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대생 출신 게임 회사 CEO처럼 나누기
요즘 K콘텐츠가 잘 나간다. 넷플릭스에서는 '오징어게임'에 이어 '사내맞선'까지 전 세계 2위를 차지하면서 로맨틱 코미디 장르까지 한국 드라마의 저력을 보여줬다. 애플TV+에서는 '파친코'가 인기를 끌고 있고 2년 전 넷플릭스에서 대박 난 '이태원 클라쓰'는 일본에서 '롯폰기 클라쓰'로 리메이크된다는 소식까지! 매일매일 행복한 K콘텐츠 뉴스가 이어지고 있다.
그런데 나는 한국인의 특징 때문인지 한국 영화와 드라마가 잘 나간다는데 괜히 불안하다. '이게 최전성기 정점이면 어쩌지?', '넷플릭스가 그 공의 태반을 차지하는데 얘네 가입자수가 줄고 있다는데 어쩌지?', '디즈니플러스가 적극 공세 중인데 어쩌지?' 이런 더 잘 되고 싶어서 드는 불안 말이다.
방송, 영화의 공통점 하나. 둘 다 '~판'이라고 자주 불린다. 방송판, 영화판. 그런데 보통 미술판, 뮤지컬판이라는 말은 별로 안 쓰인다. '무슨무슨 문화장르+판'이라고 하면 뭐랄까 가치를 낮춰 부르는 뉘앙스가 풍긴다. '~판'이라는 접미사에는 그 업계 환경의 불합리성, 전근대성이 담겨있다. 주 52시간 근로조건 엄수, 계약서의 작성과 충실한 이행, 공정한 성공보수 분배 같은 가치와는 거리가 먼 냄새가 난다(이런 이야기를 언젠가 출판사 선배들과 했더니 "출판은 이미 판이 들어가 있는 거 아니겠니?"라는 답이 돌아왔다. 과연?).
사실 그 대신 젊은이의 열정과 청순한 활력. 이런 것들을 흡혈해서 굴러가던 업계라고 보는 게 맞을 거다. 열정페이로 갈아 만든 영화와 드라마로 남미도 가고 중동도 가고 미국도 가고 그래 왔다.
그러다 봉준호 감독의 영화 '기생충'이 모든 스태프와 표준근로계약서를 쓰고 제작한 과정이 알려지면서 분위기가 전환됐다. "봉 감독의 가장 정교함이 빛나는 것은 밥때를 너무나 잘 지킨다는 거죠. 식사시간, 이런 정확한 시간들을 지켜가지고 굉장히 행복한 환경에서 일할 수 있도록 해줍니다." 이른바 봉 감독과 주 52시간을 딱딱 지키며 만들었다는 말을 배우 송강호는 이렇게 맛있게 전했다.
영화 스태프들의 저임금·장시간 노동 문제는 제작사가 스태프를 근로계약이 아닌 도급계약 형태로 고용하는 관행에서 비롯됐다. 이렇게 되면 근로기준법상 노동자로 인정받지 못한다. 사용자가 최저임금과 법정 근로시간을 지키지 않아도 법의 보호를 받을 수 없다. 영화계 표준근로계약서는 이런 현장의 문제를 해소하기 위해 4대 보험 가입, 초과근무수당 지급, 계약 기간 명시 등을 담은 근로계약서다. 2005년 설립된 전국영화산업노동조합이 근로계약 체결과 4대 보험 가입, 모든 근로시간을 매일 기록하자는 운동을 펼치면서 필요성이 알려지기 시작했다. 영화 개봉이 2019년이었으니, 한국영화사 100년 만의 일이었다. 일반 근로자와 비등한 조건으로 보호받으며 일하게 된 것이!
현재 K콘텐츠의 주요 OTT 플랫폼인 넷플릭스와 우리 영화 드라마 업계는 어떻게 계약을 맺고 있을까? 드라마 제작사가 넷플릭스와 계약을 하면 넷플릭스가 모든 권리(방영권)와 저작권을 가져가는 대신에 제작비 전액과 제작비의 약 10%의 수익을 지원해주는 투자방식을 취한다. 그러니 '오징어게임', '지옥', '지금 우리 학교는'이 연달아 흥행했어도 추가적인 수익은 한 푼도 얻지 못한다. '오징어게임'에 200억 원을 지원한 넷플릭스가 3주 만에 시가총액이 28조가 증가했어도 한국 드라마 제작사는 박수만 받고 수익은 공유받지 못했다.
반면, 자국 문화 보호 전통이 강한 프랑스는 글로벌 OTT 회사가 프랑스에서 얻은 매출의 20~25%를 프랑스 콘텐츠에 투자하도록 의무화한 법안을 2020년 발의해, 지난해 12 월 OTT 회사들과 합의했다. 이에 따라 넷플릭스·디즈니·아마존은 올해 프랑스를 포함한 유럽 제작사들에 2억 5000만~3억 유로(3423억~4108억 원)를 지급했다.
일본은 애니메이션 제작사들이 저작권을 갖는데 한 해 저작권 규모는 약 23 조원 정도다. 이 수익을 통째로 넘길 수 없다고 지속적으로 문제를 제기한 결과 제작비 전액 투자가 아닌 제작사와 분담 투자 형태로 진행된다고 한다.
