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화기를 충전하듯이 막간의 충전을 소망한다. 지금 이 순간은 유일하다
벌써, 아니면 어느덧?, 12월이다. 붙잡으려다가도 나무에서 한 잎 두 잎 떨어져 땅바닥에 앉혀질 때 나는 ‘툭’ ‘툭’ ‘탁’ ‘탁’, 소리가 좋아 잎이 떨어지는 숫자만큼, 딱 그만큼 만 눈물을 주르륵 주르륵 흘린다. 60 넘은 젊은 노년의 ‘가을을 보내는 눈물’이라고, 노래 제목 같은 이름을 붙여 보았다.
시간을 너무 과식하지 않고 조금만 비워두기로 했다. 12월이기 때문이다. 늦가을이 지날 무렵이면, 진심을 넘치도록 먹어서 마음속 빈 동그라미를 성찰로 채운다고 했던 사람이 있었다. 하지만 그 사람은 성찰의 시간을 마무리 짓지 못하고 몇 년 전 딱 이맘때쯤 가을 낙엽처럼 먼 곳으로 떠났다.
이제 그를 향한 그리움마저 희미해지는데, 기억의 끝자락인 것 같아 괜히 다시 추억을 끄집어낸다. 잘 다녀왔던 여행지에서 서슴없이 샀던 스티커를 여행 가방에 붙이는 것처럼 그리움을 곁에 머물게 하는 12월이니까.
희한하게도 인생의 액자는 12월이 오면 만들어지는 것 같다. 봄꽃만큼 아름다운 낙엽과의 이별이 마무리되는 12월, 겨울의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한다.
12월은 ‘막간(幕間)’의 시기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막간은 ‘어떤 일의 한 단락이 끝나고 다음 단락이 시작될 동안’ 또는 ‘연극에서, 한 막이 끝났을 때 다음 막이 시작될 때까지의 시간’을 의미한다. 막간의 정해진 시기는 없다. 하지만 유난히 막간의 사용을 되짚어볼 시점은 있다. 바로 12월. 겨울이 본격화되고, 새해의 시작을 준비하는 시점 말이다.
사람은 막간을 잘 만들고, 제대로 사용해야 인생이 거칠어지지 않는다. 막간 사용법은 곧 인생의 처방전이다. 당연히 막간의 사용법이 따로 정해져 있지 않다. 막간을 이용해 음악을 듣고, 글을 쓰고, 그림을 그리고, 커피를 마시고, 차를 마신다. 스스로가 알아서 만드는 것이다.
무라카미 하루키는 “갓 구어낸 식빵을 뜯어 먹을 때 소소한 행복을 느낀다”고 했다. 제대로 막간을 사용한 사례라고 할 수 있다. 막간은 삶의 질을 튼튼하게 만드는 영양분이다. 그래서 막간의 좋은 사용법은 소소하고 작은 행복에게 질이 좋은 영양소가 되는 것이다. 작고 소소한 행복들이 모아지면 행복의 동그라미는 커질 수밖에 없다.
나의 막간 사용법은 음악을 듣는 것이다. 그렇게 된 계기가 있었다. 초등학교 시절이었다. 어느 추운 날의 조회시간이었지 싶다. 여린 소녀가 얌전하게 단상으로 올라왔다. 긴 머리를 정갈하게 땋아 시골 아이답지 않게 무척 단정했다. 하얀 얼굴은 자외선에 노출돼 새까만 우리와 많이 달라 보였다.
그 아이는 전교생 앞에서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여지껏 들어본 적 없는 맑고 곱고 예쁜 목소리였다. ‘아빠하고 나하고 만든 꽃밭에 채송화도 봉숭아도 한창입니다~’.
나는 지금도 그때 그 목소리와 그 노래를 기억한다. 그날 그 소녀의 아우라에 기가 눌렸던 기분도 여전히 생생하게 남아있다. 나중에서야 그 소녀가 우리 학교 교장 선생님의 딸이었고, 도시에서 전학을 왔고, 그리고 신고식을 하듯 노래를 불렀다고 들었다. 교장 선생님의 훈화가 길어지면서 학생들이 웅성거릴 때 소녀의 노래는 막간의 비타민처럼 녹아들었다. 친구들의 구시렁거림은 이내 환호성으로 바뀌었다.
