 부담스러운 가격이었다. 엄마는 나를 앉혀놓고 열심히 공부하겠다는 다짐을 받았다고 한다. I, my, me, mine부터 배우는 왕초보반에 들어간 나는 셀프로 몰입식 영어 교육을 자처했다. 매주 짧은 문장으로 이뤄진 영어 동화책 몇 페이지를 외우는 숙제가 있었는데, 영어 발음에 익숙지 않아 한글로 소리를 음차해 단어 밑에 쓴 후 그대로 달달 외웠다. 교실 앞으로 나가 외운 내용을 발표하다가 her를 '허'라고 너무 정직하게 말하는 바람에 '허-ㄹ'이라고 발음해야 한다고 교정을 받은 적도 있다. 같은 반 아이들도 피식거려 부끄러웠지만 그 순간뿐이었다. 좋아한다면 물불 가리지 않는다고 했던가. 더더더 잘하고 싶다는 마음이 간절했다. 파란 눈동자로 해맑으면서도 과장된 몸짓으로 "Hi, kids!"라고 말하며 문을 열고 들어오는 이방인 선생님도 전혀 무섭지 않았다. 영어를 쓰고 말할 때는 내 안의 또 다른 내가 튀어나오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영어라는 필터를 거치면서 본캐 안에 감춰진 부캐가 고개를 내미는 느낌이었다.


외국어를 배운다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게도, 우리에게 없는 것을 알아가는 과정이다.
- 조지영, <아무튼, 외국어>

     

‘내 속엔 내가 너무도 많다’는 것을 어렴풋이 경험한 그때부터 외국어의 매력에 빠졌는지 모르겠다. 그렇게 영어는 학창 시절 내내 가장 좋아하는 과목으로 자리를 굳혔고, 고등학교 때는 일본어, 대학에 가서는 러시아어라는 새로운 필터를 장착하게 되었다. 나는 무려 부캐를 3개나 가진 사람인 것이다.


지금은 밥벌이가 되어버린 영어에 10살 꼬맹이가 가졌던 순수한 열정을 찾아보기 힘들어졌다. 직업이 되니 항상 ‘잘해야 한다’는 강박에 자신감이 떨어지고 가끔은 영어가 두렵기까지 하다. 10살에도 느껴보지 못한 두려움을 성인이 되고 나서야 느끼는 아이러니란. 글쓰기 동호회를 개설하고 외국어 학원에서 열정을 불태웠던 그때의 마음으로 지금의 내 마음을 다독여주고 싶었다. 그래서 이 주제로 글을 써보려 한다. 어떻게 그 언어와 처음 만났는지에서 시작해 어떻게 그 언어와 사랑에 빠졌고, 그 언어라는 필터를 거쳐 어떤 사람이 되었는지를 오래된 연인이 첫 만남을 회상하듯, 다락방에 묵혀둔 낡은 사진첩을 펼쳐 종이 위에 켜켜이 쌓인 먼지를 털어내듯 하나씩 꺼내보려 한다. 그 시절 언어를 향한 나의 덕심을 확인하고 나면 왠지 모르게 힘이 날 것 같다.


우선 순수하게 취미로 파고들기 시작해 일본어능력시험 N1을 따고 워킹 홀리데이 비자까지 받았으나 동일본 대지진으로 일본행이 좌절된 뼈아픈(?) 추억이 있는, 그때 일본을 갔더라면 일본어가 밥벌이가 되었을지도 모르는, 오히려 그래서 취미 그 자체로 오랫동안 남아 있는 일본어와의 추억부터 이야기해보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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