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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풀림 Dec 04. 2024

하나씩 하다 보면 언젠가 되겠지

차근차근 조금씩

유난히 바쁜 주말 아침이었다. 전날 미뤄둔 설거지는 수북이 쌓여 있었고, 방금 마트에 다녀온 터라 정리해야 할 물건도 한가득이다. 그런데 시간을 보니 벌써 11시다. 설거지와 마트 짐을 뒤로한 채 빨리 점심부터 차려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하필이면 냉동실에 얼려 놓은 밥도 똑 떨어져, 마음이 더 다급해진다. 쌀을 가지러 쌀통을 열어봤는데 아뿔싸, 쌀통마저 텅텅 비었다. 옆에 있는 쌀포대를 낑낑대고 꺼내 쌀통에 붓는다. 잘못 조준했는지 쌀알이 쌀통으로 들어가는 게 아니라, 애꿎은 바닥에 떨어진다. 마치 우박이 내리는 것처럼 후드득, 쏴아 하는 소리와 함께 힘차게도 쏟아진다. 처음에는 너무 놀라 당황했지만 이도 잠시, 갑자기 주저앉아 울고 싶은 마음이 든다. 이미 해야 할 일이 머릿속에 꽉 차있어 조급한데, 이 무슨 어이없는 상황인가. 밥도 해야 되고, 설거지도 해야 되고, 마트 짐도 정리해야 되고, 바닥에 흘린 쌀까지 치워야 되는구나. 아니지, 여기에 추가할 일들도 생각난다. 식기세척기에 그대로 있는 그릇도 치우고, 점심으로 먹을 반찬도 만들어야 한다. 순간적으로 나에게 주어진 일들이 버겁게만 느껴져, 울면서 도망가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이성의 끈을 다시 붙잡고, 마음을 다잡아 본다. 이렇게 주저앉아 있을 때가 아니다. 몸을 움직여서 뭐 하나라도 먼저 해야겠다. 먼저 쌀을 씻고 전기밥솥에 안친다. 마트에서 사 온 고기, 채소, 계란 등을 꺼내 냉장고에 넣는다. 잘 마른 그릇들을 찬장에 하나씩 정리한다. 마음이 다시금 급해져 그릇을 두세 개씩 올리다가 손에서 미끄러질 뻔했다. 조심해야겠다 생각하고 마음을 다잡는다. 개수대의 그릇들은 뽀득뽀득 소리가 나게 박박 씻는다. 많아 보이던 설거지감이 조금씩 없어지는 게 보인다. 속이 다 시원하다. 바닥에 흩어진 쌀알도 치우고, 방금 사 온 고기로 아이가 좋아하는 반찬도 만들어본다. 힘에 부친다고 생각했던 여러 가지 일들을, 하나씩 하다 보니 생각보다 빨리 끝났다. 갑자기 예전에 남편이 이런 내 모습을 보고 건넸던 말이 떠올랐다. 

"괜찮아, 걱정하지 마. 다 할 수 있어. 금방 끝나."

나랑 십수 년을 살아서 그런지, 어떨 때는 나보다 나를 더 잘 아는 그다. 그는 마치 걱정인형처럼, 내가 동동거리고 혼자 불안해하고 있을 때마다 괜찮다 말해줬다. 오늘은 그가 운동을 가고 없어서, 내가 그의 말을 대신 스스로에게 건네본다. 

"거봐, 하나씩 하니까 되잖아. 걱정하지 말랬지?"


깨달음은 예상치 못한 순간에 때때로 찾아온다. 그릇을 정리하다가, 설거지를 하다가 갑자기 알게 되었다. 그냥 큰 욕심 없이 조금씩 하다 보면 언젠가는 다 끝나 있을 거라고. 그게 집안일이던, 운동이던, 회사일이던 어떤 일이든 간에 말이다. 지금은 막막하고 거대한 장벽처럼 보이는 것들도, 쪼개서 차차 하다 보면 별 것 아닌 일이었다고 느낄 때가 온다. 나는 이제 막 필라테스를 시작해 배우고 있는데, 처음에는 학원 안에 있는 기구들이 마치 '고문기구'처럼 느껴졌다. 내 팔과 다리를 늘리고, 나를 괴롭히기 위해 있는 도구랄까. 그러나 회차를 거듭하면서 작은 동작 하나씩 시도하다 보니, 나같이 운동을 싫어하는 사람들도 언젠가는 필라테스와 친해질 날이 올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처음부터 너무 욕심내서 하지만 않으면 말이다. 결국 나를 가로막는 생각들은 '빨리', '잘' 해야겠다는 내 마음이기 때문이다. 주말 오전에 내가 느꼈던 감정도 여기에서 기인했을 것 같다. 엄청나게 많아 보였던 집안일을, 급한 마음에 빨리 해내려고 했던 것. 오히려 이 마음 때문에 아무것도 하지 못하겠다, 할 수 없겠다는 생각이 나를 잠식했던 것이다.


요즘 또 욕심을 부리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내가 어찌 조절하지 못하는 회사 일이 많았다. 워크숍과 내년 계획 수립 때문에 지난 한 달간 정신이 없었다. 이 와중에 코칭 자격증에 도전하겠다고 매일 30분 - 1시간씩 코칭 실습을 하면서, 기존에 해왔던 브런치 글쓰기, 운동까지 하려니 죽을 맛이었다. 결국 강제적으로 꼭 해야만 하는 회사일 빼고 나머지는 거의 손을 놓다시피 했다. 하고 싶은 것, 해야 할 것들은 많은데, 막막하고 답답했다. 하루 24시간은 정해져 있었고, 나름 열심히 아등바등 대며 살고 있다고 믿었다. 이 모든 것들을 다 잘 해내지 못할 바에는 아예 하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돌이켜보니 이것도 '빨리', '잘' 해내고 싶은 욕심에서 기인한 회피 행동이었다. 하나씩 차근차근해나가면 되는데, 꼭 다 하지 않아도 되는데, 남들보다 뭐 그리 빨리 가고 싶었던 걸까. 다 잘해야 된다는 생각이 자꾸만 왜 드는 걸까.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건 희망이 없어진 절망상태가 아닐까. 나처럼 잘 해내려다가 아예 포기하는 사람들을 보면, 해도 잘 안될 거 같다는 희망이 없어서가 아닐까라는 짐작이 든다. 그러나 삶은 길처럼 끊임없이 계속되고, 우리는 언젠가 자신만의 길을 찾을 것이다. 누군가는 이 길을 걸어서 갈 것이고, 누군가는 빠르게 뛰어갈 수도 있다. 내가 해야 할 것은 남들과 비교하지 않고, 내 속도에 맞게 차근차근 나아가는 것이다. 한걸음 한걸음 내딛다 보면 언젠가는 내가 목표한 희망에 도달할 것이기에. 인생은 마라톤이고, 가다가 힘들면 잠시 쉬어가도 된다. 천천히 가더라도,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한 발자국씩 간다면 누구나 완주를 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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