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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현 Jan 31. 2019

놓칠 수 없는 시간

분주함 속에 배운 것

바쁜 연말을 보냈다. 12월 내내 정신없이 보내고 1월을 맞았는데 어느새 벌써 올 해의 첫 달이 지나있었다. 추수감사절 여행을 다녀온 지가 엊그제 같은데. 이 일에 치이고 저 일에 치여 굴러가듯 새 해가 왔다.


연말, 의성이가 많이 아팠다. 등에 아토피가 심하게 일어났는데 첫 시기에 링웜이라고 진단받아 스테로이드 없이 다른 약을 바르며 두 달을 기다렸다. 중간에 얼전 케어를 뛰어다녀왔으나 별 소득이 없었고, 결국 세 달을 기다려 담당 선생님의 리퍼로 의성이는 피부과를 찾았다. 연말이 끼어 예약 요청을 한 두 주 만에야 선생님을 만날 수 있었다. 중간중간 찍어놓은 환부 사진을 보자마자 닥터는 링웜 아닌데, 아토피였네. 하고 스테로이드를 처방했다. 반차를 내고 병원을 찾았건만 닥터를 만난 지 5분도 되지 않아 샘플 약 하나와 처방전을 들고 나와 남편은 쫓기듯 나왔다. 다행스럽게도 스테로이드 효과는 기가 막힐 정도라서 의성이 등은 금세 제 색으로 돌아왔다! 등에 계속 오르던 수포도, 진물도 멈췄다. 긁지 않으니 피딱지도 사라졌고 온 등 가득하던 상처도 없어졌다. 이렇게 금새 나을 것을. 조금만 더 일찍 왔더라면, 조금만 더 신경을 썼더라면. 조금만 더 생각했더라면.



많이 바빴던 것은 내 탓이 컸다. 의성이 돌을 좀 지나 지인에게서 디자인 비즈니스 제안이 있었다. 분명 수요는 있는데 이 지역에 공급하는 사람이 마땅히 없는 일이어서 마음이 혹했다. 그냥 내가 해오던 일을 하기만 하면 되는 일이었다. 의성이를 재우고 좀 더 시간을 쓰면 될 그런 일. 웹사이트를 몇 가지 만들고 시작하려고 준비기간을 내 맘 속에 정했다. 새해부터는 시작하면 좋겠으니, 12월 중에 끝내자. 새해가 3주 남은 시점이었다. 준비하다 보니 일이 시작부터 삐그덕거리고 있었다. 한국 사람을 대상으로 하는 일이다 보니 단가가 도저히 맞지 않았다. 정말 턱도 없이 낮은 가격이었다. 여기서 같은 시간 같은 일을 하고 받을 금액의 1/8도 나오질 않는데 협업 제안하신 분의 말을 들어보면 그것도 높다고 하는 사람들이 있다고 했다. 어안이 벙벙한데 시작하려고 마음먹었으니 끝은 봐야 했다. 시작하면 나올 거야 굴러가면 나올 거야. 아픈 의성이를 챙기고 얼른 재우고, 해야 할 일들을 하고 밤 열 두시가 되어 준비를 시작하면...마음이 그저 갑갑했다. 연말 휴가를 잘 쓰겠다고 낮에는 내리 의성이와 함께 밖을 돌아다녔는데 머리가 다섯 개 정도로 갈라진 기분이었다. 하루 종일 머릿속에선 꼭 해야 할 것 같은 좋은 아이디어가 떠다녔고, 단가를 어떻게 맞춰야 할지 궁리하느라 머리가 터질 것 같았는데 그와 동시에 눈앞에 웃으며 노는 의성이가 너무 예쁜 마음이 한쪽에, 또 얼른 자 줬으면 하는 마음도 한쪽에. 그런 가운데 저 한편에서는 계속 질문이 맴돌았다. 정말 이걸 해야 하나?




연말 휴가를 잘 쓰겠다고 열흘의 긴 휴가를 만들었는데 남편도 마침 방학이었다. 방학인 남편을 집에만 두기 미안해 여행을 계획했었다. 당장 비행기표를 사긴 너무 비싸니 우리 운전을 해서 가자. 의성이가 카시트에 잘 앉아있을지 걱정이 됐지만 크리스마스가 코앞이라 비행기 표 값은 하늘을 찌르니 달리 방도가 없었다. 마침 엄마가 여행으로 자리를 비우셔서 혼자 계신 아빠를 만나러 로드트립으로 친정을 가기로 했다. 쉬지 않고 달리면 21시간의 운전. 정말 괜찮을까? 안될 것 같은데. 의성이는 아픈데, 한 시간만 차에 앉아 있어도 나오겠다고 우는데. 남편이 시조카를 함께 데려가고 싶다고 했다. 아무리 봐도 각이 안 나오는데 남편은 괜찮다고 하고, 믿어보기로 했지만 걱정은 커져만 갔다. 여행을 가려면 웹사이트 준비는 더 일찍 끝내야 하니 3주로 잡았던 준비기간이 7일로 줄었다. 일주일. 내가 밤을 좀 새우면.... 되겠지? 되겠지? 마음에 확신이 서지 않은 일들이 너무 많은데 모든 것을 그저 열심히 굴리고만 있었다.


