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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가람 Oct 27. 2024

왜곡된 지점 찾기

거꾸로 흘러가본다는 건

지금이 아니면 나를 건져 올릴 수 없을 것 같았다.


법적으로 정해진 청년 나이 막바지를 향해 조금씩 걸쳐 흐르고 있는 사람이다. 같은 나이 또래 사람과 저울에 놓고 견준다면 한없이 가벼워 공중에 뜨는 사람이다. 무게를 맞춰보려고 이것저것 힘껏 끌어다 놓지만 저울의 영점은 달라지지 않는다. 오롯이 내게 흡수된 것들이 아니어서 그런가 보다. 어쩌면 실제 부푼 것은 없는데 내 몸에 붙어 있는 것 같은 착각에 무게가 달라져야 한다고 생각했는지도 모른다. 시간이 흘렀으니 그에 응당한 중심이 자리 잡고 있어야 한다는. 과연 내가 원했던 가운데 축은 무엇이었을까.


서른이 넘으면 혼란, 방황, 번민, 초조와 같은 단어와는 멀어질 줄 알았다. 헤매는 건 20대까지만 해도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20대는 불안정했으니까 30대는 안정을 찾는 게 당연한 수순이라고. 몸과 마음이 닳도록 달리지 않더라도 꼭 그래야만 했다. 무엇이 됐든 요동치는 건 반갑지 않으니까. 불쾌함을 차단하는 것. 원하지 않는 공기가 새어 들어오지 않도록 대비, 경계 태세를 갖추는 것. 언제부턴가 이런 것들이 목적이 되어버린 듯했다. 과연 어느 지점부터 초점이 어긋난 걸까. 내면에 왜곡을 만든 볼록 렌즈를 천천히 걷어내야 할 때인가 싶었다. 멀어져야 한다고 생각했던 표현들과 의미에 멋대로 힘을 가해 구부린 관점을 덧대지 않고 마주 봐야 하는 때.


선명한 기억으로 어린 시절의 내 모습을 덮은 것은 당혹감과 수치스러움이었다. 초등학교 5학년, 서울로 전학 오자마자 바로 다음 날 교내에서 치러지는 수학경시대회를 봤다. 낯선 교실과 처음 보는 친구들, 책상, 의자는 수능 시험장이 되기에 아주 적합한 조건이었다. 맞닥뜨린 운명에 순응하며 자리에 앉아 시험지를 받아 들었다. 초면에 옆사람 답안지를 베끼고 싶을 정도로 초등학생 수학 문제가 맞는지 끊임없이 의심하며 문제를 풀었다. 그 결과는 40점. 심지어 나도 모르고 싶은 점수를 같은 반 친구가 보게 됐다.


초등학교 6학년 수업시간, 교탁 앞으로 불려 나와 영어 단어를 썼다. 아니 쓰지 못했다. 선생님이 요구하는 영어 단어를 막힘없이 칠판에 적고 들어가는 애들과 달리 나는 계속 분필만 들고 있었다. 지금의 나였다면 당당하게 '모르겠습니다'라고 적고 자리로 들어가 앉았겠지만, 그때는 내 생각과 몸을 마음대로 다룰 수가 없었다. 칠판 앞에 꼼짝 않고 발이 묶여 벌거숭이 모습으로 웃음거리가 된 것 같았다. 분명 친구들과 선생님을 등지고 서 있었는데 누군가 내 몸을 돌려 세운 듯한 기분은 무엇 때문이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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