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여기에 왜 왔을까
24년도 봄부터 후쿠오카시의 이토시마에서 아티스트 레지던시를 하기 위해 일찍이 레지던시 사무소에 연락을 했었다. 일 년에 한 번씩 매년 오지는 못하더라도 2년에 한 번씩은 와야지하는 스스로의 약속도 있었고 왜 인지 부족할 게 없는 일상에서 이렇게 언어도 잘 통하지 않고 평범한 일상을 불편한 상황에서 하나씩 꾸려가며 받는 새로운 자극들은 뭐랄까 아이러니하게도 익숙함에 도태되어 간다 생각했던 내 삶의 자존감이 올라가게 된다고 해야 할까? 힘든 레지던시 생활이 끝나면 뭐든 할 수 있을 것만 같은, 모험을 끝내고 돌아가는 영웅적 심리가 생긴다. 만나는 친구와 가족들마다 내가 레지던시에서 어떤 고생과 작은 일상을 이루었는지, 환경과 사람들은 어떻게 다르고 어떤 것을 느끼고 왔는지 이야기를 하다 보면 실제 겪었던 일보다 과거가 미화되어 삶의 경험치로 인생 레벨이 올라가는 기분이다. 만약 RPG 게임으로서 '작가'의 캐릭터가 있다면 이런 해외 아티스트 레지던시 같은 것들은 젊을 적 작가의 일생에서 몇 번 으레 해봐야 하는 퀘스트같이 느껴지기도 한다. 그래서인지 사실 지금 와있는 이 이토시마 아티스트 레지던시에서 고생을 꽤나 하는 편이다. 지난 다케오 레지던시 생활에서는 전기자전거도 줬었고 근처 10분 도보엔 편의점도 있고 온천동네로 꽤나 유명한 지역이라 명소들도 볼 것이 많았는데.. 이토시마는 다르다. 물론 후쿠오카에 위치해 있지만 사실 여긴 사가에 가깝고 바닷가 마을이고 휴양지가 꾸려져 있다고 하지만 내가 있는 작업실에서 바다를 보러 가려면 최소 한 시간은 걸어야 휴양지 분위기라는 게 나온다. 그렇다면 난 사실상 제 발로 외딴 시골 동네에 작업하러 온 것인데 이번 레지던시엔 나를 포함해 작가들이 17명이나 레지던시 하우스 1,2,3에 각자 모여 살고 있는터라 괜스레 머리가 피곤해져 낯가림이 더욱이 심해지는 것 같다. 물론 내가 거주하는 집에는 나를 포함해 다섯 명이 살고 있다는데 첫 날 만난 주주, 둘째 날 만난 조쉬와 아브람을 제외하곤 나머지 한 명을 아직 못 만났다. 아무래도 나랑 비슷하게 사람들과 마주치기 싫으면 인기척이 없을 때 집 안을 돌아다니나 보다.
작업실은 꽤나 근사하게 느껴지는데 아쉽게도 시골 특성상? 벌레의 주둔지에서 작업을 한다고 생각하면 된다. 작업실에서 보고 싶은 책들과 연구하고 싶은 튤립에 관한 책들을 한국에서 들고 왔고 튤립 연구에 대해 해 보려 왔으나 오자마자 밀린 한국의 일러스트레이션 외주 업무로 인해 아직 몇 개의 스케치와 하나의 작은 페인팅밖에 시작하지 못한 죄책감이 살짝 몰려온다. 일주일 뒤에 로컬에서 워크숍을 한다는데 괜히 준비된 것이 아무것도 없어서 머리가 지끈 아프다. 이 와중에 교토에서 재밌는 아트페어가 열린다고 해서 짧게 주말에 다녀올까 생각한다. 이래저래 하면 이게 작업에 충분하게 집중되는 시간인지도 잘 모르겠으나 나의 쳇바퀴는 여전히 열심히 굴리고는 있는 중이다.
오늘 아침엔 거실이 시끄러워서 화장실을 쓰고 싶었으나 괜히 마주치면 피곤해 오전 열한 시까지 다른 하우스 메이트들이 각자의 방으로 가거나 나가길 기다렸다. 인기척 없이 세수한다고 했는데 내 물소리에 조쉬가 나와서 20분여간 수다를 떨었고 검색해 보니 근처에 로컬 사우나가 있다 해서 자전거를 타고 십여분 달려서 따뜻한 물에 깨끗이 씻었다. 목욕탕에는 나를 포함해 할머니 두세 분이 계셨고 꽤나 깔끔하게 잘 운영되고 있으면서 야외 노천탕도 있어 마음에 들었다. 앞으론 여기서 지내는 동안 무조건 씻는 것은 동네 목욕탕에서 씻어야겠다고 다짐했다.
식사는 레지던시에 입주하기 전에 마트에 들러 간단히 100g씩 먹을 수 있는 흰쌀밥의 인스턴트식품을 사 왔고 반찬으로는 잘게 썰린 파와 볶은 연어를 유리병에 담아 두 병이 세트길래 사 왔다. 노란 단무지로 사 왔는데 이것으로 교토 가기 전까지는 어째 버틸 수 있을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하다. 친절하게도 하우스 메이트인 아브람이 냉장고에 내 자리를 내주어서 신선하게 음식을 보관하게 되었다. 다른 작가들은 뭘 먹고사나 봤는데 다들 일주일에 한두 번 이 악물고 자전거를 타고 멀리 나가서 마트에서 도시락을 왕창 사 와서 먹는다. 밥 한 끼 먹는 것도 이곳에서는 쉽지 않은, 쌩 고생이 따로 없다.
내일은 오전에 일어나 오늘 해두었던 페인팅 작업을 마저 하고 완성을 꼭 해서 교토에 갈 예정이다.
짐을 미리 싸두고 오후 두 시까지 작업을 완료하고 이동을 해야겠다.
하루가 긴 듯 짧은 듯 적당히 외롭고 적당히 고생하는 11월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