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manana Jan 26. 2023

쏘리가 무서워

쏘리를...멈춰주세요ㅠㅠ

비행기 체크인을 하기 전까지도 ‘이게 맞는 건가’라는 생각을 계속하게 됐다. 막상 익숙한 생활을 떠나려니 뒤를 돌아보게 되더라. 하지만 이미 티켓, 어학원, 숙소비까지 결제한 판국에 엎을 순 없는 노릇. 퇴직금을 공중분해시킬 순 없기에 비행기에 올랐다.

ⓒ오전

터키를 거쳐 16시간을 날아 도착한 몰타. 첫날은 평탄했다. 에이전트에서 마중을 나와있었고 연계숙소까지 아주 편안하게 데려다주더라. 그리고 숙소 근처에서 저녁까지 먹고 나니, 왜 겁을 냈지? 싶을 정도로 하루가 평탄했다. 게다가 시차 적응도 정말 잘 됐다. 한국과의 시차는 8시간으로 꽤 많이 나는 편이었는데도 말이다. 새벽에 잠깐잠깐 깨긴 했지만 장시간 비행이 피곤해서인지 금세 잠이 들었고, 한국에서처럼 아침 7~8시에 일어나는 데 성공했다.


하지만 모든 게 맘처럼 쉽지 않은 법. 첫날은 한국인들만 만났고, 외국인들과 대화를 할 일이 없었으니 평탄한 건 당연했다. 문제는 다음 날부터였다. 일요일 아침에 몰타에 상륙한 난 월요일부터 어학원을 등교해야 했다. 회사가 바빠 줌을 이용한 레벨 테스트를 진행하지 못했고, 선생님과 짧은 대화를 통해 영어가 어떤 수준인지 평가받아야 했다. 그래야 수준에 맞는 수업을 들을 수 있으니까.

ⓒiels

선생님의 질문은 굉장히 쉬운 수준이었다. 어느 나라 출신이니? 어느 도시에 사니? 그 도시는 어떠니? 살기 편하니? 하지만 이 질문을 영어로 답하려니 설명하기가 힘들더라. 서울에 사는데 굉장히 인구가 많고 복잡하다고 답하고 싶었건만, 영어가 입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인구…가 영어로 뭐였지? 복잡하다는 뭐지?


소 노이즈… 소 비지 시티…라고 자신감 없게 말하자 선생님이 “쏘리?”라고 되물었다. 그 순간 머리가 새하얘졌고 어버버 한 채로 테스트가 끝이 났다. 내 영어실력이 최악일 줄 알았는데 몇 안 되는 질문에 대답도 하지 못할 정도라니. 자괴감이 몰려왔고 레벨은 아래에서 두 번째인 엘리멘터리, 초급 수준으로 배정받았다. (영어 레벨은 비기너:완전 초급-엘리멘터리:초급-프리 인터미디어트:중하급-인터미디어트:중급-어퍼 인터미디어트:중상급-어드밴스:상급 순이었다)


이때부터일까. 외국인이 하는 ‘쏘리’가 무섭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우리나라에서 볼 수 없는 풍부한 표정으로 뱉는 ‘쏘리’는 나를 절로 위축되게 만들었다. 나에게 익숙한 쏘리는 친구들과 투닥투닥 말장난 후 심하게 말했거나 혹은 부딪혔을 때 하는 말이었다. 대답을 듣기 위해서 건네는 말은 아니었단 말이지.


영어 실력이 쏘리한 탓에 쏘리는 하루에도 여러 번 들을 수밖에 없었다. 마트에서, 카페에서, 식당에서. 계산할 때와 주문할 때. 기어가는 내 목소리에 직원들은 여러 번 쏘리를 해야 했고 나는 거의 울기 직전이었다. 물론 그들의 쏘리에 악의가 담겨있진 않았다. 목소리가 잘 안 들려서, 혹은 직원이 알아듣지 못해서임을 잘 알았지만 어쩌겠는가. 영어로 대화하는 게 어색하니 여러 번 말을 하게 하는 쏘리가 원망스러웠다.

ⓒ오전

진절머리 나던 쏘리에 익숙해진 건 얼마 지나지 않아서였다. 카페-학원-마트 식으로 일상이 패턴화 되면서 가는 곳도 쓰는 말도 정해지자 자신감이 붙은 거다. 물론 내 영어 실력은 아직도 처참하다. 하지만 직원이 되묻지 않게끔 대답을 해버린달까? 해맑게 건네는 스몰톡은 과감히 무시하고 아 윌 페이 마이 카드, 아메리카노라던가 짧게 대답하고 말아 버렸다. 영어 실력 향상에 대한 열망은 사라지고 쏘리를 듣지 않기 위한 발버둥이었으니까.


학원에서 자주 듣는 쏘리도 한 몫했다. 어학원에는 여러 인종의 학생이 있다. 콜롬비아, 브라질, 이탈리아, 스페인, 프랑스… 한국인의 발음, 드라마에서 듣던 미국·영국식 발음과 전혀 다른 영어 발음은 꽤나 당황스러웠고 말이 빠르기도 빨랐다. 한 번에 알아들을 수가 없으니 나도 쏘리를 뱉을 수밖에 없었다. 물론 그들도 나에게 자주 되물었고.


내 영어 실력이 많이 부족하다는 걸 깨닫고 다시 설명하는 게 일상이 되자 더 이상 쏘리는 무섭지 않았다. 대화할 때 그저 흘러가는 말일뿐임을 알고 나니 별 것 아니라고 느껴졌다. 계산하기 직전, 주문하기 직전 밀려오던 긴장감도 덜해졌다.


하지만 쏘리에 익숙해졌다고 해외생활이 마냥 해피해지는 건 아니었다.

매거진의 이전글 낭만병을 조심할 것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