꼬마가 보는 '가짜뉴스'
처음 가짜뉴스라는 말을 접했을 때는 꽤 장난스러워 보이는 말인 ‘가짜’와 꽤 진중해 보이는 말인 ‘뉴스’가 합쳐져서 이질감이 드는 단어라고 생각했다. 언론에 대해 공부하던 시절 가짜뉴스의 실체를 알고 괜히 심각했던 이유는 굳이 따지자면 장난스러운 쪽이 아닐까 했던 과거의 나를 떠올렸기 때문이다.
‘사실 인간은 언제나 탈진실(post-truth)의 시대 속에서 살아왔다. (중략) 호모 사피언스가 지구를 정복할 수 있었던 진정한 이유는 그 무엇보다 허구의 이야기를 창조하고 퍼뜨리는 독특한 능력 덕분이었다.’
<가짜뉴스의 고고학>이라는 책에서는 이렇게 말한다. 특히 첫 문장은 내가 2년 전 가짜뉴스에 대해 공부할 때 했던 생각을 정리해 준 것 같았다. 당시의 가짜뉴스를 수집하던 나는 과연 내 주변에 완벽한 진실은 무엇인지에 대해 의심하다가 지치고 말았던 것이다. 내가 지금까지 엉뚱한 것을 진실이라고 믿고 있는 것은 아닌가. 내가 믿고 있는 진실은 누가 만들어낸 것인가. ‘뉴스’라는 단어에서 주는 완벽한 공적 이미지에도 불구하고 현시대에서 가짜뉴스를 만들어내는 사람들은 흔히 ‘기레기’라 불리는 기자들만이 아니었다. 한때는 뉴스라는 것을 단순히 소비할 뿐이었던 일반 사람들이었다. 그리고 그 말을 저 책의 두 번째 문장이 증명해준다. 세상은 많이 변했다. 전문적이고 특정 자격을 갖춘 사람들만이 뉴스를 생산해낼 수 있는 시대는 갔다. 이제 뉴스는 상호작용적이며 생산자와 소비자의 기준이 모호해진지는 오래다. 누구나 뉴스를 만들고, 손쉽게 유포할 수 있다. 심지어 공적 기관에서 생산하는 뉴스보다 더 관심을 끌고, 자극적이며, 사람들의 호응을 쉽게 얻어낸다. 그리고 그것이 곧 ‘돈’이 되는 시대다.
가짜뉴스라는 것은 기존의 오보나 패러디, 루머 등과는 다른 점이 많다. ‘의도’를 가지고 ‘거짓 정보’를 퍼뜨린다는 것이다. 예전에는 정치적이거나 사회적인 이유의 ‘의도’를 가졌지만 현재 문제가 되는 것은 ‘의도’가 돈이 되어버린 사람들이다. 사람들의 클릭과 관심에 따라 돈이 늘어나거나 줄어드는 시스템에 대응하기 위해 사람들은 더 자극적이고, 선정적이며, 강력한 허위정보를 늘어놓는다. 그렇게 되면 전문적인 저널리즘 교육을 받지 못한 사람들은 진실과 거짓의 구분을 명확히 하기도 전에 하나뿐인 선택지가 만들어지게 되는 것이다. 요즘은 탈진실, 혹은 가짜뉴스에 대한 인식이 높아지며 고를 수 있는 선택지가 하나인 예전과는 다르다. 그 대신 수많은 선택지가 생기거나 아니면 아예 진실을 포기하는 더 최악의 상황이 생겼다. 전에 봤던 한 영상에서 출연자가 하던 말이 기억난다. “너무 요즘 힘들지 않아요? 진실과 관련해서 힘듦을 겪지 않아요?” 수많은 정보 속에서 무엇을 믿어야 할지 고민하고 사실들을 의심하는 그 상황에서 이런 현상은 오히려 당연한 흐름일지도 모르겠다.
내가 처음 가짜뉴스를 공부할 때까지만 해도 가짜뉴스의 중심지는 바로 SNS의 대표주자인 페이스북이었다. 페이스북은 소셜미디어 영역에서 가장 높은 이용률을 보이는 서비스라는 점에서 중심에 설 수밖에 없다. 최대한 많은 사람들의 눈에 띄어야 하고, 공유가 쉬운 장소라는 점에서 봤을 때 사실 페이스북보다 가짜뉴스에 최적화된 곳은 없다. 심지어 전세계가 이용하는 검색엔진인 구글보다도 2배 정도 높게 페이스북에 가짜 뉴스 확산의 책임이 있다는 조사 결과도 있다. 페이스북뿐만 아니라 가짜뉴스의 발원지가 되는 많은 소셜미디어들은 가짜뉴스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이지만 한계가 있다. 애초에 자유롭게 정보와 소식을 공유하라고 만든 매체에서 정보 공유를 제재한다는 것이 가능한 일인지에 대한 우려가 큰 것이다. 뉴스 전문가들 중에는 소셜미디어가 뉴스를 생산해내기에 적합하지 않다고 생각하는 전문가도 꽤 큰 비중을 차지한다. 그 이유 중 하나가 뉴스의 공적 이미지가 가벼운 소셜미디어에서 다뤄지기에는 어렵다는 것이다. 그러나 소셜미디어를 주로 사용하는 층을 분석해보면 대부분 젊은 층에 몰려있다. 공적 기관에서 다루는 뉴스보다는 소셜미디어를 훨씬 많이 소비할 수 있는 사람들이 많다는 의미가 된다. 게다가 우리는 언제나 ‘탈진실의 시대’ 속에서 살아왔는데 이제 와서 가짜뉴스가 급부상한 이유를 생각해봐야 한다. 그것은 미디어 플랫폼의 변화와 무관하지 않다. 위에서 언급한 페이스북의 특징이 모든 소셜미디어의 특징과 동일하다고 했을 때 그만큼 강력한 매체는 없다. 사람들은 가짜뉴스의 헤드라인을 보고 그것이 정확한 정보로부터 나온 것이라고 인식할 확률이 높다는 결과가 있다. 이는 흥미와 관심으로만 시작된 소셜미디어식 뉴스 소비 행위가 낳은 결과라고도 볼 수 있다. 더구나 뉴스를 소비하는 입장에서는 그런 것이 별로 중요하지 않다. 흥미로운 것인지, 자신들의 관심사와 관련이 있는지 등에 먼저 반응한다. 진위 문제는 그 다음이다.
