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과 사람 사이엔 거리가 있다. 친구, 동료 사이는 물론이고 부모 자식 간에도 마찬가지다. 부부 사이에도 예외는 없다. 내게서 뻗어나가는 수많은 길 중에 가장 험난한 길로 이뤄진 거리가 부부 사이의 거리인 듯하다. 남편은 만날 수 없었을지도 모를 먼 곳에 있다가 어느 날 나와 가장 가까운 거리에 자리 잡았다. 방송작가와 PD로 만나 담배 냄새나는 지하 편집실에서 출발한 연애였지만 적어도 우리에게 그 시절은 반짝반짝했다.
하나의 프로그램을 만들기 위해 작가와 PD가 만나다 보면 종종 싸울 일이 생긴다. 더욱이 입봉 한 지 얼마 안 돼 마음속에 초조함과 불안함을 숨긴 이들이 모인 프로그램이라면 방송 전날은 그야말로 전쟁터다. 나는 평화로운 것을 좋아하지만 일터에서는 곧잘 싸웠다. 좋은 결과물을 내기 위한 씨름이었다(고 생각한다.) 사실 내 입장에선 의견을 숨기지 않고 솔직히 말했을 뿐이었는데, 상대방은 나를 드센 사람으로 여기기도 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남편과 일할 때는 단 한 번도 싸운 적이 없었다. 취재하면서 '이렇게 촬영하면 좋겠는데' 생각하면 남편은 그렇게 촬영하다 못해 플러스알파를 더해왔다. 촬영본을 보며 이렇게 편집하면 재밌겠다 생각하면 이미 그렇게 그림을 붙여놓았더랬다. 일하는 게 재밌어졌다. 다투는 소리 대신 웃음소리가 났다. 같은 지점에서 같은 고민을 했고, 같은 해결책을 내놓았다.
'세상에 어떻게 이런 사람이 다 있지? 이 정도로 생각이 잘 통할 수 있나?'
그게 우리 연애의 시작이었다.
하지만 일과 사랑, 사랑과 일. 이 둘은 달랐다. 연애를 시작하니 싸움이 시작됐다. 황당했다.
'뭐야, 나랑 엄청 잘 통하는 사람 아니었어? 왜 이렇게 말이 안 통해?'
감정을 소모하는 날들이 늘어났다. 지치기 시작했고 선택의 기로에 섰다. 내가 선택한 방법은 헤어짐. 이 아니라 싸우지 않는 법을 터득하는 거였다.
가장 먼저 우리의 싸움이 시작되는 지점, 발화점을 들여다봤다. 대부분의 사랑싸움이 그러하듯이 모든 싸움은 '처음엔 별 게 아니었다.' 그렇다면 그 별 거 아닌 것들은 어떻게 '별 거'가 됐을까.
답은 뻔했다. 결국, 말 한마디였다. 말 한마디가 잘못 나가면 우리 사이는 손가락 한 마디만큼 멀어졌다. 그래서 그의 행동이나 말에 이해가 가지 않는 부분이 있더라도, 되도록 그의 심기를 건드릴 만한 말들을 꺼내지 않기로 했다. 물론 나도 사람인지라 생각처럼 되지 않아 괜히 심한 말을 꺼낼 때도 있었고 실수를 할 때도 있었다. 하지만 말조심을 하려고 마음을 다잡자 싸움의 횟수도 줄었다.
그러나 인간의 욕심은 끝이 없고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당연히 매일매일이 싸움의 연속은 아니다. 하지만 두 사람 모두 감정을 지닌 인간이기에 서로에게 아쉬움을 줄 때도, 나아가 상처를 줄 때도 있다. 요즘 우리 부부가 암묵적으로 지키고 있는 룰은, 화가 난 그 순간엔 아무 얘기도 하지 않는 것이다. 화가 난 상태에서 말을 하다 보면 안 할 말, 괜한 말, 심한 말을 뱉어버리게 된다. 그러지 않기 위해 서로가 떨어진 채 각자의 자리에서 마음을 가다듬고 생각을 정리한다.
"혼자 생각할 시간이 필요해."
드라마 단골 대사 같은 말이지만 진짜 혼자 생각할 시간은 필요하다. 시간을 가진 뒤 다시 만나면 말조심을 하게 된다. 말을 조심하면, 싸우지 않는다.
티끌모아 태산이라고 했다. 안 좋은 티끌도 모으면 태산이 된다. 한 마디만큼 한 마디만큼 멀어지다 보면 손 닿을 수도 없는 거리만큼 떨어지는 게 부부 사이의 거리다. 우린 괜한 티끌을 모으지 않고 생길 때마다 바로바로 버리기로 했다.
요즘도 다툰다. 하지만 이젠 안다. 저 사람은 내가 아니라는 걸. 남편은 남편이고, 내 생각을 강요할 수 없다. 다만 언제든지 나와 같은 길로 나아갈 수 있도록 마음의 준비를 마쳐두는 사람이라는 것 역시 안다. 말이 안 통하고 맘이 안 통해서 서글픈 날도 있지만, 맘이 잘 맞고 말이 잘 통해 즐거운 날이 훨씬 더 많다.
길을 걷다가 '저 사람 그 배우 닮았네' 생각하면 "저 사람 그 배우 닮았다." 말하는 사람. 갑자기 냉면이 먹고 싶단 생각이 들면 옆에서 "냉면 먹을래?"라고 물어보는 사람. 말하지 않아도 아는 초코파이 같은 사람이다. 맛있는 거 사주는 달달한 인간이라니. 최고다.
결국 딱 한 마디. 딱 한 마디다. 부부 사이가 안 좋다고 하소연하는 사람들의 얘기를 들어보면 누가 원인제공자인지는 상관없이 둘 다 말조심을 하지 않는다. 내가 상처 받았다고 일부러 상처 주는 말을 하면, 파국이다. 잔소리는 해도 큰소리는 내지 말자. 옛말에 틀린 말 하나 없다. 가는 말이 고와야, 오는 말도 곱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