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희진의 인터뷰가 내게 준 것들
저는 술, 골프 이런 거 안 했어요. 그저 실력만으로 내가 얼마만큼 갈 수 있는지... 그게 궁금했어요.
지난 한 주는 민희진 기자회견으로 대한민국이 뜨거웠다.
나훈아 '거세 사건(?)', 박준형 '열애 공개'와 함께 3대 기자회견으로 꼽히며, 장장 2시간이나 이어진 러닝타임을 지루함 없이 찰지게 소화해 냈다.
누군가는 그녀의 말 한마디 한마디가, 심지어 쌍욕을 시전 하는 모습조차 직장인으로서의 애환을 진정성 있게 표현한다며 깊이 공감하기도. 누군가는 그래봤자 돈 많은 애들끼리의 권력싸움이라고, 자기 마음대로 회사를 주무르지 못하니 빡쳐서(?) 저런 거라며 못마땅해하기도 한다.
소위 민희진 파워를 느낀 건 기자회견 다음 날이다. 아이들을 어린이집 등원 시키고 버스를 타러 내려가는 길. 중학생으로 보이는 아이들이 등굣길에 민희진 인터뷰에 대해 갑론을박하기 시작했다. 가는 길도 같은 방향이라 그들의 얘기를 좀 더 가까이서 들어보았다.
"방시혁이 너무 하긴 했어. 아일릿 무대 처음 볼 때 나도 깜짝 놀랐다니까? 춤선이 정말..."
"아니 근데. 뉴진스가 잘 됐으니 비슷한 콘셉트를 따라 할 수도 있는 거 아니야? 내가 보기엔 비슷한 부분은 있긴 하지만 아일릿은 좀 더 몽환적인 분위기가 있다고 해야 할까.. 뉴진스가 청량한 포카리스웨트 느낌이라면 아일릿은..."
그들의 나름 전문적인 분석에 한 번 놀랐고, '민희진' 인터뷰가 이 아이들에게도 영향을 끼칠 만큼 임팩트 있는 사건이었다는 점에 두 번 놀랐다.
사실 기자회견 전까지 민희진이라는 사람에 대해 잘 몰랐다. 아니 관심이 없었다. 그저 SM에서 잘 나가는 한 여자가 빅히트로 넘어와 '뉴진스'를 탄생시켰다 정도. '능력 있는 사람이구나'라고만 짐작할 뿐이었다.
일면식도 없는 그녀의 인터뷰는 그간 가슴으로는 알고 있었지만 언어로 표현하지 못했던 '직장과 헤어질 결심'을 구체화시켜 주는 계기가 되었다.
"저는 술, 골프 이런 거 안 했어요. 그저 실력만으로 내가 얼마만큼 갈 수 있는지... 그게 궁금했어요"
그녀의 이 멘트를 들으니 문득 한 사람이 스쳐 지나간다.
ㅣWorking Backwads, 내 삶의 Backwardsㅣ
현재 내가 다니는 회사의 부사장까지 오르셨던 직장상사 L. 태생부터 술을 한잔만 마셔도 벌게지는 얼굴 때문에 정말 기분 좋은 날이 아니면 소주 한 잔 입에 대지 않던 그. 높이 올라가려면 골프가 필수라며 주변에서 수 없이 얘기했지만 실력이 받쳐주면 그런 건 아무런 문제 되지 않을 거라는 걸 몸소 증명하셨던 분.
아랫사람들은 살뜰히 챙겼지만, 윗사람에게는 특히 대표에게까지 쓴소리 하기를 마다하지 않았던..
끝내 자신의 소신대로 행동했으나 그로 인한 대표와의 트러블로, 또한 주위의 이간질(?)과 질투로 인해 그 자리를 지키지 못하고 물러나야만 했던 L이 민희진의 인터뷰와 겹쳐 보였다.
