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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현 Dec 06. 2018

화투는 어떻게 치나요

많이 사랑하기 후회 없이 사랑하기


지현아, 화투 좀 같이 치자.

대학 몇 년 차였던가. 할머니께서 미국에 아빠를 보시겠다고, 우릴 보시겠다고 머물러 오셨던 적이 있다. 대학을 다니던 날 하루가 멀다 하고 할머니는 불러 앉히시곤 말씀하셨다. 지현아, 화투 좀 같이 치자. 아 나 바쁜데 자꾸 왜, 나 화투 칠 줄 몰라요. 가르쳐줄게, 아냐 나 잘 모르겠어. 나는 돌아앉아 숙제를 하고 할머니께서는 그런 날 두고 그저 뒤에 앉으셔서 혼자 화투장을 하나하나 넘기시곤 했다. 그걸 뭐라고 불렀는지는 모르겠다. 혼자 화투는 못하시니 아마 짝을 맞추셨던 것 같다. 그때 화투장은 내게 영 재미있어 보이지 않는 장난감이었다. 규칙도 모르겠고 광이고 똥이고 피박이고 저게 다 뭐란 말인가. 다른 재밌는 게 이렇게 많은데.

미국에 오셔서 첫 얼마간은 미국 좋은 곳이라고 여기도 저기도 모시고 갔지만 할머니 체력이 이제 여행을 버티실 수가 없었다. 힘들다고 집에만 가고 싶어 하시니 해 드릴 것이 없어 할머니와 함께할 여행을 생각하던 가족이 모두 기가 죽었다. 시간이 지나니 창가에서 주차장을 내려다보고 있는 것이 할머니의 일이 되었다. 지현이 왔니? 반갑게 하셔도 그게 끝이었다. 할머니의 하루는 그저 집뿐이었고 내 학교는 할머니껜 무슨 소린지 도통 알아들으실 수 없는 먼 나라 이야기니 대화가 이어지질 않았다. 하루는 할머니께서 입을 여시기를 지현아, 미국이 감옥살이구나. 늘 바둑이를 데리고 동네 여기저기, 노인정도 가시고 친구들과 산책도 다니시던 할머니께 창가만 바라보는 생활이 맞을 리가 없었다. 영어도 못 하시고, 하물며 치매기가 있으셔서 자꾸 내가 왜 여기 있냐? 하시던 할머니. 혼자 산책을 보내드릴 수도 없고 딱히 어디에 한인 노인정이 있는 것도 아니었으니 학교에 일에 바쁜 가족들에 치여 할머니는 미국까지 오셔서는 그저 앉아만 계시는 것 외에 방도가 없었다. 바쁜 가족들 가운데 그나마 집에 붙어있는 사람이라곤 나였고 그래서 할머니는 나만 바라보셨다. 몇 달째가 되었을까, 할머니께서 날 붙들고 눈물이 그렁하셔서 말씀을 하셨다. 지현아 할머니가 이렇게는 못 산다. 나 이렇게 감옥살이하다 죽겠다. 할머니 지금 가면 다시 못 와. 아이고 그건 안된다 아빠 두고 어떻게 가니. 느이 아빠 보고 싶어서. 그럼 여기서 계속 이렇게 사실 거예요? 아니, 못 살지... 그래, 못 살지. 이렇게는 못 살지. 그런 할머니를 보다 눈물이 났다. 마음이 너무 힘들어서 아빠가 야속했다. 할머니가 괴로운 게 다 내 탓인 것 같았다.

할머니께서는 웃다 울다 하시다 결국 한국으로 돌아가셨다. 다시 오실 수 없는 것을 우리 모두가 알았다. 생애 마지막에 자식손주 보시겠다고 오신 미국이었다.

한국에 가신 할머니께선 고모와 함께 지내셨고, 가끔 영상통화로 뵙는 모습은 미국에 계셨던 때보다 훨씬 생기가 있었다. 잘 지내세요? 잘 지내지. 그 때 즈음 치매가 진행되셨던 할머니는 가끔 나를 다른 이름으로 부르셨다. 은영아? 지현이라고? 언제 오냐? 어디 있냐? 미국? 얘가 미국엘 왜 갔어?  할머니, 내가 곧 갈 테니까 그때까지 건강하게 계셔야 해요. 어디까지 기억하실까 몰라도 그저 웃으며 꼭꼭 씹듯이 말을 했다. 할머니 건강하셔야 해요. 한 번 두 번 영상통화 동안 점점 마르시고 작아지시던 할머니.  2014년 4월 초, 부모님께서 할머니 뵈러 간다, 왠지 마지막이 될 것 같다, 하며 한국행 비행기 티켓을 끊으시더니 며칠, 할머니와 아빠의 다정한 사진들이 카톡방을 채웠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동생도 급히 한국으로 날아갔다. 나는 가지 못했다.

