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속노화의 인기
최근 잡곡밥의 인기가 높다. 특히 귀리, 현미, 렌틸콩을 혼합한 잡곡밥을 많이 찾는다. 그런데 눈에 띄는 점은 잡곡밥을 찾는 사람이 중장년층뿐만 아니라 2030 젊은 세대도 해당된다는 것이다.
잡곡밥을 찾는 이가 늘어난 것은 요즘 주목받고 있는 개념인 ‘가속노화’와 ‘저속노화’ 때문이다. 가속노화란 실제 정상적인 노화 속도보다 빠르게 신체적인 노화가 진행되는 것을 말하는데 정제 탄수화물, 단순당 섭취 등 안 좋은 식습관과 운동 부족, 과도한 스트레스로 인해 발생한다고 한다. 가속노화를 오래 방치하면 일상생활에 제약을 받는 노쇠가 빨리 찾아와 삶의 질이 낮아지는 것은 물론, 사회 전체로 볼 때도 악영향을 미칠 수 있다.
가속노화 개념은 서울아산병원의 정희원 노년내과 교수가 저서를 통해 소개했는데, 유명 TV 프로그램과 유튜브 콘텐츠에 출연하면서 대중적으로 알려졌다. 또한 정 교수는 직접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 계정을 운영하며 적극적으로 이 개념을 전파하고 있다. 그는 어떻게 관리하느냐에 따라 노화 속도를 4분의 1까지 늦출 수 있다고 밝혔다. 이것이 바로 사람들이 이야기하는 저속노화(혹은 ‘감속노화’)다.
저속노화를 실천하는 방법 중 관심이 가장 높은 것은 식단관리다. 앞서 언급한 렌틸콩이 포함된 잡곡밥은 정 교수가 제안한 식단의 일부다. 원래 해외에서 개발된 노화·치매 예방을 위해 고안된 ‘MIND 식단’을 한국식으로 적용한 것이다. MIND는 ‘Mediterranean-DASH Intervention for Neurodegenerative Delay’의 약자로 통곡물, 녹색잎채소, 콩류, 베리류 등의 섭취를 권장하고 적색육이나 유제품은 지양하는 식단이다.
혈당관리에 관한 관심도 높다. 최근 블로그를 비롯한 SNS에는 일반인이 당뇨와 같은 혈당 조절의 문제가 없는데도 혈당측정기를 휴대하고 다니며 자신의 식전·식후 혈당 변화를 공유하는 글이 자주 눈에 띈다. 음식물을 먹고 나서 혈당이 급격히 높아졌다가 떨어지는 것을 뜻하는 ‘혈당 스파이크’가 몸에 좋지 않다는 게 알려지면서 어떤 음식이 혈당을 급격하게 높이는지 자가 테스트를 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동일한 탄산음료를 제로 버전으로 먹었을 때와 일반 버전으로 먹었을 때의 혈당 변화를 비교한다거나 ‘의외로 나는 햄버거는 괜찮더라’처럼 어떤 음식을 어떤 조합으로 먹었을 때 혈당 변화가 크지 않은지를 관찰한다.
이처럼 일상적인 식사를 관리하는 소비자가 많아지면서 식품업계도 변화하고 있다. 흔히 '밥' 하면 떠오르는 이미지는 따끈한 김이 올라오는 흰쌀밥일 것이다. 대표적인 즉석밥 브랜드 '햇반'의 이미지 역시 그렇다. 하지만 백미에 대한 선호가 낮아지며 햇반도 웰니스 카테고리에 힘을 쏟고 있다. 예를 들어 칼로리가 낮은 곤약을 섞은 '곤약밥' 시리즈, 밥 대신 여러 곡물을 섞은 '그레인보울' 시리즈, 최근에는 솥밥의 느낌을 내는 '솥반' 시리즈도 출시했다. 최근 몇 년 사이 솥밥은 외식업 메뉴로도 인기를 얻고 있다고 한다. 건강하다는 인식과 함께 대접받는 느낌도 들기 때문이다.
밥뿐만 아니라 모든 메뉴에 '저당' 바람이 불고 있다. 은근히 당분이 높은 소스와 장류도 '저당 고추장', '저당 불닭소스'이 출시되었고 '저당 식빵', '저당 프로틴 피낭시에', '저당 크림빵' 까지 영역을 가리지않고 저당 제품으로 개발되고 있다. 이러한 제품들은 ‘속세의 맛’을 부족함 없이 구현하는 덕분에 "맛있는거 이왕이면 건강하게 먹자"고 생각하는 소비자들의 장바구니를 채우고 있다.
