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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English man in New york Feb 25. 2021

가난이 당신의 꿈을 가난하게 만드는 사회에 대하여

 자본주의 사회에서 계층의 차이는 거부할  있는 성격이 아니다. 우리 사회는 자본을 기준으로 사회의 구성원들을 일등부터 꼴등까지 줄을 세울수 있다. 그곳에 부유한 계층이있고 가난한 계층이 있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이러한 자본으로 줄세우기는 자본주의를 지탱하고 있는 주요 근간  하나이다.

 때때로 우리는  지점에서 착각을 한다. 정치인들이 기회의 평등, 과정의 공정함, 사회적 불평등 완화 등의 이야기를   특히 그러하다. 앞에서 언급한 개념들이 마치 계층의 차이를 줄여나가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고 느낄  있는데 이는 정확한 이해가 아니다. 우리는 자본주의 사회 이전에도 불평등 했고 자본주의 사회에서도 불평등하다. 자본주의가 성숙할 수록 대체적으로 계층의 차이는 벌어지고  차이를 따라잡기가 더욱 어려워진다. 공정사회, 복지사회, 포용사회는 자본의 많고 적음으로  나열한 줄에서 한참 뒤떨어진 사람들이 사회에서 일탈하지 않도록, 사회가 붕괴하지 않도록 시행되는 완충장치의 성격일뿐 거창한 표현과는 달리 계층의 차이를 크게 개선하기 위한 수단이 아니라는 의미이다.

 소련으로 대표되는 공산주의가 붕괴하기 전까지 이러한 계층 문제의 완전한 해결이 가능할  이라는 이론적인 믿음이 존재했었다. 공황으로 대표되는 자본주의가 가지고 있는 내제적 불완전성 그리고 심화되는 양극화와 상대적 박탈감 등을 궁극적으로 해결하기 위한 대안이 필요했고, 안개속에 가려진 공산주의라는 이념이  역할을 수행했다. 대안이 없는 저항은 다수의 공감과 동조를 얻기 힘든 것이 당연하다. 자본주의 사회의 부조리와 싸우던 많은 이들에게 공산주의는 하나의 대안이었다. 그러나 동유럽이 무너지고, 소련이 붕괴되면서, 여기에 더하여 우리나라의 경우 북한의 비참한 현실이 세상에 공개되면서 자본주의의 유일무이한 대안으로 생각되던 공산주의는 힘을 잃고 학문 속으로 사라지게 되었다. 참으로 위대한 자본주의의 승리가 아닐  없다.

 자본주의의 위대한 승리가 최초부터 쉽게 예상되었던 것은 절대 아니다. 자본주의는  자체로 여러 불안요소들을 갖고 있고 마르크스와 같은 초기 공산주의자는 자본주의체제의 모순이 결국 프로레타리아 혁명으로 이어질 것이라고 예상하였다. 그리고 프로레타리아 혁명이 이루어 지기 위해서는 자본주의 사회의 충분한 성숙이 선행되어 한다고 보았다.  자본주의는 공산주의로 가기 위해 거쳐야 하는 단계로 인식한 것이다. 올리버 트위스트 이야기와 같은 지독한 아동노동착취의 현장을 생생하게 볼수 있던 19세기 지식인들에게는 충분히 설득력이 있을 만한 주장이었다. 여지껏 경험하지 못한 속도로 커저가는 빈부격차와 산업의 발전과 비례하지 못하고 비참한 상태에 머물러 있는 수많은 노동계급을 보면서 어쩌면 프로레타이아 혁명은 단순한 상상이 아니라 언제 일어나는지가 문제인 매우 일어날법한 예상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산업화 과정에서 실제로도 격렬한 노동계층의 저항이 있었지만, 자본주의가 전방위적인 프로레타리아 혁명으로 이행되지는 못하였다. 오히려 자본주의가 성숙한 단계까지 이행되지 못한 러시아에서 혁명이 일어나 공산주의 이념에 대한 실험이 진행되게 되었다.

 나는 매해가 지날 수록 자본주의의 완전한 승리를 실감하고 있다. 인류 전체의 집단적인 시각으로 봤을  자본주의는 인류의 역사를 진보시킨 훌륭한 체제임에 틀림이 없다. 개인 한명이 쉬지 않고 열심히 일하는 상태를 효율이라고 한다면, 자본주의는 비효율을 줄여 사회가 최적화 상태에 가장 가깝게 만들어 준다. 최적화는  높은 생산성으로 이루어 지는데 이는 전세계 모든 국가의 GDP합계 추이를 보면 쉽게   있다. 인류는 역사상 가장 많은 빵과 고기를 생산하고 소비하고 있으며, 여지껏 우주의 가장  곳까지 도달하였다.  자율주행차가 거리를 다닐 것이며, 이족 보행 로봇도  이상 SF영화의 영역이 아니다. 인류는 자본주의 덕분에 역사상 가장 진보된 오늘날까지 이를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인류의 관점이 아닌 개개인의 관점으로 봤을  나는 거침없이 콧대가 올라가는 자본주의의 승리를 바라보며 오히려 슬픔과 안타까움을 느끼는 때가 많다. 우리 사회는 노예제가 있던 사회나 계급제도가 있던 사회보다 상대적으로 평등해진것은 맞으나 본질적으로 계층이동이 어렵다는 점에서는 진일보 하지 못하였다. 중세시대에 농노의 자식으로 태어났으면 농노가 아닌 꿈을 꾸기 어려웠던  처럼 오늘날 가난한 계층에 태어난 사람은  계층을 뛰어넘는 꿈을 꾸기가 어렵다. 노예 또는 농노라는 단어가 주는 느낌이 강하기 때문에 이러한 주장이 논리적 비약이라고 느낄  있지만   생각해  필요는 있다. 인간은 평등하지 않다는 것이 당연  되던  신분을 넘어서는 꿈을   없던 농노와 인간은 평등하다는 인식이 당연시 되는 오늘날 계층을 올라서는 꿈을 꾸지 못하는 가난한 계층  누가  비참하다고 생각하는가?