그리고 5학년 때였다. 나와 몇몇 친구들이 방과 후에 담임 선생님 댁에 놀러 간 적이 있었다. 선생님이 내놓으신 간식을 주변 눈치를 보면서 먹었던 기억, 쑥스러움이 많았던 어린이들은 선생님과 서슴없는 대화를 나누지 못했다. 염치를 내걸은 부끄러움 만 방안에 가득했다.
나누었던 이야기의 내용은 기억에 없지만, 나는 노래 한 곡을 불렀었다. 당연히 선생님이 시키셨을 것이다. ‘엄마가 섬 그늘에 굴 따러 가면 아가는 혼자 남아 집을 보다가 바다가 들려주는 자장 노래에 팔 베고 스르르르 잠이 듭니다~’.
숫기가 없던 꼬맹이었다. 나는 선생님을 등지고 노래를 불렀다. 노래를 마치자 선생님이 말씀하셨다. “코에 땀이 맺혔겠구나!” 사제간 만남에서 나의 노래 한 곡은 막간의 어색한 분위기를 두루마리 휴지풀리듯 풀어냈다. 여기서 막간의 음악은 방 공기의 위압적 통제를 해방시키는 존재와 같았다.
한편 긴 인생에서 삶 멀미가 날 때 막간을 잘 사용하는 법은 바로 여행이다. 삶은 자유의지와 무관한 경우가 많다. 사람한테 깊은 진실은 숨어서 보이지 않을 때가 있다. 여행은 아니다. 개인의 의지가 있어야 여행을 떠날 수 있다. 그래서 여행을 떠나면 생각의 방향이 나에게로 향한다. 여행은 인생의 막간에 의미심장한 요소가 되고, 구겨진 삶을 펼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된다. 12월의 여행이 많아지는 이유이기도 하다.
김영하 작가는 <여행의 이유>에서 “내가 여행을 정말 좋아하는 이유 중 하나는 과거에 대한 후회와 미래에 대한 불안, 우리의 현재를 위협하는 이 어두운 두 그림자로부터 벗어날 수 있기 때문이다.”라고 썼다.
천만 근의 무게가 나의 육신을 억압하고, 바깥 세상은 만추의 설레임이 마구 작동할 때였다. 충주로 여행을 떠났다. 커피 한 잔을 마시러 찾아간 카페는 편견을 바꿔줄 만큼 신선했다. 식사를 하기 위해 찾아간 식당은 기쁜 충격이었다.
카페는 가을 수채화 같은, 아주 특별했다. 분명 처음 만난 곳인데, 옛날에 살았던 집이 포개어졌다. 자리를 잡고 고착 커피 한 잎에도 행복이 빛이 나는 것 같았다. 여행 동반자의 표정도 나와 다르지 않았다.
식사 장소는 현재와 타협하지 않아 돌아온 옛날 같았다. 순한 흑백사진처럼 삶의 흔적이 여기저기에 가득했다. 도대체 나쁜 기운은 어디서도 찾을 수 없을 것 같았다. 5대째 걸쳐 살아왔던 집에서 식사를 한건데, 100년이 됐다는 씨간장으로 밥을 비볐다. 옛날이 하나도 상하지 않았다.
그러니 여행을 하는 이유는 무엇을 찾으러 가는 것이 아니라 만나러 가는 것이 아닐까 싶다. 여행은 황폐해지는 인생의 막간을 채워가는 사적 비즈니라고 하면, 너무 나간건가! 여행은 지친 삶의 회복과정이고, 삶의 아픈 경험과 상처를 치유하는 과정이 된다. 치료 후에는 또 새로운 시작을 위한 행동의 준비태세를 완성할 수 있다.
가수 정동원의 <여백>이라는 곡에는 이런 대목이 있다. ‘전화기 충전은 잘 하면서 내 삶은 충전하지 못하고 사네/ 마음에 여백이 없어서 인생을 쫓기듯 그렸네/ 마지막 남은 나의 인생은 아름답게 피우리라//’.
나는나는 전화기를 충전하듯이 막간의 충전을 소망한다. 지금 이 순간은 유일하다. 다시 찾아오지 않는다. 인생의 막간을 순수하게 사용하는 법, 그것은 삶이 어두워질 때 빛을 찾듯이, 일상의 부담이 자신의 몸무게를 넘어설 때 깨달음을 찾듯이, 해결이 쉽지 않은 난제와 만났을 때 정답지를 들여다보듯이, 그렇게 바로 그 순간에 사용하면 된다.
막간의 행위는 흩어져있던 인생의 구슬을 보석처럼 꿸 수 있는 마법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