미국은 역시 '스트라이크'의 나라다. 노동조합이 잘 되어있다. 그간 창작자들이 단체행동을 통해 자신들의 권익을 확보해, 미국 감독 조합은 2020년 7월부터 넷플릭스를 비롯한 웹 콘텐츠에 대해 보상을 받는다. 웹 콘텐츠에 대한 개념이 없어 저작권을 인정받지 못하다가 제작자들이 2017년부터 조합을 통해 요구해 받아낸 권리다.
공통적으로 그래도 넷플릭스와 현지 제작사간 어느 정도는 수익 분배가 이뤄지고 있는 셈이다. 우리나라는 이제 시작 단계라 협상 경험은 부족하지만 최저 수익률 보장이나 창작 기여도에 따른 저작권 보유 같은 장치가 생겨야 할 것 같다.
K콘텐츠로서 글로벌 시장에서 먼저 성공한 업계가 있다. 바로 게임산업. 전 세계를 대상으로 어마어마한 돈을 벌고 있는 국내 게임회사들은 카카오게임만 제외하고는 대부분 CEO가 공대생 출신이라는 공통점이 있다. 김택진 엔씨소프트 대표와 권혁빈 스마일게이트 대표는 전자공학, 얼마 전 안타깝게 세상을 떠난 넥슨의 창립자 김정주 대표는 컴퓨터공학. 게임산업은 일찌감치 글로벌 마켓으로 진출했기 때문에 단시간에 수익이 급속도로 불어나 금세 대형 사이즈가 되었다. 이때 공대생 출신의 CEO들은 자신들의 전공을 살려 창작 기여도에 따라 수익을 배분하는 프로그램 또한 잘 짰다. 이로써 창작자들이 지속적으로 동기 부여를 받을 수 있었고 개발자는 물론 각 분야의 창작자들은 서로 시너지 효과가 날 수 있었다.
성과를 기준으로 보상이 엄격하게 이루어지는 구조로 상사는 물론 동료 평가 등 미국의 빅테크 기업처럼 360도 다면평가가 많이 시행되는 곳도 바로 이런 게임/IT업계다. 이러한 인사 평가가 한국적 정서에는 다소 이질적이어서 간혹 직장 내 따돌림 이슈와 연결되어 부정적 기사가 나오기도 하지만, 공정한 보상을 위한 장치임에는 틀림없다.
MZ세대가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가치가 바로 '공정'이다. 블라인드 앱으로부터 출발한 30대 초반 대기업 사무직 노조가 지난해부터 자주 이슈로 등장했다. 성과와 보상에 민감한 2030 세대는 더 이상 관행이라는 이름으로 불합리한 분배 구조를 참지 않는다. 지금 물이 들어온 영화, 드라마 업계가 더 잘 되려면 이런 측면에서 앞서 글로벌화된 콘텐츠 산업 선배인 게임업계를 참고해야 한다.
'빨리 가려면 혼자서 가고, 멀리 가려면 함께 가라'는 아프리카 속담은 흔히 상생의 중요성을 말할 때 인용된다. 공정한 분배는 함께, 멀리, 잘 가기 위한 기본 요소다. K콘텐츠의 인기를 신드롬으로만 만족할 게 아니라 지금 해야 할 일은 거대 OTT 플랫폼에 권리를 요구하고 공정한 분배 시스템을 만드는 일이다.
연예인 가운데는 자신이 비즈니스의 머리에 서고 다른 친구들에게 잡(job)을 제공해 '함께 먹고살 수 있게끔’ 하는 셀렙들이 종종 있다. 갤러리 겸 카페인 스튜디오 콘크리트를 운영하는 배우 유아인이나 일본에서 '사마'급 인기를 구가하는 배우 장근석 등이 그렇다. 어쩌면 불안정한 연예계 분배 시스템 대신 개인이 가진 능력으로 마련한 시스템의 일종이 아닐까 하고 생각해보게 된다. 비정규직일수록 '먹고사니즘'의 문제는 크게 와닿는다.
콘텐츠 업계의 아주 작은 이파리 하나인 내 입장에서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 나와 업계 친구들은 한 번쯤은 열정페이 문제로 울어본 경험이 없지 않다. 그러나 이제는 세월이 흘러 그 분배 시스템을 만들어야 할 세대가 되었다.
필요를 느끼는 건 사고가 터진 후라고 그랬나. 실제로 4명가량의 직원을 두고 스타일링 스튜디오를 운영하는 친구는 막내 직원의 고용노동부 고발로 '송사'의 당사자가 되기도 했다. 그 자신이 받았던 도제식 교육이 익숙했던 친구가 일반적인 근로시간과 보수 지급을 체계적으로 지키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단순하다. 봉준호 감독이 그랬던 것처럼 계약서 쓰고 밥 시간을 지키고 순리대로 일하는 것. 그리고 이익이 더 많이 남았다면 조금이라도 나누는 것.
사십몇 년 산 나의 경험 나의 빅데이터 분석 결과, 잘 될 때 더 잘 되는 사람들의 비밀은 '잘 나눈다'였다. 그렇지 않고 혼자 잘해서 잘 된 줄 알고 독선적으로 구는 사람들은 원히트원더로 끝나는 경우를 종종 봤다. 더 잘 되고 싶다? 그러면 더 나누자. (K콘텐츠 관계자들, 제 목소리 들리나요? 이미 알고 계시죠? 함께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