건강은 남녀노소 누구나 관심을 갖는 이슈다. 하지만 저속노화를 비롯하여 최근의 건강관리는 옛날 같지 않다. 요즘 소비자들이 가속노화 개념을 어떻게 활용하는지를 보면 알 수 있다. "오늘은 주말이니까 가속노화 가 보자!"거나 "족발에 치킨을 먹었지만 샐러드도 곁들였으니 이 정도면 중속노화?"라는 식이다. 건강을 위해 맛있고 자극적인 맛을 포기한다기보다 맛과 건강의 균형을 맞춰 가며 일상적으로 꾸준히 관리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건강이란 단순히 '아프지 않은 상태'를 넘어 몸도 마음도 행복한 상태이며, 건강관리는 나 자신을 아끼고 투자하는 자기계발의 일종이다. 실제로 대학내일20대연구소의 조사에 따르면, Z세대가 자기개발 하고 싶은 분야로 꼽은 1순위는 '운동, 스포츠' (40.8%)였다. 이는 『트렌드 코리아 2022』에서 소개된 이래 우리 사회 주요 가치로 자리 잡아가고 있는 ‘헬시플레저’의 연장선상에 있다.
여기에 저속노화 트렌드는 헬시플레저에서 하나 더해진 점이 있다. 이제 가속페달에서 발을 떼고 싶다는 마음이다. 도파민에 중독됐다고 표현할 만큼 숏폼 콘텐츠, 스마트폰 중독, 탕후루와 마라탕에 길들여진 입맛으로부터 스스로 위기감을 느끼는 사람이 많아지고 있는 것이다.
실제로 청년층에 가속노화 현상은 먼미래가 아닌, 현재의 문제로 다가온다. 청년층 건강이 크게 악화됐기 때문이다. 건강보험심사평가원 자료에 따르면 청년층에 해당하는 20~39세 국민 중에서 만성질환자 수(제2형 당뇨+고혈압+고지혈증 단순 합산)가 2017년엔 45만7000명 수준이었으나 2021년 63만2900명으로 불과 4년 만에 약 38% 증가했다. 대한비만학회가 발간한 ‘2023 비만 팩트시트’에서는 소아·청소년 중 남자아이들의 비만 유병률이 2012년에서 2021년 사이 10년간 10.4%에서 25.9%로 2.5배 급증했다고 밝히기도 했다. 예전 세대에 비해 요즘 세대가 허약하다는 말이 그저 느낌이 아닌 것이다.
저속노화라는 단어를 영어로 표현하면 ‘슬로 에이징(slow aging)’쯤 된다. 몇 년 전부터 외국에선 안티 에이징이라는 말 대신 슬로 에이징이라는 단어를 사용하기 시작했다. 안티 에이징이라는 표현이 노화를 무조건으로 막아야 한다는 인식을 주기 때문이다. 슬로 에이징은 노화를 자연스러운 현상으로 인정하자는 취지를 담고 있는데, 사실 최근의 시장 변화를 보면 본래 취지와는 반대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
최근 유럽에선 아동·청소년 사이에서 노화 방지 화장품이 인기를 끌고 있다고 한다. 이로 인해 스웨덴의 유명 드럭스토어 체인에서는 만 15세 미만 어린이가 노화 방지 화장품을 구매하기 위해서는 부모의 동의를 받도록 하는 정책을 시행하기로 했다는 것이다. 이제껏 안티 에이징의 주 타깃층이 노화(에이징)를 체감하는 중장년층이었다면 현재 저속노화 트렌드에서 볼 수 있듯이 슬로 에이징의 프레임은 전 연령층을 대상으로 한다. 물론 단순히 용어 사용의 문제는 아니겠지만 어린이가 ‘젊은’ 피부를 추구한다니 모순적인 현상임은 분명하다.
관련 산업 전망은 매우 밝다. 연령을 불문하고 건강과 노화에 관심이 커지면서 수요가 커졌을 뿐만 아니라 분야도 지속적으로 확장하고 있다. 기존의 뷰티제품이나 영양제뿐 아니라 간식부터 운동, 스트레스 케어까지 모든 것이 건강관리의 영역이 됐다. 젊음에 대한 열망은 인간의 본능적인 욕구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도리어 관리해야 할 게 하나둘씩 늘어나고 '젊음'이라는 틀 속에 영원히 갇히는 건 아닌가, 돌아보는 것도 필요하겠다.
본 내용은 필자가 국방일보에서 연재하는 <병영에서 만나는 트렌드>글을 수정한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