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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주원 Aug 24. 2021

밤 운전

밤 이불 덮고 달린 길

아이들을 막 재우고 나왔는데 전화가 울렸다.

"여보 어떻게 하지? 지금 막 출발하려고 하는데 차 스마트키가 안 먹혀. 배터리가 방전돼서 그런가 봐. 보조키가 필요한데 당신이 가져다줄 수 있을까?"


고개를 들어 시계를 보니 밤 10시가 넘었다.

평소 시내 운전만 겨우 하던 나인데  1시간 넘게 고속도로 운전이라니 그것도 이밤에! 아찔한 심정이었지만 내가 아니면 남편은 오도 가도 못한 신세니 고민할 여지가 없었다.

혹시나 아이들이 깨서 엄마를 찾을까 봐 커다란 종이에 편지를 쓰고 바로 옆에 휴대폰을 놓고 현관을 나섰다.

아이들 뒤척이는 소리가 귀에 밟히는 듯했다.


차에 시동을 걸고 출발했는데 어째 차가 뒤뚱거렸다. 마음은 급한데 느낌이 좋지 않았다. 셋째를 낳고 남편이 꼭 필요하다며 산 카니발이 오늘은 더 크고 무겁게 느껴졌다.


드디어 고속도로 진입. 슬슬 몸이 경직되기 시작했다.  조수석이 아닌 운전석에 탄 이상 늘 다니던 길이라는 편안함은 없었다. 내비게이션을 켜고 온 주의를 운전에만 집중했다.

규정속도를 준수하고 안전거리를 유지했다. 아니 다른 차에게서 멀리 떨어져 달렸다는 표현이 더 적당하겠다. 당연히 차선은 미리미리 바꾸어 탔다.

낮에 보던 풍경이 아니라 그런지 처음 가는 길 같았다. 내가 저 표지판을 본 적이 있던가? 여기에 터널이 있었던가?

커다란 화물차들은 어쩜 그리 쌩쌩 달리는지 저 멀리 보이는 라이트만 보고 지레 겁을 먹고 차선을 비켜주기도 했다.


한 20여분 지났을까? 길은 한적했고 지나는 차도 별로 없어 운전은 순조로웠다. 불안했던 마음이 슬쩍 가시면서 손에 난 땀을 닦아야지 생각이 들던 참이었다.

편도 3차선 도로 중 2차선으로 가고 있는데 중앙선을 넘어 무언가 움직이는 것이 보였다. 뒷머리에 전류가 통하는 것 같았다.

조그만 동물, 누런 털빛과 기다란 꼬리를 보니 아무래도 고양이 같았다.

자동차 헤드라이트에 반사되어 형형한 눈빛을 보는 순간,  온몸의 털이 곤두섰다.  


"제발!" 입에서 단말마의 비명이 터져 나오는 순간, 오른쪽 바퀴에 둔탁하게 부딪히는 혹은 밟히는 느낌과 함께 차가 덜컹거렸다.


핸들을 쥔 손이 덜덜 떨리고 속이 울렁거렸다.


방금 내 발밑에서 한 생명이 마지막 숨을 토해냈을지 모른다고 생각하니 숨이 막혔다.


호흡을 가다듬고 기억을 더듬었다. 규정속도보다 느리게 달리는 중이었고 옆 차선에는 차가 없었으니 나는 충분히 피할 수도 있었다.


 그런데 왜 나는 핸들을 꼭 쥐고만 있었나?


전방에 장해물이 있으면 핸들을 좌우로 꺾지 말고 정지를 해야 한다고 배웠다.

급정지도 매우 위험하니 만약 도로 한가운데에 멈춰 선 동물이 있다면 그대로 치는 수밖에 없다는 얘기도 들었다.


내가 듣고 배운 대로라면 내 행동은 나름  합리적인 판단이라고 볼 수 있었다.


하지만 만약 좀 더 큰 동물이었다면? 만약 멧돼지나 고라니였다면 나는 급정거를 하지 않았을까? 중량이 나가는 동물을 치었을 때 내가 받을 충격을 고려하여 멈추지 않았을까?

뒤따르는 차가 없었다면 나는 그 동물을 치지 않고 약간의 스키드 마크만을 남긴 채 그 자리를 떠났을지도 모른다.


 나는 멈추지 못했다. 여리고 작은 것의 목숨만큼 짐을 지고 나는 도로를 꾸역꾸역 달렸다.


멍한 채로 운전하고 있는데 남편에게 전화가 왔다.


"잘 오고 있어?"

"응. 조심히 가고 있는데...... 방금 로드킬 했어."

"아......." 남편이 쉽게 말을 잇지 못했다.


밤길 운전을 시킨 것도 미안한데 로드킬을 했다니 복잡한 마음이었을 거다.


"핸들 돌리면 큰일 나는 거야."

"응. 알아. 그래서 어쩔 수 없었어."

"그래. 너무 마음 쓰지 말고 조심해서와."


드문드문 커브길을 알리는 야광 표시판 외에 지나는 차도 많지 않은 시골길을 묵묵히 달렸다. 이 불편한 감정을 뭐라 표현해야 할지 몰랐다.

우주를 유영하는 작은 캡슐 안에 나 혼자 갇혀있는 느낌이었다.  중력도 시간도 없는 공간을 이동하는 동안 먹먹했던 귀가 뚫린 건 톨게이트를 지나면서였다. 하이패스가 정상 처리됐다는 기계음을 들리자 정신이 좀 들었다. 십 분만 더 가면 남편을 만날 수 있다.


비포장 도로를 덜컹덜컹 지나며 몸과 마음이 같이 출렁였다. 이제 곧이다. 마지막 모퉁이를 돌아 저 멀리 남편이 보인다. 한숨이 깊은 곳에서 비어져 나왔다.


"잘 왔네. 수고했어."

"응. 당신도 고생했어."


이제 10년 차 부부에게 한 마디면 족했다.


부랴부랴 배터리를 충전하고 짐을 챙겼다. 물도 한 잔 마시고 무슨 맛인지도 모를 비스킷을 두어 개 씹어 넘겼다.


"내가 앞장설게. 잘 따라올 수 있지?" 남편이 묻기에 고개를 끄덕였다.


가로등도 몇 개 없는 시골길이 너무 적막했다. 다시 차 안에 갇혀 핸들을 잡고 액셀을 밟으니 울고 싶어 졌다. 남편은 행여나 내 주의가 흐트러질까 걱정해 전화도 걸지 않았다.

남편을 따라가는 길이 이렇게 춥고 외로웠던 적이 있었나 싶었다.


히터를 틀고도 달달 떨며 가는데 남편 차에 브레이크 등이 들어왔다. 나도 모르게 조금 뒤처졌던 모양인지 남편이 잘 따라오라고 신호를 보낸 것이다. 묘한 안도감이 느껴지며 오른발에 힘이 붙었다.


부부간의 안전거리가 이만큼 가까웠나 생각하며 돌아오는 길,


칠흑 같은 밤이 우리 부부의 차를 이불처럼 덮어주는 것 같았다.


출처: 픽사베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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