어렸을 적, 난 할머니 손에 큰 아이였다. 할머니 방에 들어가는 것이 퍽 좋았다. 할머니 방은 볕이 들어 늘 따듯했고, 온돌이 있어 이불 밑으로 발을 넣고 할머니랑 테레비를 보는 것이 좋았다. 작은 테레비 앞엔 성경이 펴져 있고, 화장대 위엔 사탕 캔이 항상 놓여 있었다. 사랑방 뭐라고 하는 초록색 알록달록한 캔. 할머니는 아침이면 하얗게 분을 바르시고, 곱게 차려 입으시고 노인정으로 마실을 나가셨다. 바둑이가 그 뒤를 쫓아가 노인정 앞에서 할머니 나오시기까지 집과 노인정을 오가며 기다렸다. 할머니 노인정에서 뭐 해? 하면 그냥 화투 치고 놀지. 재밌어? 하면 그냥 하는 거지! 하고 웃으시던 할머니. 오늘은 몇 점, 엊그제는 몇 점. 십원, 오십 원짜리 백 원짜리가 할머니 선반 위에 많았다가 적었다가 했다.

내가 중학생 때였던가, 할머니께서 냉장고에서 물통을 꺼내다 손에서 떨어뜨리신 일이 있었다. 눈앞에서 순식간에 와장창, 냉장고 밑으로 물이 쏟아지니 엄마가 이게 무슨 소리야! 어머님! 또 떨어뜨리셨어요? 하고 달려오는데 할머니 얼굴을 보니 표정이 말하고 있었다. 이게 왜 떨어져서 왜 또 이게 떨어져서. 슬프게 눈썹이 처지시던 그 얼굴이 아직도 기억에 생생하다. 늙으면 죽어야 하는데. 입 밖으로 내신 적 없지만 그때는 무슨 말을 하시는지 알았다. 달려오는 엄마에게 말했다 엄마 내가 물 꺼내다가 떨어뜨렸어. 미안 내가 손이 미끄러졌어. 내가 치울게. 거짓말이 들킬까 두려워서 가슴은 떨리는데 할머니의 슬픈 얼굴이 가슴에 콕 박혀 입에서 말이 술술 나갔다 내가 잘못한 거야 걸레 어디다 뒀지? 할머니 미끄러지면 안 되니까 저리 가 계세요.

아마 모두가 알았을 거짓말이었을 터다. 엄마는 멋쩍게 걸레를 가져다주고 할머니는 내 손에 밀려 조용히 방으로 들어가셨다. 한 번도 할머니와 그 이야기를 나누지 않았지만 그 날 저녁에 할머니는 많이 기운이 없으셨다. 미안하다 고맙다 괜찮다 말 같은 것이 나오면 안 될 것 같았다. 그냥 할머니를 꼭 한번 안았다.

결혼하고 남편과 다이소에 갔는데 화투가 있었다. 놀러 갈 때 화투 사서 가자. 나 화투 칠 줄 몰라. 내가 가르쳐줄게. 아냐 괜찮아. 고개를 저은 것이 몇 번인데 결혼하고 어르신들 만날 기회가 생기니 화투 얘기를 더 듣는다. 화투 칠까? 화투 가져갈까? 그래 배워볼까 하다가도 화투장을 보면 고개를 젓게 된다. 손에 쥐기가 어려운 것이다. 지금 할 수 있는 거라면 그때 했었어야 했다. 엄마에게 대신 혼날 용기는 있었으면서 그렇게 원하시던 화투 한 번은 왜 안 쳤을까.

할머니, 나도 화투 가르쳐줘 한 마디만 했었더라면. 학교 다녀와서 할머니랑 화투를 치고 웃는 손녀였더라면. 천국에서 다시 할머니를 만나면 말할 수 있는데. 그곳이 너무 좋아 이제 할머니께서 화투는 다 잊으셨을지도 모르겠다. 그저 보낸 사람의 후회인 것이다.


얼마 전 한국에 계신 외할머니께서 폰을 스마트폰으로 바꾸셨다고 했다. 그동안 피쳐폰만 쓰셔서 아직 카톡 사용이 익숙지 않으신지, 어제 외할머니에게서 카톡이 왔는데 3, 3, 3 하고 세 번을 왔다. 우리 할머니 뭘 누르려고 하셨나! 하고 웃으며 답을 보냈는데 아직도 답이 없으시다. 할머니 심심하면 연락해요, 하는데 딱히 연락도 없으시고. 후회를 남기고 싶지 않은데 쉽지 않다. 많이 사랑하고 싶은데 이것이 또 너무 멀다. 하루하루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더욱 상냥해야겠다고 생각하게 된다. 진짜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생각하고 행동하고 싶다. 더 돌아보고 싶고 위하고 싶다. 그리하여 다시 하지 않은 것에 가슴 아프지 않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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