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는 성장할 필요가 없었던 소녀의 성장기
2025년 Saturday Book Club 독서 모임 선정 도서였던 [새의 선물]을 2026년에야 집어든데에는 몇가지 이유가 있다.
작년에는 일을 핑계로 고작 한달에 한번 있는 독서모임에 열성적으로 참여하지 못한 것에 대한 반성과 2026년에는 이제 다시 착실하게 책을 읽어보겠다는 다짐이기도 했고, 너무나도 자극적인 일상을 중화시켜줄 무해하고 순수한 글이 필요하기 때문이기도 했다.
이 소설은 독서 모임 멤버 중 한명이 인생책으로 꼽는 소설이기도해서 미지근한 기대감을 안고 독서를 시작했다.
이 소설의 화자인 진희는 고창의 어느 시골 서흥동 감나무집에서 할머니, 영옥 이모, 삼촌과 함께 사는 12살의 소녀이다. 정신질환을 앓다 삶을 마감해버린 엄마와 어디론가 떠나버린 아빠로 인해 삶이 본인에게 그다지 호의적이지 않다는 사실을 일찍 깨달아버린 진희는 그런 본인의 삶에 거리를 두기로한다. 삶에 냉소적일 수록 삶에 성실하게되는 인생의 모순 또한 일찍이 알게된다.
자신의 삶에 냉소적이기를 기꺼이 선택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가만히 있기만 해도 불행이 닥쳐올 때, 그리고 그것이 연속적일 때, 삶이 손에 쥐어주는 것이 낙담과 실망뿐일 때, 그 삶의 주인은 냉소적이어지도록 본인 삶에 의해 강요당하는 것이다. 더이상 아무런 희망도 가지지말라고 삶에 의해 적게나마 남은 희망마저 토해내도록 쥐어짜지는 것이다. 하지만 그 건조하고 힘든 삶에 이전에는 없던 실낯같은 빛줄기가 보이면 그게 삶이 나로부터 꽁꽁 숨겨두려다 실수로 삐져나온 행복의 끄트머리인가 싶어서 거기에 모든 걸 걸어버리는 것이다.
그래서 삶에 냉소적일 수록 삶과 사랑에 집착하게 되는 것이 그다지 대단한 아이러니가 아니라고 이야기하는 진희의 말에 공감하게 된다.
17P. 사랑에 대해 아무것도 기대하지 않는 사람만이 쉽게 사랑에 빠지는 것이다. 스리고 사랑을 위해 언제라도 모든 것을 버리겠다는 나의 열정은 삶에 대한 냉소에서 온다. 나는 언제나 내 삶을 대수롭지 않게 여겨왔으며 당장 잃어버려도 상관 없는 것들만 지니고 살아가는 삶이라고 생각해왔다. 삶에 대해 아무것도 기대하지 않는 사람만이 그 삶에 성실하다는 것은 그다지 대단한 아이러니도 아니다.
784P. 그 시절 나는 누군가에게 빰을 맞고 종일 반찬을 만들면서 경쾌한 허밍으로 이렇게 중얼거리곤 했다. 내가 불행하다는 생각이 들면 나는 힘이 나. 그 안간힘이 소설을 쓰게 했을까.
세상이 내게 훨씬 단순하고 그리고 너그러웠다면 나는 소설을 쓰지 않았을 것이고, 아마 인생에 대해서 알려고도 하지 않았을 것이다.
이 소설의 등장 인물들의 삶은 대부분 고난하다. 진희를 비롯해 가깝게는 철 없어 보이는 진희의 이모, 영옥부터 밤낮없이 농사일과 집안일에 바쁜 할머니, 남편의 폭력으로부터 떠나기를 시도했던 광진테라 아줌마, 유지공장 사고로 세상을 등진 이 선생님과 경자이모, 진희의 엄마와 아빠까지.
인생은 가까이서 보면 비극이고 멀리서보면 희극이라 했던 찰리채플린의 말이 괜한 게 아니다.
이들의 모습은 12살 소녀인 진희의 순수한 시선과 대비되어서 더 고통스럽게 느껴진다. 진희가 또래보다 성숙하고 냉소적이라는 점이 이 대비를 그나마 약하게 만들어주어 고맙다는 생각도 든다.
266P. 아줌마는 버스가 사라진 쪽을 바라보며 서 있다. 아까의 그 자세 그대로 등뒤로 손을 돌려 포대기를 받친 채 버스가 간 쪽으로 고개만 돌리고 있는 아줌마의 모습은 한 장의 사진처럼 정지되어 마음속의 음영을 강한 부조로 나타내고 있다. 아줌마는 갈 곳이 있는 게 아니었다. 떠나고 싶어하는 것이었다.