 오늘날 가난하게 태어나도 물론 꿈을 가질  있다. 그러나 유년시절을 지나 성인이 되면서  계층간의 벽은  높고 단단하게 다가올 것이다. 우리나라의 자본주의가 아직 완전히 자리를 잡기전, 사회는 혼란스러웠고 누군가는  틈사이에서 기회를 잡을  있었다.  시절에는 개천에서 용난다는 표현이 가능했다.  시절에만 가능했다. 교육과 관련된 수치를 보면 계층 간을 막고 있는 거대한 벽이 적나라하게 들어난다. 2018년도 SKY대학 입학생의  50% 가구 소득 상위 10분위, 9분위에 속하였다. 2017년도 가구소득 300만원 미만 가구 자녀의 서울 4년제 대학교 입학률은 8.8%였다. 가진자와 가지지 못한자의 자산에서 이미 초격차가 발생했고 수저계급론이 판을 치는  시점에 교육을 통한 신분상승은 제한적일  밖에 없다. 그럼에도 어쩌면 신분상승의 실낱 같은 희망인 교육의 기회 조차도 가난한 계급에게는 더이상 내어줄 자리가 없는 것이 현실이다.

 내가 자본주의의 위대한 승리를 매해 실감하고 있는 가장  이유  하나는  이상 세상이 이러한 현실에 대해서 문제를 제기하지 않기 때문이다. 계층의 사다리가 걷어차여 지는 것에 학계도 언론도 점차 입을 닫아가고 있다.  이상  문제에 대한 대안을 제시할 사람도 없고  들어줄 사람도 없다.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극복할  없는 계층의 차이는 고착화 되고 결국 뒤쳐진 자들의 절망과 좌절만 남게 된다. 만약 이러한 흐름이 가속화 된다면 결국 우리사회는 계층간의 차이는 당연하며 계층  이동이 불가능한, 사실상 자본의 소유 정도에 따른 계급사회의 모습이 될지도 모른다. 투표권  장을 제외하고는 모든 것이 불평등한 그런 계급사회가 오지는 않을까 상상해보는 것이다.

 이창동 감독의 버닝을 보면서 나는 그가 기성세대로서 이제 인생을 시작하는 청년 세대들, 대부분 줄의 끝쪽에 위치하고 있는 그들을 우려하는 마음을 조금이나마 느낄  있었다. 방향성을 제시하거나 해답을 외치지 않는 그의 메시지가 오히려 진정성있게 와닿았다. 아마도 이창동 감독과 같은 몇몇 기성세대들은 어디에선가 자기만의 방식으로 가난이 꿈을 가난하게 만드는  슬픈 현실을 이야기하고 있을 것이다. 나는 이러한 목소리가 더욱 많아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인간이라는 가치가 물질로만 판단될  없다고 믿는다면 그리고 오늘날 특히 청년 세대들을 보며 가난이 꿈을 가난하게 만드는  현실에 안타까움을 느낀다면 계속해서 상기시켜야 한다. 자본주의는 욕심과 같은 인간의 본성에 근거한다고 이야기를 하는데, 나는 우리 본성 중에 욕심도 존재하지만 분명 공정하고자 하는 욕구도 있다고 믿는다. 그리고 이러한 공정에 대한 욕구는 부자와 가난한자에 관계없이 지니고 있는 본성이기 때문에 오늘날 계층의 차이가 심화되고 계층이동의 사다리가 사라지는 상황에 대해 자본 순으로 세워진   어느곳에 위치한 사람이라도 문제를 제기할  있다고 생각한다.

 과거에 지식인이 다수의 대중을 계몽하여 시대의 변화를 이끌어야 한다는 인식이 팽배했던 시절이 있었다. 오늘날 유투브로 대표되는 정보의 홍수에서 느낄  있듯이 시대는 완전히 변화하였다. 우리 사회를 변화시킬  있는 사람들은 대다수의 대중이지 몇몇 잘난 지식인이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개개인이 옳은 방향이라고 믿는 가치를 많이 이야기하고 공유하는 것이 오히려 세상을 변화시키는 원동력이   있다고 생각한다. 이것이 내가 ‘가난이 꿈을 가난하게 만드는 현실 대해 글을 쓰게된 이유이다. 이창동 감독에 한참 미치지 못하겠지만 나의 작은 목소리도 그가 우려하는 현실을 변화시키는데 자그마한 도움이 되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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