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란쿤데라의 신발 신어보기
1.
존재에 대한 확고부동한 동의는 그 동의를 위태롭게 하는 것들에 대한 부정에 근거하고 있다. 이 동의는 하나로 연결된 긴 직선 위에 위치하고 있으며 한 방향으로 움직이고 있다. 그리고 그 직선 위 어딘가에 먼지처럼 서있는 나약한 인간에게 그 확고부동한 동의는 한없이 거대한 무게로 다가온다.
한편 모든 것이 끊임없이 반복된다는 영원한 회기라는 관점 앞에서는 확고부동한 동의도 그 무거움을 잃게 된다. 무한한 반복 앞에서 어떠한 위대한 존재도 한없이 가벼워지는 것이다.
밀린 쿤데라가 창가에 기대 있는 토마시를 머릿속에 떠올린 순간부터 그는 이 소설의 결말을 머릿속에 그리고 있었을까? 소설을 덮으며 처음 머릿속에 든 궁금함이었다.
이 소설은 분량이 많지만 책을 읽어나가면 나갈수록 감추어진 지도가 확장되듯 이야기가 확장되고 연결된다. 그리고 그 전개되는 속도와 짜임새의 정교함이 뛰어나다.
그리고 결말에 이르러서는 풍부한 감정 속에서 마지막 순간을 충분히 즐길 수 있다. 결말이 궁금해 기다려지면서 동시에 결말이 오는 순간이 두려운(토마시와 테레자 부부의 마지막 순간이 찾아오는 것에 대해서) 독서는 처음이지 않았나 싶다. 그만큼 소설의 스토리만으로도 충분한 읽기의 재미를 제공한다. 그러나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에는 스토리를 넘어서는 뭔가가 있었다. 나는 작가를 이해하고 싶어 여러 챕터를 다시 정독했고 거기에서 느껴진 작가와의 무언의 공감을 공유하고자 한다. 물론 이것이 정답은 아닐 것이다.
2.
이 소설은 토마시와 테레자 그리고 사비나와 프란츠의 이야기이며 가벼움과 무거움의 흥미로움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나는 주인공 토마시가 독일의 한 속담에서 탄생하였다고 한 작가의 설명에 주목하였다.
Einmal ist keinmal
Once is never
한 번뿐인 것은 전혀 없었던 것과 같다
이 중의적인 속담에는 소설을 관통하는 작가의 고민이 반영되어 있다. 이 속담이 "한 번은 큰 의미가 없어서 괜찮아'라는 의미로 그 사용된다면 (토마시가 테레자를 받아들이기를 결심한 순간 생각한 것과 같이) 여기서 이 한 번의 행위는 가벼운 성질이어야 할 것이다.
반대로 이 속담이 "어떠한 행동을 한 번만 한 것은 전혀 의미가 없어 그래서 반복되어야 해'라는 의미로 사용된다면 이 한 번의 행동은 무거운 성질이 될 것이다.
토마시는 테레자를 받아들이기로 한 이 한 번의 일탈이 자신의 삶을 바꾸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결국 이 일탈은 그의 삶 전체를 관통하는 무거운 선택이 된 것이다. 작가가 토마시가 이 속담에서 탄생했다고 한 이유는 위의 예시처럼 토마시의 선택이 가지고 있는 가벼움과 무거움 때문일 것이다.
영원한 회기, 무한한 반복 앞에서 모든 것들은 가벼워질 수밖에 없다. 서문에 쓰였듯이 로비스피에르도 히틀러도 이 가벼움을 비켜갈 수 없었다. 그럼에도 이 영원한 회기가 한 개인에게는 범접하기 어려운 무거움을 주는 이유는 무엇일까? 산덩이만한 돌을 산 위로 밀어 올리고, 돌이 다시 굴러 떨어지면 다시 밀어 올리기를 반복하는 시지프스를 생각해보자. 그의 돌 밀어 올리기는 가벼운가 무거운가? 수많은 시지프스의 신화가 끊임없이 반복된다면 그가 돌을 밀어 올리며 받는 고통은 특별한 의미를 가질 수 없을 것이다. 영원한 회기로부터 비롯된 가벼움이다. 그러나 당신이 시지프스라면 어떠하겠는가? 쉼 없이 무한하게 돌을 밀어 올려야 한다면 그보다 무거운 일은 없을 것이다.
이 장황한 이야기를 정리해보자면 한 번의 행위는 일반적으로 가볍다. 그리고 이 한 번의 행위의 영원한 반복은 개인에게는 한없이 무거워지지만 더 상위의 시점(예를 들어 인류의 관점)에서는 다시 한없이 가벼워진다.
3.
밀란쿤데라는 현대 사회의 여러 모습들이 존재에 대한 확고부동한 동의 위에 설립되었다고 보고 있다. 이러한 확고부동한 동의는 존재의 무거움에 근거한 근본적인 믿음을 의미한다.
예를 들어 소설 속에 묘사된 공산주의 구성원들의 전체주의에 대한 맹목적 동조, 자본주의 사회 구성원들의 몰락한 공산주의에 대한 동정 등은 이러한 근본적 믿음의 예시이다. 종교적인 믿음 역시 마찬가지이다. 그러나 그는 이러한 근본적인 믿음이 존재의 가벼움 앞에서는 그 의미를 잃어버릴 수밖에 없다고 보고 있다. 그리고 토마시와 테레자 그리고 사비나와 프란츠의 삶과 관계를 보여주며 독자에게도 질문을 던지고 있다. 인간은 가벼운 존재인가 무거운 존재인가?
소설 곳곳에는 작가의 마음속에 자리 잡은 확고부동한 동의(기성 사회의 근간)에 대한 반감이 드러난다. 사회제도나 종교는 딱딱하고 고지식하며 때로는 비합리적이다. 제도나 종교와 같이 정해진 프레임에 갇힌 인간의 사고는 그 프레임을 유지하기 위해 프레임에 반하는 것들은 의도적으로 무시해야만 하는데 우리가 그리한 사고에 매몰되어 있다는 것이 밀란 쿤데라의 생각이다.
'만약 존재가 무거운 것이 아니라 가벼운 것이라면'이라는 기성 사회의 근간을 비트는 그의 접근법이 낯설고 신선하게 다가왔다. 적어도 세상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접하기 정말 어려운 요즘이기에 더더욱 그랬던 것 같다. 다만, 신선한 느낌만큼 명료하지는 않았다.
밀란 쿤데라는 네 명의 주인공 중 사비나만 마지막에 남겨두었다. 누구보다 무거움에 가까웠던 프란츠는 재능이 아깝게도 죽어버렸고, 토마시와 테레자도 결국 세상을 떠났다. 가장 가벼움에 가까웠던 사비나만이 바람처럼 구름처럼 떠돌며 마지막까지 남았다. 몇 번의 독서 끝에 느낀 밀란 쿤데라의 제안은 해답이 아니라 새로운 질문이었다. 그것은 질문에 대한 질문이었다. 그리고 그의 접근법이 우리 기존 사고체계에서 물리적으로 도출될 수 없었던 새로운 출발점의 단초가 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느낌이 정말 희미하게 머릿속을 스쳤다.
아마도 그 느낌을 설명하라고 하면 하지 못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