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군가에게 인정받겠다는 생각을 이제 더 이상 하고 싶지 않다. 이제 그만 그런 것들로부터 벗어나고 싶다. 이것은 어떠한 중독성 물질처럼 끊기에는 지독한 애씀이 필요하다. 대체 누구에게 인정받으려고 했던 것일까 하고 곰곰 생각해보았다. 그렇게 아주 오랫동안 깊이깊이 고민하고 생각해온 끝에 조금 알 것 같다. 그 대상에 실체는 없다는 것을.
내 초등학교 6학년 담임 선생님은 중년의 후덕하신 남자 선생님이었다. 성함은 민영환 선생님. 우리반은 숙제로 매일매일 일기를 써서 등교하고 나면 선생님 책상에 제출하고, 집에 갈 때 돌려받는 루틴이 있었다. 선생님은 일기를 꼼꼼하게 읽으시고는 늘 코멘트를 달아주셨다. 어느 날 내 이름을 부르시고는 나와서 오늘의 일기를 읽어보라고 하셨다. 나는 부끄러운 마음을 숨기고 일기를 아이들 앞에서 낭독했다. 낭독을 마치자 선생님은 “잘 들었지. 일기는 이렇게 쓰는 거야 얘들아.” 하고 말씀하셨고, 나는 역시 상승한 자부심을 들키지 않으려 애썼다. 그리고나서 매일매일 그 일기 숙제를 내가 얼마나 열심히 즐겁게 썼는지는 설명을 안해도 뻔했을 일. 언제나 선생님의 코멘트를 기대하며 즐거이 확인했다.
그리고 문득 전학을 가게 되었다. 선생님은 내 마지막 일기의 끝머리에 이렇게 쓰셨다.
어디서든 귀여움 받는 어린이가 되어야 한다.
어디서든, 귀여움 받는, 어린이가, 되어야 한다. 그 일기장은 아직도 갖고 있다. 그리고 이 한 문장 역시 지금까지도 나를 따라다니고 있다. ‘귀여움 받는’ 이라는 수식어에 묘하게 이끌렸다. 이것은 여러 다양한 의미를 함축하고 있었다. 대개 성실한, 순응적인, 예쁨받는 행동을 하는, 무난하게 어울리는, 칭찬받을 만한, 인정받는 뭐 그런 류의. ‘귀여움 받는’ 이라는 말과 진취적인, 적극적인, 씩씩한, 담대한, 용기있는, 리더쉽있는, 용감한… 이런 말은 어쩐지 매칭하기 어렵다. 그런 것이다.
대체적으로 그렇게 살아왔던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귀여움 받는’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게. (귀여운 척이라는 말과는 전혀 다릅니당) 뒤늦게 그 말에 적극적으로 반항하고 싶다는 생각이 강하게 든다. 귀여움 받는 사람으로 살려고 나도 모르게 애써온 건 아닌가 싶어 조금 분하다고 할까. 그런 생각을 하면 배 안쪽 - 배꼽 부근이라고 할까, 약간 위일까 싶은 장소에서 형성된 아주 작은 불씨같은 것이 타올라 나를 부르르 떨게 하는 것 같은 기분이 든다. 그리고 달구어진 눈물이 솟아나려고 한다. 도대체 왜이러는 걸까.
귀여움 따위 쓰레기통에 버리고 싶어, 누군가에게 인정받기 위해 살아가는 것 이제 안하고 싶어,라고 내 안의 깊은 곳에서 큰 소리의 외침이 들리고 있다. 이것이 혹시 융이 말한 그림자의 외침인지도 모른다. 그런 귀여움 받는 인생은 너 자신이 아니라 너의 페르소나의 하나에 지나지 않는다고 말하고 있는지도. … 그리하여 나는 자기인식, 그리고 개성화 과정을 거치고 있는걸까.
다른 누구에게 인정받아야겠다는 생각을 더 이상 하고 싶지 않다고해서 당장 그것을 끊어버리지는 못할 수 있다. 오래된 생각 습관이고 행동 패턴이니까. 인정 혹은 귀여움 받기에 오래도록 중독되어 있었으니까. 이기적으로 살겠다는 말은 물론 아니다. 나의 생각 회로의 초점을 옮겨보겠다는 의미이다. 내가 먼저 인정받아야 할 대상은 나 자신인 듯.
해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