일로 잠깐 논의를 이어가 보자. 난 'Working Backwards'의 관점으로 일하기를 좋아한다. 아마존의 일하는 방식으로 주로 소개되는 이 방식은 소위 말해 '거꾸로 일하기'다. 일을 시작하기에 앞서 미리 기대되는 결괏값을 그려보고 업무를 진행하는 방식이다.
업무를 진행하다 보면 소위 동기부여가 안될 때가 많다. 팀장님이 시켜서, 혹은 상무님이 시켜서.. 시키는 일만 하다 보면 어느 순간 내가 무슨 일을 하는지도 모르겠고, 일할 맛도 나지 않는다.
이럴 때, 이 일의 끝점을 생각해 보는 방식은 큰 도움이 된다. 내가 상상하고 기대한 것 이상으로 결과물을 뽑기는 어렵다. 만약 그런 일이 생긴다면 당신은 행운아다. 하지만 행운은 가끔 가다가 만나는 보너스일 뿐.
나의 직장생활 Backwards를 그려본다.
지금의 일을 꾸준히 해나가며 운이 따른다면 분명 임원이 되어 있을 것이다.
민희진은 인터뷰에서 이런 말을 했다.
"소녀시대, 엑소, 뉴진스까지 성공했어요. 다들 묻더라고요. 혹시 성공할 걸 알았냐고라고요... 전 될 걸 알고 있었어요."
물론 나는 그녀와 다른 사람이고, 그녀처럼 직관, 감각, 실력이 모자랄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취감과 영향력을 원하는 '나'의 성향을 고려했을 때 임원은 할 수 있을 거 같다는 근거 없는 자신감(?)이 있다.
문제는 그 지점에 있다. 애초에 정년퇴직을 운운하며 직장을 오래 다닐 생각은 없었지만 언젠가는 계약직 신세로 전락할 거고. 직장상사 L의 모습이 내 미래의 모습이 될 수도 있다. 물론 직장인으로서는 충분히 성공한 인생이라고 말할 수도 있지만... (하아,, 나도 부사장 되고 싶다)
내가 열심히 해서 훌륭하게 키워낸 사업, 민희진이 뉴진스를 내 새끼라고 칭하는 것과 같이.. 내 새끼와도 같은 서비스를 '과거의 영광'으로만 추억하며 노년을 보내고 싶진 않다.
퇴직을 임박하고 불면증에 시달리던 L의 모습이 선하다. 한 회사의 부사장이었던 그였지만 재계약이 되지 않을까 봐 걱정하던 모습은 영락없이 그도 직장인이라는 걸 보여준다. 소신 있게 발언했지만 뒤돌아서서는 자신의 안위를 걱정하며 밤새 뒤척였을 그의 모습을 생각하니 가슴 한편이 왠지 모르게 아려온다.
ㅣ헤어질 결심, 나 자신의 브랜드로 살아가기ㅣ
10년 이상 꾸준히 해오는 게 있다면 그중 하나가 프리미어리그와 프로야구 시청이다. 특히 야구는 매번 챙겨보진 못하더라도 하이라이트라도 본다.
야구는 소위 투수 게임이다. 그리고 그 투수들마다 승부구가 하나씩 있다. 그리고 대게 승부구는 직구의 비율이 훨씬 높다. 지금껏 에둘러 빌드업을 하고 있지만,,
나의 직구는. 나의 마음속에서 말하고자 하는 내 삶의 직구는 '나 자신의 브랜드로 살아가기'다.
6주 간의 육아 휴직, 미술과 그림이 주는 영감들, 그리고 나 자신과의 수많은 대화 속에서 찾은 결론은 '이 차장, 이 부장, 이상무, 이전무로 불리는 사람이 아니라...'
그저 내 이름 하나가 각인되는. 그 자체가 브랜드가 되는. '민희진' 하나로 다른 수식어가 굳이 필요 없게 만드는 삶을 살아가는 것이다.
그렇게 월급이 주는 달콤함에서 벗어나 온전히 나의 이름으로 살아갈 그 시간을 위해..
주어진 시간을 꽤나 열정적이게 살아내 보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