쏘리를...멈춰주세요ㅠㅠ
비행기 체크인을 하기 전까지도 ‘이게 맞는 건가’라는 생각을 계속하게 됐다. 막상 익숙한 생활을 떠나려니 뒤를 돌아보게 되더라. 하지만 이미 티켓, 어학원, 숙소비까지 결제한 판국에 엎을 순 없는 노릇. 퇴직금을 공중분해시킬 순 없기에 비행기에 올랐다.
터키를 거쳐 16시간을 날아 도착한 몰타. 첫날은 평탄했다. 에이전트에서 마중을 나와있었고 연계숙소까지 아주 편안하게 데려다주더라. 그리고 숙소 근처에서 저녁까지 먹고 나니, 왜 겁을 냈지? 싶을 정도로 하루가 평탄했다. 게다가 시차 적응도 정말 잘 됐다. 한국과의 시차는 8시간으로 꽤 많이 나는 편이었는데도 말이다. 새벽에 잠깐잠깐 깨긴 했지만 장시간 비행이 피곤해서인지 금세 잠이 들었고, 한국에서처럼 아침 7~8시에 일어나는 데 성공했다.
하지만 모든 게 맘처럼 쉽지 않은 법. 첫날은 한국인들만 만났고, 외국인들과 대화를 할 일이 없었으니 평탄한 건 당연했다. 문제는 다음 날부터였다. 일요일 아침에 몰타에 상륙한 난 월요일부터 어학원을 등교해야 했다. 회사가 바빠 줌을 이용한 레벨 테스트를 진행하지 못했고, 선생님과 짧은 대화를 통해 영어가 어떤 수준인지 평가받아야 했다. 그래야 수준에 맞는 수업을 들을 수 있으니까.
선생님의 질문은 굉장히 쉬운 수준이었다. 어느 나라 출신이니? 어느 도시에 사니? 그 도시는 어떠니? 살기 편하니? 하지만 이 질문을 영어로 답하려니 설명하기가 힘들더라. 서울에 사는데 굉장히 인구가 많고 복잡하다고 답하고 싶었건만, 영어가 입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인구…가 영어로 뭐였지? 복잡하다는 뭐지?
소 노이즈… 소 비지 시티…라고 자신감 없게 말하자 선생님이 “쏘리?”라고 되물었다. 그 순간 머리가 새하얘졌고 어버버 한 채로 테스트가 끝이 났다. 내 영어실력이 최악일 줄 알았는데 몇 안 되는 질문에 대답도 하지 못할 정도라니. 자괴감이 몰려왔고 레벨은 아래에서 두 번째인 엘리멘터리, 초급 수준으로 배정받았다. (영어 레벨은 비기너:완전 초급-엘리멘터리:초급-프리 인터미디어트:중하급-인터미디어트:중급-어퍼 인터미디어트:중상급-어드밴스:상급 순이었다)
이때부터일까. 외국인이 하는 ‘쏘리’가 무섭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우리나라에서 볼 수 없는 풍부한 표정으로 뱉는 ‘쏘리’는 나를 절로 위축되게 만들었다. 나에게 익숙한 쏘리는 친구들과 투닥투닥 말장난 후 심하게 말했거나 혹은 부딪혔을 때 하는 말이었다. 대답을 듣기 위해서 건네는 말은 아니었단 말이지.
영어 실력이 쏘리한 탓에 쏘리는 하루에도 여러 번 들을 수밖에 없었다. 마트에서, 카페에서, 식당에서. 계산할 때와 주문할 때. 기어가는 내 목소리에 직원들은 여러 번 쏘리를 해야 했고 나는 거의 울기 직전이었다. 물론 그들의 쏘리에 악의가 담겨있진 않았다. 목소리가 잘 안 들려서, 혹은 직원이 알아듣지 못해서임을 잘 알았지만 어쩌겠는가. 영어로 대화하는 게 어색하니 여러 번 말을 하게 하는 쏘리가 원망스러웠다.
진절머리 나던 쏘리에 익숙해진 건 얼마 지나지 않아서였다. 카페-학원-마트 식으로 일상이 패턴화 되면서 가는 곳도 쓰는 말도 정해지자 자신감이 붙은 거다. 물론 내 영어 실력은 아직도 처참하다. 하지만 직원이 되묻지 않게끔 대답을 해버린달까? 해맑게 건네는 스몰톡은 과감히 무시하고 아 윌 페이 마이 카드, 아메리카노라던가 짧게 대답하고 말아 버렸다. 영어 실력 향상에 대한 열망은 사라지고 쏘리를 듣지 않기 위한 발버둥이었으니까.
학원에서 자주 듣는 쏘리도 한 몫했다. 어학원에는 여러 인종의 학생이 있다. 콜롬비아, 브라질, 이탈리아, 스페인, 프랑스… 한국인의 발음, 드라마에서 듣던 미국·영국식 발음과 전혀 다른 영어 발음은 꽤나 당황스러웠고 말이 빠르기도 빨랐다. 한 번에 알아들을 수가 없으니 나도 쏘리를 뱉을 수밖에 없었다. 물론 그들도 나에게 자주 되물었고.
내 영어 실력이 많이 부족하다는 걸 깨닫고 다시 설명하는 게 일상이 되자 더 이상 쏘리는 무섭지 않았다. 대화할 때 그저 흘러가는 말일뿐임을 알고 나니 별 것 아니라고 느껴졌다. 계산하기 직전, 주문하기 직전 밀려오던 긴장감도 덜해졌다.
하지만 쏘리에 익숙해졌다고 해외생활이 마냥 해피해지는 건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