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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바닐라맛 교향곡 Dec 27. 2020

형 만한 아우 없다-[쾌락독서]를 읽고

1. 내게 있어 책 읽기의 세 가지 형태

  책을 읽는다는 행위는 그 자체로써 일종의 명상에 가까운 것 같다. 이는 내게 책을 읽는다는 행위가 상상력의 자극제로서 제일 먼저 다가왔다는 점에 기인한다. 주위의 세계에 집중력의 장막을 드리우고 책의 세로 침잠해 들어가다 보면, 스스로가 철학자나 사회과학자가 되기도, 우주를 항해하는 우주비행사가 되기도 한다. 그와 동시에 주위의 소리나 다른 자극들은 희미해져 간다. 로빈슨 크루소를 읽으며 주인공과 하인 라이데이가 사는 섬의 요새를 직접 만들고 살아 보기도, 해리포터 시리즈를 읽으며 마법학교 호그와트에 스스로 입학해 어둠의 마법사들과 결투를 하기도 했다. 어린 나에게 있어 책이란 그 어떤 것과도 비할바 없는 VR이었던 셈이다. 그래서 해리포터 시리즈의 영화가 개봉했을 당시 다른 아이들과는 다르게 극심히 실망했었던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왜냐하면 내가 상상했던 호그와트 성의 모습보다 영화상의 성이 규모나 복잡성 면에서 열등하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내 머릿속의 성이 더 멋진데... 이를 어찌 설명할 방법이 없네...

  


  그러다 비단 책들 중에는 상상력을 자극하는 종류도 있지만, 보다 현실적인 문제를 직면한 것들도 많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중학교 무렵부터는 초등학교와는 다르게  책을 비판적으로 읽기 시작했던 것이다. 책의 중심 주제를 잘 정리하고 그것들을 뒷받침하는 논거들을 갈무리한 뒤 무엇이 잘못되었는지를 비판하는 것은 중학생인 나에게 전술한 상상력의 독서만큼이나 매력적인 행위였다. 이 논거는 지나친 비약이고, 이것은 반대 증거를 통해 반박이 가능하고, 저 주장은 사실에 기반하고 있지만 당위적으로 받아들일 수 없다는 등, 중생인 내게 비판적 읽기란 일종의 모의전이었다. 비판을 통해 살아있음을 느꼈고, 역사 속에 위대한 족적을 남긴 사상가/학자들과 동등한 테이블에서 토론하는 영광을 누렸다. 책을 통해서 난 많은 인류사의 거인들과 지성을 겨룰 수 있다. 그들의 생각을 읽고, 동의하거나 비판하는 과정에서 나 자신만의 신념이 더욱 단단해진다. 마치 수백수천의 담금질을 통해 단단해지는 강철과 같이 말이다.

 

  내가 마지막으로 눈뜬 독서의 양태는 정보의 습득이다. 이러한 형태의 독서는 필연적으로 고된 노동의 일환이다. 왜냐하면 어떠한 정보를 책으로부터 습득해 자신의 것으로 만든다는 것은, 비단 그 책을 읽는다는 측면의 문제만이 아닌, 그것을 체화하여 자신의 것으로 온전히 소화하는 과정까지도 일컫는 과정이기 때문이다. 물론 어떤 책을 빠르게 읽고 그 내용을 소화하고 외우는 소위 '천재'들도 있지만, 난 그들과는 거리가 멀었다. 책 내용을 곱씹어보고, 때로는 문장의 구조 자체가 납득하기 어려워 처음으로 되돌아가 주어를 찾아보는 등의 노력을 통해서야 내 전두엽이라는 석판에 지식을 새겨 넣을 수가 있다. 이러한 독서의 장점은 무엇보다 필요할 때 빠르게 지식을 꺼낼 수가 있다는 것이다. 정보의 바다인 인터넷에서 빠르게 찾아본 뒤 잊어버리는 '지식의 소비'와는 다르게, '지식의 체화'는 자다가 벌떡 일어나 물었을 때에도 대답할 수 있고, 그것을 무한히 응용 가능하게 만드는 나름의 특장점이 있다. 대학교에서 배운 역사적 지식과 법학전문대학원에서 습득한 법학지식은 읽고 외우는 것에 방대한 시간이 들었지만, 이제는 역사와 법학에 관한 이야기라면 나름의 자신감을 가지고 이해하거나 설명할 수 있게 되었던 것이다.



