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들선호사상에 대해 생각한다. 우리네 할머니 세대의 대부분의 여성들은 자신이 살아온 ‘여성’으로서의 삶이 억울하다고 할지, 체념하며 산다고 할지 어떤 형용을 해야 할지 모르겠지만 어떻든 여성으로 살아간다는 건 수많은 제약들의 그물망에 겹겹이 둘러싸여 옴짝 달짝 못하는 물고기 같은 삶을 살아왔을 것이다. 그런 그녀들은 ‘아들’을 낳음으로써 차별스러운 삶에 일종의 보상을 얻었던 것 아닐까? 반면 딸을 낳는다는 것은 자신과 동일한 삶을 살아갈 (그래서 자신의 대외적 상승감과는 관계없는), 살림을 도울 도우미를 얻는 것에 지나지 않았고, 딸만 줄줄이 낳는다는 건 어떤 종류의 수치 같은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도 그럴 것이, 일단 그 시절 여성이 직업을 갖는다는 건 기생, 예인이나 무속인 같은 세계 외에는 없었고 시대가 조금 더 지나면 가장 그럴듯한 직업은 교사 정도였으리라. 경제적 독립을 할 수 없고 그 어떤 사회적 명함을 지닐 수 없던 여성들에게 가장 주요한 임무이자 사명은 ‘생산자’, 즉 ‘아들을 생산’해내는 것이었다. 아들을 생산함으로써 사회적 명함을 획득했다는 기분을 가졌을 거라 짐작된다. 왜냐하면 (자기 몸에서 나온) 그 아들은 커서 당당히 경제적 자립을 하는 존재였으니 하찮은 딸과는 차원이 다른 존재였을 것이다.
일전에 조카들이 어렸을 때 같이 티브이를 보는데 코뿔소가 나왔다. 조카딸이 물었다.
“이모, 코뿔소는 커서 뭐가 돼?”
나는 말해주었다.
“응, 코뿔소는 코뿔소가 되지.”
송아지는 커서 소가 되고, 망아지는 말이 되지만, 코뿔소는 코뿔소가 된다. 코뿔소는 야구선수도 될 수 없고 탤런트도 될 수 없으며 의사가 될 수도 없다. 코뿔소는 코뿔소가 된다. 코뿔소가 코뿔소 이외의 그 무엇도 될 수 없는 것처럼 그 시절의 여성들은 다른 무엇이 아닌, 누군가의 딸, 아내, 엄마, 할머니, 아줌마 외에는 아무것도 될 수 없었다. 그보다는 조금 나은 시대를 살고 있어 다행스럽다는 생각과, 아들선호사상이 없었던 부모님을 만나 다행스럽다는 마음이다. 이 시대의 여성들은 코뿔소를 넘어서게 되었다. 더불어 아들선호이데올로기도 붕괴.
아시는 분의 훌륭하고 똑똑한 따님이 결혼을 한단다. 그 따님은 전교 1등을 내리 달려 우수한 대학을 진학하고, 졸업 후 세계인이 알아주는 기업에 다니고 있는 인재라고 들었다. 결혼식 전이지만 그 예비부부는 신혼집에서 살고 있는 상황. 어느 저녁 무렵, 따님이 그 어머님에게 전화를 해서 ‘엄마, 저녁 뭐해야 되지?’ 하는 물음에 그 어머님이 전화 통화 후 기가 막혀서 많이 우셨다는 말을 전해 들었다. 늘 일등을 달리던 딸, 좋은 성적으로 좋은 기업에 입사해 사회생활을 하고 있는 딸이 시집을 가서 남편과 해먹을 저녁끼니를 묻는 것이 기가 막히셨단다.
짤막하지만 임팩트 있는 그 에피소드를 들으며 이런저런 생각을 한 참이었다. 뭐라 결론을 내리기도 어렵지만 결혼을 하건 하지 않건 인간의 삶이란 본래 ‘의식주’를 해결해야 하는 것이니 저녁으로 뭐 해야 해,라는 질문은 적절하다. 게다가 그 어머님은 요리를 전문가급으로 하시는 분이다. 하지만 그 질문을 오직 신부 쪽에서만 했다는 것이 여기서의 안타까운 지점인 것이고, 혹여 예비신랑이 그 질문을 자신의 아버지에게 하는 상황이 된다면 진정한 평등이 구현되는 세계인 거겠지… 하는 마음이……. 더욱 바람직하게 로봇에게 전적으로 요리를 맡기는 경우라면 좋겠지만 그런 세상이란 건 아직은 매우 요원한 것이니까. 로봇의 개입이 없다면 우리들 가정에서의 식사 관계는 그닥 변함이 없을 것 같네. 흠.
오늘은 세계여성의 날. 꽃집을 화려하게 장식한 미모사를 바라보며 세계 어디에서든 단지 여성이라는 이유로 고통받고 있을 그녀들을 생각한다. 그녀들의 삶이 조금씩이나마 밝은 빛깔로 물들어가기를.
해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