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남은 세 번의 직장을 경험한 곳이지만 그곳에 머물렀던 시간만큼 편한 도시는 아니다. 이곳에서의 감정은 부대끼며 견딘 애증의 마음과 가깝다. 강남에 있을 땐 30분이라도 나만의 휴식공간이 절실하다. 9시간 남짓, 하루의 반을 보내는 곳이 강남이다. 물리적인 시간을 내 마음대로 조종할 수는 없으니, 사무실 건물을 벗어나 잠깐의 산책을 해결책으로 삼는다.
20대 중반 막 사회생활을 시작한 첫 번째 회사에서는 산책을 좋아하는 사람이 없었다. 주변 식당에서 점심을 먹고 나면 대부분은 시원한 카페에 앉아 있거나 사무실에서 짧은 낮잠으로 시간을 보내기를 원했다. 그때마다 잠시 나가서 걸었던 것이 산책의 시작이다. 논현동에 위치한 회사 건물을 나서면 8차선 도로가 펼쳐져 있고 그 옆으로 '논현 고개'라고 불리는 높은 언덕을 따라 좁은 인도가 쭉 뻗어 있었다. 강남 한복판에서 평일 낮의 산책은 퍽 외롭기도 했지만 잠시 숨을 돌릴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기도 했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런 곳을 산책하자는 제안도 썩 달갑게 들리지는 않았을 것 같다. 도로에는 경적을 울려대는 승용차와 버스가 지나가고, 그들이 뿜어대는 먼지를 마실 바에야 차라리 실내가 안전하긴 할 테다. 특히 논현고개는 경사가 심해 여름에 산책은 감히 꿈도 못 꾼다.
두 번째 회사는 강남구 역삼동이었다. 건물은 강남역 근처로 평지가 대부분이었는데, 대로변에 상권들이 있어 인도가 넓었고 가로수도 있으니 편하게 걷기에 좋았다. 그런데 강남의 골목은 들어섰다 하면 보차로가 대부분이다. 보차로는 차도와 인도로 활용되는 도로를 말하는데, 공사장 트럭 같은 대형 차량들도 많이 다니기 때문에 그 옆으로 사람이 다닐 수 있지만 꽤 위험하다. 산책로로 삼기에 기분이 썩 좋지도 않다.
지금 다니고 있는 세 번째 회사는 또다시 논현동이다. 첫 회사와 업종이 전혀 다른 곳이지만 걸어서 10분 거리에 위치해 있다. 여전히 나는 강남이라는 사실에 불평하고 싶은 마음은 없다. 제한 시간 내, 고정된 공간에서 주어진 일을 처리해야 하는 현실이니 어쩌겠는가. 일터에서 잠시 숨 돌릴 공간이라도 있으면 좋겠다는 나의 바람은 앞으로 일을 더 잘 해내기 위한 최소한의 필요조건이기도 하다. 지금 회사에서는 가끔 맘 맞는 동료들과 동네를 한 바퀴 도는 것으로 산책을 하고 있다. 어떤 날은 혼자 다녀오기도 한다. 동네에 작은 놀이터가 있는데 그늘도 있으니 바람 쐬기에도 적당하다. 산책을 할만한 귀여운 이유들에 위안을 삼고 오늘도 강남으로 나선다.