2. 한 번쯤은 읽어볼 만한 책

  나의 독서와는 다르게 [쾌락독서]의 저자 문유석 판사에게는 전술한 세 가지 독서형태는 보이지 않는다. 그의 독서는 자칭 '짜사이 판별법'이다. 즉, 중국집에서 짜사이가 맛있는지의 유무에 따라 식당의 전반적인 맛을 유추해 볼 수 있는 것처럼, 책 또한 처음의 몇 페이지를 읽어봄으로 인해 전반적인 독서의 만족도를 예측해 볼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문유석 판사는 이러한 판별법으로 자신이 재미있게 읽겠다는 책만 골라서 읽는다고 한다. 나로서는 동의할 수 없었다. 내게는 재미가 없어도 훗날 피가 되고 살이 되기 때문에 읽는 책이 있으며, 처음에는 지독하게 재미가 없었더라도 다 읽고 나서야 깊은 울림을 주머 다시금 읽게 만드는 [월든] 같은 책도 있기 때문이다. 책을 표지만으로 평가하지 말라는 격언도 있지 않은가? 문유석 판사는 분명 처음의 몇 이지는 읽어본다는 점에서 책을 표지'만'으로 평가해지는 않는다. 다만 그럼에도 책을 첫인상만으로 판단한다는 것은 그 자체로서 잔인하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문유석 판사의 [쾌락독서]는 읽어볼 가치가 있는 책임에는 분명하다. 그는 특유의 (판사답지 않은) 간결하고 시원시원한 문체로 독서라는 행위 그 자체의 미덕을 칭송하기 때문이며, 이는 지극히 공감할 만하기 때문이다. 그령 그는,


"책은 수용하는 속도를 내가 주체적으로 결정할 수 있다. 수동적으로 받아들이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능동적으로 끊임없이 생각하도록 자극받는다. 내 경우, 좋은 책을 읽을 때면 머릿속에서 끝도 없이 꼬리를 물고 여러 가지 생각이 떠올라서 읽다 멈추기를 반복하게 된다. 기억하고 싶은 구절을 발견하면 포스트잇을 붙이거나 귀퉁이를 접기도 한다. 지나고 보면 바로 이 멈추었던 순간들이 독서 경험의 핵심이다. 수동적으로 내 감각 속으로 들어왔다가 빠져나가고 마는 것들은 흔적을 남기기가 쉽지 않다. 하지만 잠시 멈추고 생각하게 만들었던 것은 내 것이 된다." [쾌락독서], p.174

라고 말하기도 하는 것이다.



  나 또한 단순히 책을 '읽기만'하는 것은 남는 것은 남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해왔다. 책을 읽고 그 이후 내용을 곱씹어 자신만의 것으로 만들어 다시 글로써 토해내는 과정을 거친 책일 경우에만 온전히 내 것으로 만들었다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슬램덩크]에서 위로를 얻거나, [상실의 시대] (노르웨이의 숲)를 읽고 젊은이들의 공통적인 욕구인 인정욕과 성욕을 떠올린다는 점에서 지극히 동의할 수 있는 서평들을 짤막짤막하게 배열해 놓았다. 그러한 점들에서 [쾌락독서]는 읽어서 나쁘지는 아니한 책이다.


