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지현 Nov 22. 2018

모유가 이젠 없다

내려놓음을 배우는 길

냉동실을 여니 웬일로 자리가 넉넉하다. 내일 아침 줄 모유 팩 하나를 꺼내니 아, 이젠 정말로 하나도 없다. 자기 주는 줄 알고 안겨서 말똥말똥 보는 의성이에게 괜히 죄인이 된 것 같다. 의성아, 봐봐, 내일 아침이면 마지막이야.


모유수유를 마치며 느낀 외로움이 있었는데 이것에 비할 바가 아닌 거 같다. 그때의 외로움은 허영이 있는, 허세 부릴 여유가 있는 외로움이었다. 내게는 냉동고 가득 얼려둔 팩들이 있었고, 그래서 나는 아마 반 정도만, 게임은 끊되 계정은 지우지 않은 것처럼, 치킨은 끊되 냉장고에 치킨집 번호는 남겨둔 것처럼, 절약을 선언하되 통장 안에 잔고는 든든하게 남아있는 것처럼 반만. 딱 반 정도만 외로워했던 것 같다. 그때 외롭고 슬펐다고 생각했지만 아니다, 그때 난 완전히 내려놓지 않았다. 지금에 비하면 사치스러운 외로움이었다!


의성이가 생각보다 모유를 잘 먹었다. 예전엔 먹으라고 줘도 안 먹고 반은 버리더니만 웬일로 이렇게 꿀떡꿀떡 잘 드시는지... 하루에 아껴 먹여도 18온즈. 가득한 냉동고는 순식간에 동이 나 이제는 마지막 한 봉지가 남아있다. 오래된 것부터 먹이기 시작해, 이제는 10월의 팩을 집어 들게 되었다. 날짜가 점점 가까워져 갈 때마다 느꼈던 서글픔이란. 팩 하나당 8온즈씩 꽉꽉 들어차 얼려져 있던 때도 있고 5온즈씩 딱딱 맞추어 한 통이 가득 채워져 있을 때도, 간신히 2온즈 1온즈씩 있는 팩들이 통에 들어가 있을 때도 있었다. 얼린 팩을 꺼내보다 보면 기억을 더듬는 기분이 들었었다. 그래 이 때는 많이 나와서 열심히 짜냈지. 이때는 회사에서 영 시간이 없어서 반만 했었지. 이때는 젖 양을 줄인다고 식혜를 먹던 때였지. 그리고 최근에 들어서니 그래, 이 때는 더 이상 많이 나오지 않아 마지막으로 조금씩 챙겨놨었지... 아, 이제 정말로 내가 네게 줄 수 있는 게 없구나. 나만이 할 수 있던 것이 정말로 사라지는 기분이 든다. 내 몸에서 나온 것으로 네가 이루어지는 그 마음을 뭐라 표현해야 좋을까. 당장 내일부터 줄 게 없으니 의성이를 보면 마음이 짠하다. 지금도 울다가도 모유병만 물려주면 좋다고 조용해지는데... 어쩌지, 어쩌지... 마음이 힘들어지니 괜히 한번 더 되뇌게 된다 그냥 조금만 더 할걸. 조금만 더 할걸.


안다, 의성이가 마냥 젖 먹는 아기일 수 없고 마냥 안겨만 있을 수도 없다. 의성이는 크는 중이다 중고등학생이 되어서도 엄마 젖 찾진 않을 것이다 그래 이거 아무것도 아니야! 그래 아무것도 아닌데 왜!


미안하지만, 외롭지만 허전하지만 하나씩 내려놓는 것도 엄마가 되는 과정이란 생각이 든다. 젖 뗄 때도 마음이 아팠지만 둘 다 잘 해냈고 처음 수면교육을 하며 다른 방에서 재울 때도 걱정에 잠 못 이뤘지만 이제는 밤 내 혼자서 잘 자고 아침에 푹 자는 엄마를 찾아오는 아가가 되었다. 이렇게 나도 자라고 너도 자란다. 이번에도 우리 잘 해내 보자 의성아. 엄마도 힘낼게.

이젠 제법 장난도 칠 줄 아는 14개월 아가. 꺄르르 웃으며 도망다니니 따라다니기가 쉽지 않다.


매거진의 이전글 부모는 원하는 게 많아진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