어느 것 하나도 놓지 못한 채 준비로 몸도 마음도 점점 지쳐가던 때 크리스마스를 이틀 앞둔 날 남편이 물었다. 우리 가는 거 맞지? 순간 가슴속에서 빵 하고 뭔가 터지고 눈물도 같이 터졌다. 남편을 붙들어 앉히고 말했다. 이번에 여행 가지 말자.



연말 휴가의 반 이상을 이미 지친 상태로 보냈다. 여행까지 다녀오면 이게 여행이 아니라 일이 될 것 같았다. 나도 좀 쉬자. 의성이가 너무 보고 싶었다. 매일 같이 있는데도 보는 것 같지가 않았다. 사진에는 얼굴이 같이 있는데 잘 기억이 나지 않았다. 새 해를 맞기 전 대청소를 하고 싶었는데 여행을 다녀오면 이미 새 해일 판이었다. 일이고 돈이고 여행이고 다 필요 없고, 난 이 휴가를 따뜻하고 행복하게, 사랑하는 사람들 얼굴을 보며 지내야 했다. 이렇게 스트레스를 받기 위해 휴가를 낸 것은 아니었다. 일도 여행도 스탑을 걸고 난 뒤, 떨떠름하게 무거운 연말을 보내고 새 해를 맞이하고 나니 내가 무엇을 했는지 보였다.


할 수 있다고 모든 것을 다 해야 하는 것은 아니었다. 할 수 있는 일이 다 내 일인 것도 아니었을 것이다. 지금 내게 있는 것이 충분함에도, 일도 부업도 해내는 사람이고 싶으니 모든 것에 다 손을 댔다. 남편을 기쁘게 하고 싶으니 안 될 것 같은 것도 된다고 하고, 모처럼 협업을 제안해 준 사람을 실망시키고 싶지 않으니 무리해서라도 단가를 맞출 수 없을까 노력했다. 하고 싶은 것은 많은데, 욕심대로 하지 못하니 없던 불만이 생겼다. 불만이 커지니 없던 미움도 생겼다. 다 내 선택이었으되 결국 내 뜻은 아니었다. 끌려다녔던 것이다, 내 욕심에.


새 해 눈이 뜨이고 나니 의성이 등이 제대로 보였다. 병원 예약을 잡고 등 치료를 하고, 일을 제안해주신 분껜 그 가격으론 어렵겠다고 양해를 구했다. 못 간 여행도 그렇게 아쉽진 않지만, 한 번 눈에 보이고 나니 계속 밟혀 마음이 어렵다. 욕심을 내려놓기가 쉽지 않은 터다. 그래도 이제는 마음을 풀어놓을 수 있는 것은 적어도 그때 나를 끌고 이리저리 휘저었던 그 마음이 무엇인지 알고 있기 때문이다. 지금, 내게 놓칠 수 없는 것들이 있다. 우선순위를 내 마음에 잘 새겨놓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일은 언제가 됐던 또 기회가 올 것이다. 넉넉하지 않아도 지금 충분하고 행복하다.


감사하게도 일 쪽으로 찾아주시는 분들이 많아 계속 혹하게 된다. ‘엄마’에 아직 익숙하지 않아 더욱 혹 하는 것 같단 생각이 든다. 처녀 적 욕심을, 인정받고자 하는 마음을, 내 자리를 더 잡아놓고 싶은 오기를 내려놓지 못한 탓이다. 엄마가 됨이, 한 사람의 순간순간을 쥐고 있는 것이 얼마나 크고 중요한지, 또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기쁨인지 아는 데도 아직 예전 버릇이 남아있는 것이다. 이 일만 하면, 이 프로젝트만 하면... 그 욕심이 치고 들어올 때 이제는 잠시 멈추고 한 번 기억하고 싶다. 이제는 일이 내 전부가 아니고, 다른 사람의 인정보다 더 큰 기쁨이 내 바로 옆에 있으며 같은 일을 하더라도 무엇이 가장 중요한지 기억하면서 가야 한다는 것을.


아쉬운 크리스마스였고 아쉬운 연말이었으되 배운 것은 많다. 내가 하고 싶은 것과 할 수 있는 것, 또 해야 할 것. 엄마로서, 또 나로서 앞으로 계속 생각하고 계속 맞추어 가야 할 부분이라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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