3. 판사의 글 읽기와 글쓰기-권위에 호소하는 오류

  문유석 판사의 [쾌락독서]를 당직근무를 서던 한 간부께 추천해 드린 적이 있다. 다음날 아침 들은 짧은 감상평인즉슨, 책 자체로서는 재미있고 더할 나위 없이 유익할 수 있겠으나, 작가가 어떠한 사람인지를 알게 되는 순간, 독자인 자신이 초라해지는 책이라는 것이다. 나아가 저자의 독서량이 워낙 방대하다 보니, 저자가 언급하지만 독자로서는 전혀 공감하고 이해할 수 없는 내용이 많았다는 것이다. 충분히 동의할 수 있는 평가였다. 독서가 단순히 정보의 일방적인 습득이 아니라고 상정한 뒤, 전술한 세 가지 양태 (상상력, 비판력, 정보의 습득)를 적극적으고려하며 읽는다면, 필연적으로 작가가 글 뒤에 숨에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는 그 작가가 누구인가로 선결되는 측면이 강하기 때문이다. 사회적으로 명망 높은 사람의 책은 읽었을 때 자신의 마음대로 상상하기도 어렵고, 비판적으로 읽기도 힘들다. 일단 유명해지면 똥을 싸도 사람들이 손뼉 쳐 줄 것이라는 속된 표현도 있지 않은가? 다시 말해 같은 이야기를 하여도 저자가 어떠한 배경을 가진 인물인가에 따라 메시지 자체가 달라질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문유석 판사의 [쾌락독서]는 서울대 법대를 졸업하고 사법고시를 매우 우수한 성적으로 통과한, 소위 '천재'라는 양반의 독서를 통한 신선놀음이라고도 평가할 수 있다. 범인이 말하는 '나는 읽고 싶은 책만 읽는다.'와 판사님이 말하는 '나는 읽고 싶은 책만 읽는다.'는 그 지향점이 명백히 다르다. 같은 [슬램덩크]를 읽어도 판사가 읽고 감상평을 적으면 뭔가 있어 보인다. 논리적으로 메신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전하려는 메시지 그 자체가 중요함을 우리는 익히 들어 알고 있다. 다만 인간의 본성은 어느 정도 권위에 의지하는 점이 응당 존재하는지라 진정한 의미의 정신적 탈권위화는 어쩌면 불가능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므로 같은 내용의 글이라도 중학생이 만화책을 읽고 쓴 감상문이 무시당할 가능성이 높은 반면, 현직 판사가 쓴 감상문이라 하면 사회적인 함유성을 강하게 띌 것 같은 '느낌적인 느낌'을 받는다. 분명 좋은 메시지도 많지만 딱히 특별할 것도 없는 이 책의 내용이 의외로 많은 이들에게 강하게 어필하는 것에는, 판사라는 양반 또한 우리와 같이 평범한 범인들과 비슷한 책을 읽고 사유한다는 점에서 대중이 잔잔한 위로를 받기 때문이지 않을까 한다.




 

판사님이 공인하신 좋은 책이다!




4. 평가

  문유석 판자의 다른 책 [개인주의자 선언]읽고 깊이 공감했던 기억이 난다. 나 또한 법학도였기 때문이었고 나름의 개인주의자였기 때문에 읽어가는 내내 감탄을 금치 못하며 독파했었다. 반면 이번이 읽은 [쾌락독서]는 [개인주의자 선언]만큼의 감동을 주지는 못한다. 형 만한 아우 없다고 한다. 책 읽기를 예찬한 도서들은 이미 많고, 그중에서 내가 공감할 수 있는 책도 많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작가 자신이 엄청나게 지적으로 뛰어남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방대한 독서량이 그저 '난 재미있는 책을 읽었을 뿐인데 어느 사이엔가 엄청나게 읽어버렸네'라는 시큰둥한 이유로 퉁쳐지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 차라리 자신의 뛰어남은 일정 부분 인정한 이후, 평범한 우리 독자들을 위해서 어떠한 자세로 글 읽기에 흥미를 붙일 것인지, 혹은 보다 많은 사람들이 공감할 수 있는 주제를 가지고 보다 소수의 책을 깊이 있게 다루었으면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지나치게 많은 책을 본인만의 뛰어남으로 반쯤 소화시켜 그 책들의 '느낌적인 낌'만을 갈무리해 독자들에게 전하는 책이었다. 이 책을 사비를 들여 구입해 읽지 않아 운이 좋았다고 할 것이다.








* 이 감상평은 국방부의 진중문고를 읽고 작성되었음을 밝힙니다. 양질의 책을 장병들에게 제공하는 국방부에 감사의 인사를 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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