하지만 가짜뉴스를 바라보는 시각은 여러가지다. 위에서 언급한 책에서는 가짜뉴스를 정보 생태계의 한 축으로 봐야 한다고 주장한다. ‘형식과 내용을 모두 기만하는 가짜 정보’라고 말하는 국내 학계와는 조금 다른 시각이다. 나도 국내 학계와 시각을 함께한다. 가짜뉴스는 뉴스를 소비하려는 입장을 가진 사람들을 기만하는 거짓이다. 진실과 거짓을 구분할 수 없는 사회는 잔인하다. 탈진실의 시대에 살아가고 있는 것이 인간들인 만큼 그들을 벗어나기에는 무리가 있을지 모르지만, 혹은 진실과 거짓을 정의하는 것 자체가 불가능한 일일지도 모르지만 최소한 진실과 거짓을 구분할 수 있는 시각을 가진 사람들에게는 진실과 거짓이 보일 수 있게 해줘야 하는 것이 정보 생태계의 역할이 아닌가. 정보는 쏟아져 나오지만 아는 정보는 아무것도 없는 이 모순 속에서 우리는 진실을 추구할 권리를 찾아야 한다.
가짜뉴스 방지를 위한 많은 대책들이 마련되고 있지만 텍스트에서 동영상으로 그리고 또 다른 형태로 끊임없이 그리고 빠르게 성장하고 있는 가짜뉴스들을 대처가 따라잡기에는 무리가 있다. 그들은 너무나 창의적이라 예방과 차단은 거의 불가능하다고 봐야 하기 때문이다. 실제로 가짜뉴스의 새로운 중심지로 떠오르고 있는 유튜브는 필터링 기능을 도입하고 인공지능 기술을 융합하는 등 여러 노력을 기울이고 있지만 유튜브의 서비스 규모가 커지면서 가짜뉴스를 포함한 유해 콘텐츠를 완전히 제거하기는 사실상 불가능할 것이라고 밝혔다. 하지만 그렇다고 손 놓고 가만히 있을 수는 없다. 가짜뉴스를 최소화할 방안을 모색하는 반면 가짜뉴스가 떠오르는 즉시 사실로 정정하는 즉각적인 시스템이 필요하다. 또한 ‘진실과 거짓을 구분할 수 있는 시각’을 모든 사람들에게 제공해 줘야 한다. 특히 미디어 리터러시 교육이 좀 더 필수적으로 행해져야 한다. 이제 저널리즘은 더 이상 관련 직종 사람들만 교육받아야 할 부분이 아니다. 뉴스는 이제 생산자와 소비자의 기준이 분명하지 않기 때문에 모든 사람들에게 행해져야 한다. 특히 10대들에게는 좀 더 꼼꼼한 교육이 필요하며, 학교 측에서 적극적으로 교육해야 하는 시스템이 구축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현재도 가짜뉴스로 인한 혼란이 매일매일 야기되는 시대인데 앞으로는 더욱 가혹한 사회적 대가를 치르게 될 수도 있을 것임을 예상하기란 어렵지 않다.
가짜뉴스는 언제나 사회적 혼란과 함께한다. 이번 코로나19와도 함께했다. 코로나19와 관련되어 접한 가짜뉴스가 수도 없이 많으며 그에 관련된 정정 정보도 수도 없이 봤다. 정말 터무니없는 정보부터 그럴싸한 정보까지 너무 많아서 정정 정보조차 믿어도 되는 것인지, 이것도 거짓은 아닌지 고민하게 되는 것이 순서가 된 기분이다. 가짜뉴스를 없애기란 쉽지 않고 어쩌면 가짜뉴스가 있었기에 인간이 이만큼 성장할 수 있었을 지도 모르지만 누군가에게 상처를 주고, 누군가를 기만하고, 누군가를 분노하게 하는 가짜뉴스는 이제 줄어들어야 할 필요가 있다. 미디어 플랫폼의 성장이 이토록 마음 아픈 성장을 동반한다니 어떻게 보면 슬프고, 어떻게 보면 새롭다. 가짜뉴스가 언젠가는 웃어넘길 수 있는 명백한 거짓으로 보이는 그날까지 우린 언제나 진실과 거짓을 구분하는 눈을 쉬어서는 안 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