고달픈 삶을 벗어난들 더 나은 삶이 있다는 확신은 누구에게도 없다. 그러나 사람들은 떠난다. 더 나은 삶을 위해서라기보다 지금의 삶에서 벗어나기 위해. 아무 확신도 없지만 더이상 지금 삶에 머물러 있지 않아도 된다는 점 때문에 떠나는 이의 발걸음은 가볍다. 그런 떠남을 생각하며 아줌마는 사라진 버스 쪽을 그렇게 오래도록 바라보고 있는 것이리라.
광진테라 아줌마는 왜 떠나지 못했을까. 진희의 시선에서 서술된 것처럼 그는 현재의 삶을 걸고 도박을 하지 않기로 결심한 것이다.
동네 사람들이 수군거리는 것보다 진희는 더 많은 맥락을 알고 있다. 광진테라 아줌마의 선택이 만들어진 과정, 그리고 남들에게 속시원해보이는 선택은 아닐지라도 그 선택의 당위성을 좀 더 다각적으로 이야기하기 위한 작가의 의도일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해도 소설은 소설일 뿐인지라 그 설명이 납작할 수 밖에 없다. 광진테라 아줌마가 사라진 버스 꽁무니를 오래도록 바라보면서 얼마나 복잡하고 많은 변수와 경우의 수를 가늠해보았을지는 광진테라 아줌마 본인만 알 수 있기 때문이다.
더욱이 시골에서 가출한 여성에게 60년대의 대한민국이 얼마나 살가웠을지 우리는 알 수 없다.
하지만 그가 간과했을 수도 있는 사실은, 현재의 삶을 떠난다고 해서 더 나은 삶이 보장되어있지는 않지만 그 스스로가 새로운 사람이 되었을거라는 사실은 보장되어있었다는 것이다. 현재의 삶보다 더 고되고 어려운 삶이 닥칠지라도 더 강인하고 단단해진 스스로가 그것을 이겨내었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30년동안 반복하던 습관을 고친 사람, 사랑없는 오랜 관계에 이별을 고한 사람, 근속하던 회사에 사직서를 낸 사람, 새로운 나라로 이주한 사람.
삶에서 계속 반복되던 고리를 끊고 나온 사람은 얼마나 새롭고 강한 사람인가. 되풀이되는 굴레의 감옥에서 스스로를 해방시킨 사람이 어떻게 이전의 삶을 살던 사람과 같은 사람일 수가 있을까.
물론 광진테라 아줌마가 현실의 인물이었다면 이런 말조차 내뱉는게 주제넘는 것 같아 나도 결국은 입을 다물었을 것 같기는 하다.
- 자크 프레베르, [새의 선물] 전문
아주 늙은 앵무새 한마리가
그에게 해바라기 씨앗을 갖다주자
해는 그의 어린 시절 감옥으로 들어가버렸네
작가는 아주 짧고 알쏭달쏭한 자크 프레베르의 이 시에서 소설의 제목을 따왔다고 한다.
이 소설은 새의 선물 자체가 아니라 새의 선물을 받고 난 후의 과정에 더 방점이 찍혀있는 것 같다. 그래서 처음에는 제목이 더 모호하게 느껴졌다.
시의 전문을 읽으면 삶에 아주 늦게나마 희망과 사랑이 찾아와도 상실과 아픔으로 서늘하기만 했던 어린시절로 돌아가 그 시간 속에 숨어버리고 마는 장면이 그려지는데 이 소설과 꼭 맞춤형으로 지어진 시 같다.
12살의 진희와 그때를 회상하는 38세의 진희.
그 둘 사이에 어떤 시간과 사건들이 놓여있을지 흐릿하게나마 그려볼 수 있을 정도로, 왜 38세의 진희는 38세의 진희가 되었는지 어렴풋이 이해할 수 있을 정도로 이 둘의 인생에 깊이 들어갔다 나온 느낌이다.
내게 좋은 소설이란 등장인물의 삶이 통째로 다가오는 듯한 느낌을 주는 소설이라 생각하는데, 그런 면에서 [새의 선물]은 선물처럼 오랜만에 만난 좋은 소설이었다.
현실의 인물들보다도 더 깊이 있는 경험과 감정의 결속을 이뤄낼 수 있는 소설읽기의 경험을 나는 사랑한다.
시간과 공간을 초월해서 다른 사람의 삶을 살아보고 다른 관계을 겪어보고 다른 생각을 해볼 수 있게하는, 너무 단순하지만 멋진 소설의 목적을 가볍게 달성하는 이 소설이 맘에 든다.
2026년의 시작을 이 책과 함께 할 수 있어서 아주 기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